서울육백년사 (4) 김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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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2-07-28 19:29 조회1,665회 댓글0건본문
(성 명】 김사형(金士衡)
【생몰년】 1333(충혜왕 복위 2)∼1407(태종 7)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평보(平甫), 낙포(洛圃)
【시 대】 조선 전기
【성 격】 문신
1333(충혜왕 복위 2)∼1407(태종 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로서 상락후(上洛后8 김영후(金永煦)의 손자이며, 부밀직사사 김천(金쾸)의 아들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후 감찰 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후에 개성 부윤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있은 뒤에는 교주강릉도 도관찰출척사로 나갔고, 공양왕 2년(1390)에는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을 지내다가 곧 지문하부사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츺) · 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 정몽주와 대결하여 서로 탄핵하였다.
1392년 삼사 우사 · 동 판도평의사사로 있다가 여러 장상(將相)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 찬성사로 판상서사사와 병조 전서를 겸하였다. 같은 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에 봉해졌다. 그 후 좌정승을 지냈고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 때 적장자를 후사로 세울 것을 주장했고, 정종이 즉위하자 정사공신 1등이 되었다. 정종 1년(1399)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 태종 1년(1401)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어 이듬해 영사평부사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 태조가 극진히 아낀 신하 중의 한 사람이며 신중하고 분수를 지키는 처세로 벼슬을 지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관련항목】 김작(金殯) 민개(閔開) 이무(李茂) 김수동(金壽童)
▣ 김태서 -
▣ 솔내 영환 -
▣ 김재익 -
▣ 태영/문 -
【생몰년】 1333(충혜왕 복위 2)∼1407(태종 7)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평보(平甫), 낙포(洛圃)
【시 대】 조선 전기
【성 격】 문신
1333(충혜왕 복위 2)∼1407(태종 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로서 상락후(上洛后8 김영후(金永煦)의 손자이며, 부밀직사사 김천(金쾸)의 아들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후 감찰 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후에 개성 부윤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있은 뒤에는 교주강릉도 도관찰출척사로 나갔고, 공양왕 2년(1390)에는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을 지내다가 곧 지문하부사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츺) · 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 정몽주와 대결하여 서로 탄핵하였다.
1392년 삼사 우사 · 동 판도평의사사로 있다가 여러 장상(將相)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 찬성사로 판상서사사와 병조 전서를 겸하였다. 같은 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에 봉해졌다. 그 후 좌정승을 지냈고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 때 적장자를 후사로 세울 것을 주장했고, 정종이 즉위하자 정사공신 1등이 되었다. 정종 1년(1399)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 태종 1년(1401)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어 이듬해 영사평부사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 태조가 극진히 아낀 신하 중의 한 사람이며 신중하고 분수를 지키는 처세로 벼슬을 지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관련항목】 김작(金殯) 민개(閔開) 이무(李茂) 김수동(金壽童)
▣ 김태서 -
▣ 솔내 영환 -
▣ 김재익 -
▣ 태영/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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