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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육백년사(10) 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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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2-07-28 20:19 조회1,8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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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김수()

【생몰년】 1547(명종 2)∼1615(광해군 7)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자앙(子昻), 몽촌(夢村)

【시 호】 소의(昭懿)

【저서·작품】 《몽촌집(夢村集)》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547(명종 2)∼1615(광해군 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으로 첨지중추부사 김로(金魯)의 손자이며, 사재감 정 김홍도(金弘度)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서울에서 거주하였으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생원으로 있다가 선조 6년(1573)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지내고, 그 이듬해 홍문관 정자 · 저작을 역임하고, 다시 예문관 봉교를 거쳐 사헌부 감찰로 승진하였다. 이어 정언 · 수찬 · 교검 · 지평 · 직강 등을 역임하고 홍문관 교리가 되었을 때 왕명으로 《십구사략(十九史略)》을 개수하고 주(注)를 붙였다. 그후 직제학 · 승지를 거쳐 1587년 평안도 관찰사에서 면직되었다가 다시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부제학 · 대사헌 · 병조 판서 · 이조 판서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591년 다시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으며 1592년 11월 13일에 한성부 판윤으로 서울에 돌아왔다. 그후 지충추부사 · 우참찬 · 호조 판서를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렀으나 광해군 5년(1613) 손자 김비(金秘)가 적신들의 무고로 옥사하자 그도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곧 병으로 죽었다.

일찍이 호조 판서로서 임진왜란 때 치적을 올려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1591년 홍여순(洪汝淳)이 간계를 꾸며 사류(士流)를 몰아내려고 그를 크게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그의 죽음을 듣고 나라의 충신을 잃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시호는 소의(昭懿)이며, 저서로 《몽촌집(夢村集)》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관련항목】 박사제(朴思齊) 이광 (李洸) 고희(高曦) 이항복(李恒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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