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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육백년사 (12) 김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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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2-07-29 06:03 조회1,6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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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김자점(金自點)

【생몰년】 1588(선조 21)∼1651(효종 2)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성지(成之), 낙서(洛西)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588(선조 21)∼1651(효종 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강원도 관찰사김억령(金億齡)의 손자로 아버지는 김함이며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벼슬이 병조 좌랑에까지 올랐으나 광해군(光海君) 말년에 대북파에 의해 쫓겨났다. 광해군 14년(1622) 이귀(李貴) · 김류(金?) · 신경진(申景所) · 최명길(崔鳴吉) · 이괄(李适)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계획하고 이듬해 3월 홍제원 밖 세검정에서 이귀 · 이괄과 함께 거사하여 광해군과 집권세력인 대북파를 축출하고 능양군(綾陽君 : 후의 인조)을 추대하여 반정에 성공하였다. 반정에 성공한후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훈록되고 호조 좌랑을 거쳐 동부승지에 특진되었다. 당시 서인(西人)이 공서(功西)와 청서(淸西)로 갈라지자 공서의 편에서 김상헌(金尙憲) 등 유림을 탄압하였다. 인조 2년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순검사 임진 수어사(巡檢事臨津守禦使)에 임명되었다. 1630년 한성부 판윤을 거쳐 1633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으나 이 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토산(兎山) 싸움에서 참패한 죄로 전쟁이 끝나자 절도정배(絶島定配)당했다.

1639년 인조의 배려로 풀려 나와 다음해에 강화부 유수가 되고, 이어 손자 김세룡(金世龍)을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결혼시켜 왕실의 외척이 되고 인조 20년(1642) 병조 판서에 승진하여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의 봉함을 받았다. 원두표(元斗杓)와 세력다툼을 벌여 공서(功西)가 양분되자 낙당(洛黨)의 영수로서 반대파를 탄압하였다. 이듬해 판의금부사로 등극사(登極使)가 되어 청(淸)에 다녀온 뒤 우의정에 승진되고 1644년 좌의정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1646년 인조(仁祖)가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를 죽이려는 내심을 간파하고 인조의 수라상에 독약을 투입한 뒤 그 혐의를 강빈에게 미루어 죽였으며,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濟州)에 유배보내게 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김상헌 등을 등용하여 북벌(北伐)을 꾀하고, 그를 파직시켰다. 다음해 그는 유배지인 홍천(洪川)에서 심복인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조선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음과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장릉(長陵)의 지문(誌文)에 청(淸)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명(溟)의 연호를 쓴 사실을 청(淸)에 알렸다. 이에 청나라는 크게 의심하고 대군(大軍)을 보내 진부(眞否)를 물었으나 효종(孝宗)의 기민한 수습으로 무마되었다. 결국 그의 반역행위가 드러나 광양(光陽)에 유배되었다가 1651년 아들 김익(金?)의 역모가 들어나 역모죄로 아들과 함께 사형당하였다. 그가 마포구 성산동 풀뭇골에서 병기(兵器)를 만들었다는 유래가 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國朝寶鑑, 韓國人物大系

【관련항목】 김집(金集) 김홍욱(金弘郁) 송준길(宋浚吉) 신면(申冕) 엄정구(嚴鼎耉) 원두표(元斗杓) 이경석(李景奭) 이광정(李光庭) 이상일(李尙逸) 이시방(李時昉) 이시해(李時楷) 이홍연(李弘淵) 임의백(任義伯) 장응일(張應一) 정지호(鄭之虎) 정태화(鄭太和) 송시열(宋時烈) 배시량(裵時亮) 이완(李浣) 임경업(林慶業) 지계최(池繼身) 인조(仁祖) 효종(孝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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