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육백년사 (13) 김제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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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2-07-29 06:06 조회1,833회 댓글0건본문
【성 명】 김제갑(金悌甲)
【생몰년】 1525(중종 20)∼1592(선조 25)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순초(順初), 의재(毅齋)
【시 호】 문숙(文肅)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525(중종 20)∼1592(선조 2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로 진사(進士) 김석(金錫)의 아들이며 고려 말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8년(1553)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다음 1555년에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고, 1558년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선조 6년(1573)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선조 14년(1581)에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1583년에 우승지(右承旨)로서 도승지(都承旨)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李珥) · 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8년 평안도지역 국경방어강화책의 일환으로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임명되었으나 나이 많은 문관(文官)을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정언신(鄭彦信)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왜장(倭將) 삼길성(森吉成)의 군사가 원주(原州)를 침공하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영원산성(쫥原山城)에서 싸우다가 성(城)이 함락되자 부인 이씨(李氏) ·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이조 판서 겸 경연(吏曹判書兼經筵) ·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 의금부사(義禁府事) · 성균관사(成均館事) · 춘추관사(春秋館事)에 추증하였다. 원주의 충렬사(忠烈祠), 괴산(槐山)의 화엄서원(華嚴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1966년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忠烈碑)가 세워졌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名世叢攷, 韓國名門統譜
【관련항목】 김시헌 (金時獻)
▣ 솔내 영환 -
▣ 태영/문 -
【생몰년】 1525(중종 20)∼1592(선조 25)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순초(順初), 의재(毅齋)
【시 호】 문숙(文肅)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525(중종 20)∼1592(선조 2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로 진사(進士) 김석(金錫)의 아들이며 고려 말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8년(1553)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다음 1555년에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고, 1558년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선조 6년(1573)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선조 14년(1581)에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1583년에 우승지(右承旨)로서 도승지(都承旨)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李珥) · 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8년 평안도지역 국경방어강화책의 일환으로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임명되었으나 나이 많은 문관(文官)을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정언신(鄭彦信)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왜장(倭將) 삼길성(森吉成)의 군사가 원주(原州)를 침공하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영원산성(쫥原山城)에서 싸우다가 성(城)이 함락되자 부인 이씨(李氏) ·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이조 판서 겸 경연(吏曹判書兼經筵) ·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 의금부사(義禁府事) · 성균관사(成均館事) · 춘추관사(春秋館事)에 추증하였다. 원주의 충렬사(忠烈祠), 괴산(槐山)의 화엄서원(華嚴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1966년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忠烈碑)가 세워졌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名世叢攷, 韓國名門統譜
【관련항목】 김시헌 (金時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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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영/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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