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은유고서(紫隱遺稿 序)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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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2-08-11 16:10 조회1,654회 댓글0건본문
자은유고서(紫隱遺稿 序)
군자의 학문은 위기할 따름이다
위기의 학문이란 도리와 덕행을 몸에 익히고 심득 궁행하는 것이요
위인의 학문이란 심득궁행에 힘쓰지 않고 거짓으로 꾸며서 명예를 구하는것을 말한다
자은처사 김공은 재식과 사장에 힘쓰지 아니하고
겸허로 자처하며 담해로 자청하여 일생을 살다가 가셨다
공은 출처와 덕행으로 이름 높은 송은 만취 선조의 영예로서
기산옹의 가학에 승발유염 되었으며 효제는 천성이요 시례는 근천으로 이루어졌다.
친환에 시탕과 당리의 정성을 다하고
친상에는 고석에 눈물의 흔적이 마르지 않았으며
훈호상화의 우애와 제가검약의 모차는 향린의 칭송을 받았다
일찌기 재종형 운산공을 사사하여 공부 하였으나
독려와 근장없이 경전의 이치를 탐구하여 학문이 발전되니 제류간에 성망이 높았다
공은 고종 무인생으로 경술 국치를 맞이할당시 삼십여세였으니
경륜과 포부를 펼쳐볼 겨를도 없이 국파군망의 암흑기가 시작되고
근역천리에 풍운은 조석으로 급변하여 나라의명운이 몰락할 때 였다
뜻있는 지사들은 혹 해외로 망명하고
혹 국내에서 활동하고 혹 비분강개하여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이도 있었다.
그러나 노모와 백씨가 계신지라 순국하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였다.
당시 시정에는 모리와 아부로 개화의 풍조에 휘말려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인사가 횡행 하였으나
탁류에도 몸을 굳건히 지켜 백의보발로 흔들림이 없으니
사류들은 조수고결한 선비라고 말하였다.
공의 평소생활은 후진을 교해하고 수분위기할 뿐이요
유소(儒所)의출입도 자제 하고 약간의 저술을 남겼다.
만제시서와 서기장갈의 사본이 적지 않았으나
경란(庚亂)에 산일되고 영성을 면치 못하니 후인의 유한일 따름이다.
구추향년으로서세하니 사류들은
<기문수지진성락 노숙향린복유유(글하는 선비 새벽별 지듯 떨어지니 고을안의 덕망있는 이 다시 누가 있는가)> 하며
향린의 앞날을 걱정 하였으며
족질 운강 위윤공은
<자소근공노대청 불리석척보애정 명리무관유수지 안빈대분낙평생
(소년시절 부지런한 공부 늙어서 더욱 정밀하고 법도에 따른 생활 진심으로 보존 했네
명리에 관여 않고 숨어서 뜻을 길러 청빈해도 분수 지켜 평생을 즐겼다네)>
하고 공의 일생을 애도 하였다
이로서 초연정개한 평생을 미루어 알수 있다.
희라 세상도애한
오늘날 학계기금의 축리여자로 유고를 간행하려 함에
한문원전을 해득하는 이가 드문지라 국역 발간이 보편화 되었지만
자력의 미급으로 우선 원문만 행간 하게 되었다
신사세말의 어느날 계회의 중의로 머릿글을 청촉하는지라 고사하지 못하였다
회상하여 공의 유자적 풍의와 유고장수의 신독을 우러르며 옷깃을 여미고
이글을 적어 삼가 서문을 대신한다
2002년 임오 원월 일 족손 창회 근서
*******************************************************************************************
p/s 한자 틀린곳이 많을것임.추후 고칠 것이며 우선 소개 올립니다.
다음에 유사를 올릴 예정!
공의 휘는 봉종(鳳鍾)이요 자는 원서(元瑞)이며 호는 자은(紫隱) 이다
1878년(고종무인 9월 12일)生~1969 (을유 12월 3일)沒
****
사촌마을에선 상촌할배 라 칭하던 분
정자관 쓰시고 92세 사신 큰 선비 이시며
그 당시 물이 좋아 오래 산다는 마을 이라며 사진과 함께 신문에 크게 나신 걸로 기억됩니다
전번 소개 드린 고 김일수 족조님의 사례요람 서문을 쓰신 어른이십니다
또한
본 지면을 빌어 장손 윤수 족조님의 명복을 빕니다
▣ 김발용 -
▣ 김재원 -
▣ 김재익 - 상촌 아제 간지 벌써33년이란 세월이...
▣ 김윤만 -
▣ 김항용 -
▣ 김영환 -
▣ 김은회 -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군자의 학문은 위기할 따름이다
위기의 학문이란 도리와 덕행을 몸에 익히고 심득 궁행하는 것이요
위인의 학문이란 심득궁행에 힘쓰지 않고 거짓으로 꾸며서 명예를 구하는것을 말한다
자은처사 김공은 재식과 사장에 힘쓰지 아니하고
겸허로 자처하며 담해로 자청하여 일생을 살다가 가셨다
공은 출처와 덕행으로 이름 높은 송은 만취 선조의 영예로서
기산옹의 가학에 승발유염 되었으며 효제는 천성이요 시례는 근천으로 이루어졌다.
친환에 시탕과 당리의 정성을 다하고
친상에는 고석에 눈물의 흔적이 마르지 않았으며
훈호상화의 우애와 제가검약의 모차는 향린의 칭송을 받았다
일찌기 재종형 운산공을 사사하여 공부 하였으나
독려와 근장없이 경전의 이치를 탐구하여 학문이 발전되니 제류간에 성망이 높았다
공은 고종 무인생으로 경술 국치를 맞이할당시 삼십여세였으니
경륜과 포부를 펼쳐볼 겨를도 없이 국파군망의 암흑기가 시작되고
근역천리에 풍운은 조석으로 급변하여 나라의명운이 몰락할 때 였다
뜻있는 지사들은 혹 해외로 망명하고
혹 국내에서 활동하고 혹 비분강개하여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이도 있었다.
그러나 노모와 백씨가 계신지라 순국하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였다.
당시 시정에는 모리와 아부로 개화의 풍조에 휘말려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인사가 횡행 하였으나
탁류에도 몸을 굳건히 지켜 백의보발로 흔들림이 없으니
사류들은 조수고결한 선비라고 말하였다.
공의 평소생활은 후진을 교해하고 수분위기할 뿐이요
유소(儒所)의출입도 자제 하고 약간의 저술을 남겼다.
만제시서와 서기장갈의 사본이 적지 않았으나
경란(庚亂)에 산일되고 영성을 면치 못하니 후인의 유한일 따름이다.
구추향년으로서세하니 사류들은
<기문수지진성락 노숙향린복유유(글하는 선비 새벽별 지듯 떨어지니 고을안의 덕망있는 이 다시 누가 있는가)> 하며
향린의 앞날을 걱정 하였으며
족질 운강 위윤공은
<자소근공노대청 불리석척보애정 명리무관유수지 안빈대분낙평생
(소년시절 부지런한 공부 늙어서 더욱 정밀하고 법도에 따른 생활 진심으로 보존 했네
명리에 관여 않고 숨어서 뜻을 길러 청빈해도 분수 지켜 평생을 즐겼다네)>
하고 공의 일생을 애도 하였다
이로서 초연정개한 평생을 미루어 알수 있다.
희라 세상도애한
오늘날 학계기금의 축리여자로 유고를 간행하려 함에
한문원전을 해득하는 이가 드문지라 국역 발간이 보편화 되었지만
자력의 미급으로 우선 원문만 행간 하게 되었다
신사세말의 어느날 계회의 중의로 머릿글을 청촉하는지라 고사하지 못하였다
회상하여 공의 유자적 풍의와 유고장수의 신독을 우러르며 옷깃을 여미고
이글을 적어 삼가 서문을 대신한다
2002년 임오 원월 일 족손 창회 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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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한자 틀린곳이 많을것임.추후 고칠 것이며 우선 소개 올립니다.
다음에 유사를 올릴 예정!
공의 휘는 봉종(鳳鍾)이요 자는 원서(元瑞)이며 호는 자은(紫隱) 이다
1878년(고종무인 9월 12일)生~1969 (을유 12월 3일)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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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마을에선 상촌할배 라 칭하던 분
정자관 쓰시고 92세 사신 큰 선비 이시며
그 당시 물이 좋아 오래 산다는 마을 이라며 사진과 함께 신문에 크게 나신 걸로 기억됩니다
전번 소개 드린 고 김일수 족조님의 사례요람 서문을 쓰신 어른이십니다
또한
본 지면을 빌어 장손 윤수 족조님의 명복을 빕니다
▣ 김발용 -
▣ 김재원 -
▣ 김재익 - 상촌 아제 간지 벌써33년이란 세월이...
▣ 김윤만 -
▣ 김항용 -
▣ 김영환 -
▣ 김은회 -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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