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온공의 父(김묘)어머니(여흥군부인)조부(김승택)묘비문
페이지 정보
김영환 작성일01-08-11 06:15 조회2,578회 댓글0건본문
문온공파 자료 계속하여 올림니다.
17.良簡公 壇所 사진 ( 2 )
///////////////////////////////////////////////////////////////////////////////////
18,良簡公 諱 承澤 設壇墓碑文
부군의 관은 안동이요,호는 大菴, 諱는 承澤이니,고려국 직량동덕좌리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도첨의정승 永昌君 致仕하고 諡는 良簡이시다.
고조는 상서상 우복야공 휘 敏成이요 증조는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병부상서공 한림학사 휘 孝印이며, 조는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락군개국공 첨의령중찬 諡 忠烈公 諱 方慶이고,祖비는 냉평국부인 竹州朴씨이니라.
서기 1580년 宣祖朝에 충렬공을 吾門 안동김씨의 世祖로 創譜하였으니,考2세는 전법판서
상정군 휘 선 이요, 비는 순창군부인 순창설씨이다. 三世 長은 대호군 도첨의사사 제조공
휘 資인바 공의 증손인 밀직부사 휘 精에이르러 내서사인 재당숙 휘 齊顔과 더불어 申頓謀朱死에
괴로역살되니 오안동김씨종가종손은 탈보되어 수안김씨로 이적하고 휘제안공의 후손계는
사천김씨로 각각 분관하니라. 三世 仲은 보문관대제학 시충숙공 휘 승용인바 기후손은
판밀직사사공 휘칠우, 성윤공 휘칠림, 군사공 휘칠양, 공조전서공 휘성목, 밀직부사공 휘천순으로
각각 분파하고 次가 오파계조 양간공 휘승택이며, 季가 상서공 휘승우계인바 장손 현감 휘 윤계는
청주 김씨로 분적하고 차손이 대호군공 휘 유계로 분파하니라. 오조 양간공의 배위는
시 충선공 휘 흔 지녀이니 낭랑국부인 경주 김씨요, 그 조는 추밀원 부사공 휘 경손이요,
증조는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 시 문장공 휘 태서이니라.
양간공께서는 충렬왕 대에서부터 충정왕까지 고려 6대왕 100년간의 원몽지속하의 조정이
남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해야하고, 북으로는 배원정책과 舊疆회복에 진력하여야 하는
국가 수난기 중의 재상이시었다. 고려 전통 유가에 태어나신 유신으로써 서리 1342년 6월에는
종형제인 상락부원군 시 문숙공 휘 영돈과 복창부원군 시 정간공 휘 영순 그리고 계림부원군
이제현 제공등과 더불어 적신 조적의 구난을 평정하여 이등공신에 훈봉되고, 서기 1352년
충혜왕 8월에는 이재현, 한희유, 안진, 백문보, 정간공 영순 등 제공과 함께 서연을 열어
경일시덕함에 원로대신들과 논차로 입시하야 경사법원을 증강하시었다. 부군께서는 천품이
엄의관후하시고, 자혜애인 하시었으며 박학호문 경청경지하고 법도계리 강유상제 하시었는지라
백성이 권세가의 수탈당한 전답 노비와 적년의 송사와 면체한 옥사등은 공평히 양찰하여 국정을
치적하신 명정승이라 쓴 고려사 세가제38을 써 옮겨준다. 10월에 첨의찬성사의 승서되시고,
공민왕 7년 서기 1358년 7월 태백성이 3개월이나 나타났을 때 서거하시니, 양간공의 후손에는
고려와 조선의 문과 52인 무과 4인이 배출되어 혁혁명문임을 과시하고 있다. 부군의 장자는
숭정대부 중서시랑평장사 상낙군 휘 昴요, 차자는 안렴사공 휘 冕이니, 차계는 도평의사사
소경공 휘 九鼎계로 분파하였다. 오호라! 양간공 승하가 630여년이라. 원래 유택이 개성부
선흥사 북서동이었으나 창상이 이변하고 병난이 중첩되어 후손이 선조의 체혼을 실전한지
오래였었다. 이에 늦게나마 촌마두인의 정성으로 이 곳 취백림 금수단에 설단하고 궐향 점황의
옷깃을 여미며, 국궁 혜배 하오리니 이 어찌 오문의 일대 경행이 아니리요. 언간에 본역
삼위지설단 추진사업에 포천의 별제공 후손 종중의 협찬이 지대하였음을 치사하면서 제종의
위임을 받아 졸문이나마 불사음기로서 찬하노라.
서기 1990년 3월
양간공 22세손 재승 근찬
양간공 22세손 재홍 근서
/////////////////////////////////////////////////////////////////////////////////
19.上洛君 諱 昴 壇所 사진 ( 3 )
/////////////////////////////////////////////////////////////////////////////////
20.上洛君 設壇 墓碑文
부군의 관은 안동이요, 휘는 昴이니 관은 고려국 숭정대부 중대광중서시랑평장사
의정부 찬성사요, 상락군의 치사하였다. 고조는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병부상서 한림학사 휘 孝仁이요, 증조는 선충현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중대광
상낙군 개국공 첨위령 시충렬 휘 方慶이며, 조는 안사보정공신 봉익대부 부지 밀직사사
전법판서 상장군 휘 선이요, 考는 직량동덕좌리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도첨이정정승 영창군 치사 휘 承澤이시다. 부군께서는 서기 1315년 1월 신유에 대과 방안랑에
등제하시니 천품이 박학호문 자혜애민 하고 견방공덕 법도계리 하며 이정지화 유덕안중하고
경신고명 온양호학 하시었으니 공사가 천덕하시고 제자 예우는 공손히 외경존중하여
환대교우하시니 세인들의 많은 존경을 받으시었다. 배는 삼한국부인 여흥 민씨이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진연관 대제학 시 문온공 호 及菴 휘 思平之女요,
祖는 판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대사헌 여흥군 시 문순공 휘 적이며, 증조는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복창군 시 충순공 휘 종유요, 외조는 도첨의정승 시 정렬공 언양김공 윤이다.
친정과 외가가 모두 혁연하여 일국이 두루 숭무하는 명가의 출생하시어 부도를 익히시었으니
그 자녀서들은 자당의 법도를 본받아 환중일지라도 조석문안을 궐하지 않고 부모의 효를
다 하였었다. 급암 선생은 무남 절손 하시었으나 출가지녀 여흥 민씨께서는 생 男三九女하였으니
장자가 吾파조 문온공 휘 구용이요, 차자는 중의대부 중서병부랑 중겸 첨서하남북등처행
추밀사로서 종질인 밀직사사 부사공 휘 정등과 모주신돈하다 사괴로 역살당한 자 중현 휘
제안이니, 그 독자인 휘 부를 시조로 하여 사천 김씨로 분권하였다. 말자는 강원도 관찰사
참지의정부사 한성판율하고 딸이 태종의 명빈으로 입궁한 판돈녕부사 시 안정공 휘 구덕이라.
차계가 안정공파이다. 제 1서는 재신 김사안이나 무후하고, 제 2서는 충혜공 경주인
이제현지 三子 찬성사 장로요, 제 3서는 문정공 전주인 최재之子 찬성사 평도공 유경이요,
제 4서는 한성판윤공 양천인 허 호이며, 제 5서는 양천군 허순之子 허선이니 무후라. 제 6서는
석탄 李存五之弟 보문각 교감 경주인 이존사요, 제 7서는 문민공 김광철 之孫 예조전서 예문관
제학 광산인 김섬이며, 제 8서는 사윤공 김수천이요, 제 9서는 부정공 화순인 최자하이다.
영가화문의 품성이 유유초연하고, 기백이 호호강의함은 낙강 상낙대에 비롯하니 망망차해를
건너 사사독강의 순국하신 조상의 얼이 스며서인가 경향의 종인들이 힘을 모아 늦게나마
삼위지단을 설하여 세 일제를 봉사하니 개경의 충혼은 이제 영원히 이 곳에 안면하리다.
서기 1990년 3월
상락군 21세손 在承 謹撰
상락군 21세손 在洪 謹書
////////////////////////////////////////////////////////////////////////////////
21.驪興郡 夫人 閔氏 墓誌銘
원문 생략(볼 수 있는 곳:문온공파 파보 122page.목은집,동문선)
번역문
나의 벗 김구용씨가 금년 윤 5월 갑진 이래 그의 어머니 여흥군 부인 (추봉 삼한국부인)민씨를
조모 김씨(영창군 시 양간공 휘 승택 지배위 추봉 낭랑국부인 경주김씨)의 묘소에서 바로
그 서쪽 십수보 되는 곳에 장사를 지냈는데 이미 그의 장자인 참군사 명선을 그 곳에 보내고
나에게 묘지명을 청하여 왔다. 나는 김구용씨와 지내는 도의상 사양하지 않고 그 집안의
가계상황을 살펴보았더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시 문온공 급암선생이신 휘 사평은 부인의 아버지요, 광정대부 부 밀직사사 시 문순공 휘 적은
조부이시며, 도첨의찬성사 시 충순공 휘 종윤은 그의 증조부가 되시며, 도첨의정승 시 정렬공
호 죽헌 언양김공 윤은 외조부가 되시니 친정과 외가가 모두 혁연하여 일국이 두루 숭무하는
바이다. 부인께서 그러한 명문가에 태어나시어 견문을 익혀 배우시고 모든 일을 한결같이 하시니
이 모두가 그의 어머님의 법도를 본받았음인지라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를 다하였고,
조석문안은 병환 중일지라도 그치는 일이 없어 종족이 모두 칭송하였었다. 서기 1361년 겨울에
홍건적의 침입을 피하여 개성에서 남쪽 여흥 땅에 내려갈 때 부인이 그의 친정어머님을 모시고
가셨는데 그의 어머님의 평안함이 평소 급암댁에 계시는 것과 같았다. 그 후 부인께서는
여흥의 고향에서 10여년을 살으셨는데 더욱 부지런히 섬기셨으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부인의 아들과 사위들이 서울(개경)로 돌아오시도록 간청하였으나 부인은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시기를 "나의 친정 어머님을 이 곳 여흥 땅에 묻어두고 내가 가버린다면 묘소의 첨소를
궐하게 되니 내 어찌 견디리랴. 내 어찌 견디리랴." 하시었다. 그 후 5월 계사일에 부인이
병환으로 개성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6이었다. 구용씨가 또한 말하기를 "우리 아버님은
청덕하시어 지식이 높은 분을 두렵게 존경하시고 부모에겐 오래도록 봉양하시기를 즐기셨는데
이제 어머님 마저 돌아가셨으니 어찌 하리오." 하였다. 이에 색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착하신
어머님이시었도다." 문온공 급암 선생께서는 비록 아들이 없었으나 이러한 따님을 낳으심으로써
구용씨 댁과 서로 역사의 전승을 이루었으니 가히 어지시다고 말하지 않을수 있으리오.
아들 삼형제를 두셨는데 장자 구용은 전 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 직제학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이요 차남은 제안인바 중의대부 병부랑중 겸 첨서하남강북등처행 추밀원사
봉선대부 전교부령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 (사천김씨 시조 김부의 아버지)이며,
다음 삼남은 구덕(안정공)은 전 좌우위보승산원이다. 딸이 아홉이니 전 밀직사부사 김사안,
전 개성윤 이장로, 전 종부령 최유경, 전 낭장 허호, 전 부령 허선, 박사 이존사,
문하주서 김섬에게 각각 출가하고, 다음은 미혼이다.(8녀 4윤 김천수 9녀 부정 최자하)
명(묘지의 끝에 쓰는 그 사람의 공덕을 찬양하는 글)에 이르되
만물은 필연히 그 근본으로 돌아가라니
죽음이란 끝이 아니도다
여흥 민씨는 이런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돌아가셨으니
저 강이 구비쳐 흐르는 것처럼 어찌 끝이 있단 말이요
좋은 것 모두 갖추었으니
이는 영가(안동의 옛 이름)김씨의 가풍이 되리라
문충보절찬화공신 숭록대부 정당문학 집현전 태학사 지 춘추관사 겸 성균관 대사성 한산 목은 이색 씀.
*참고설명 척약재 김구용 선조의 어머니이신 여흥군부인의 친정 아버님이 금암 민사평이며,
민사평의 아버지는 민적이며 어머니는 영가군부인인데, 영가군부인이 충렬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김 흔공의 외동따님이시며(아들은 무후) 영가군부인은 민사평 한분만 낳고 돌아가셨다.,
민사평은 척약재 어머니 여흥군부인 한분밖에 못 두셨으니,
척약재 선조는 김흔 선조의 유일한 외손자(민사평)의 외손자가 된다.
민사평의 이복동생이 민변이고, 민변의 아들이 민제이며 민제의 딸이 태종비 원경왕후이다.
17.良簡公 壇所 사진 ( 2 )
///////////////////////////////////////////////////////////////////////////////////
18,良簡公 諱 承澤 設壇墓碑文
부군의 관은 안동이요,호는 大菴, 諱는 承澤이니,고려국 직량동덕좌리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도첨의정승 永昌君 致仕하고 諡는 良簡이시다.
고조는 상서상 우복야공 휘 敏成이요 증조는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병부상서공 한림학사 휘 孝印이며, 조는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락군개국공 첨의령중찬 諡 忠烈公 諱 方慶이고,祖비는 냉평국부인 竹州朴씨이니라.
서기 1580년 宣祖朝에 충렬공을 吾門 안동김씨의 世祖로 創譜하였으니,考2세는 전법판서
상정군 휘 선 이요, 비는 순창군부인 순창설씨이다. 三世 長은 대호군 도첨의사사 제조공
휘 資인바 공의 증손인 밀직부사 휘 精에이르러 내서사인 재당숙 휘 齊顔과 더불어 申頓謀朱死에
괴로역살되니 오안동김씨종가종손은 탈보되어 수안김씨로 이적하고 휘제안공의 후손계는
사천김씨로 각각 분관하니라. 三世 仲은 보문관대제학 시충숙공 휘 승용인바 기후손은
판밀직사사공 휘칠우, 성윤공 휘칠림, 군사공 휘칠양, 공조전서공 휘성목, 밀직부사공 휘천순으로
각각 분파하고 次가 오파계조 양간공 휘승택이며, 季가 상서공 휘승우계인바 장손 현감 휘 윤계는
청주 김씨로 분적하고 차손이 대호군공 휘 유계로 분파하니라. 오조 양간공의 배위는
시 충선공 휘 흔 지녀이니 낭랑국부인 경주 김씨요, 그 조는 추밀원 부사공 휘 경손이요,
증조는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 시 문장공 휘 태서이니라.
양간공께서는 충렬왕 대에서부터 충정왕까지 고려 6대왕 100년간의 원몽지속하의 조정이
남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해야하고, 북으로는 배원정책과 舊疆회복에 진력하여야 하는
국가 수난기 중의 재상이시었다. 고려 전통 유가에 태어나신 유신으로써 서리 1342년 6월에는
종형제인 상락부원군 시 문숙공 휘 영돈과 복창부원군 시 정간공 휘 영순 그리고 계림부원군
이제현 제공등과 더불어 적신 조적의 구난을 평정하여 이등공신에 훈봉되고, 서기 1352년
충혜왕 8월에는 이재현, 한희유, 안진, 백문보, 정간공 영순 등 제공과 함께 서연을 열어
경일시덕함에 원로대신들과 논차로 입시하야 경사법원을 증강하시었다. 부군께서는 천품이
엄의관후하시고, 자혜애인 하시었으며 박학호문 경청경지하고 법도계리 강유상제 하시었는지라
백성이 권세가의 수탈당한 전답 노비와 적년의 송사와 면체한 옥사등은 공평히 양찰하여 국정을
치적하신 명정승이라 쓴 고려사 세가제38을 써 옮겨준다. 10월에 첨의찬성사의 승서되시고,
공민왕 7년 서기 1358년 7월 태백성이 3개월이나 나타났을 때 서거하시니, 양간공의 후손에는
고려와 조선의 문과 52인 무과 4인이 배출되어 혁혁명문임을 과시하고 있다. 부군의 장자는
숭정대부 중서시랑평장사 상낙군 휘 昴요, 차자는 안렴사공 휘 冕이니, 차계는 도평의사사
소경공 휘 九鼎계로 분파하였다. 오호라! 양간공 승하가 630여년이라. 원래 유택이 개성부
선흥사 북서동이었으나 창상이 이변하고 병난이 중첩되어 후손이 선조의 체혼을 실전한지
오래였었다. 이에 늦게나마 촌마두인의 정성으로 이 곳 취백림 금수단에 설단하고 궐향 점황의
옷깃을 여미며, 국궁 혜배 하오리니 이 어찌 오문의 일대 경행이 아니리요. 언간에 본역
삼위지설단 추진사업에 포천의 별제공 후손 종중의 협찬이 지대하였음을 치사하면서 제종의
위임을 받아 졸문이나마 불사음기로서 찬하노라.
서기 1990년 3월
양간공 22세손 재승 근찬
양간공 22세손 재홍 근서
/////////////////////////////////////////////////////////////////////////////////
19.上洛君 諱 昴 壇所 사진 ( 3 )
/////////////////////////////////////////////////////////////////////////////////
20.上洛君 設壇 墓碑文
부군의 관은 안동이요, 휘는 昴이니 관은 고려국 숭정대부 중대광중서시랑평장사
의정부 찬성사요, 상락군의 치사하였다. 고조는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병부상서 한림학사 휘 孝仁이요, 증조는 선충현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중대광
상낙군 개국공 첨위령 시충렬 휘 方慶이며, 조는 안사보정공신 봉익대부 부지 밀직사사
전법판서 상장군 휘 선이요, 考는 직량동덕좌리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도첨이정정승 영창군 치사 휘 承澤이시다. 부군께서는 서기 1315년 1월 신유에 대과 방안랑에
등제하시니 천품이 박학호문 자혜애민 하고 견방공덕 법도계리 하며 이정지화 유덕안중하고
경신고명 온양호학 하시었으니 공사가 천덕하시고 제자 예우는 공손히 외경존중하여
환대교우하시니 세인들의 많은 존경을 받으시었다. 배는 삼한국부인 여흥 민씨이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진연관 대제학 시 문온공 호 及菴 휘 思平之女요,
祖는 판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대사헌 여흥군 시 문순공 휘 적이며, 증조는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복창군 시 충순공 휘 종유요, 외조는 도첨의정승 시 정렬공 언양김공 윤이다.
친정과 외가가 모두 혁연하여 일국이 두루 숭무하는 명가의 출생하시어 부도를 익히시었으니
그 자녀서들은 자당의 법도를 본받아 환중일지라도 조석문안을 궐하지 않고 부모의 효를
다 하였었다. 급암 선생은 무남 절손 하시었으나 출가지녀 여흥 민씨께서는 생 男三九女하였으니
장자가 吾파조 문온공 휘 구용이요, 차자는 중의대부 중서병부랑 중겸 첨서하남북등처행
추밀사로서 종질인 밀직사사 부사공 휘 정등과 모주신돈하다 사괴로 역살당한 자 중현 휘
제안이니, 그 독자인 휘 부를 시조로 하여 사천 김씨로 분권하였다. 말자는 강원도 관찰사
참지의정부사 한성판율하고 딸이 태종의 명빈으로 입궁한 판돈녕부사 시 안정공 휘 구덕이라.
차계가 안정공파이다. 제 1서는 재신 김사안이나 무후하고, 제 2서는 충혜공 경주인
이제현지 三子 찬성사 장로요, 제 3서는 문정공 전주인 최재之子 찬성사 평도공 유경이요,
제 4서는 한성판윤공 양천인 허 호이며, 제 5서는 양천군 허순之子 허선이니 무후라. 제 6서는
석탄 李存五之弟 보문각 교감 경주인 이존사요, 제 7서는 문민공 김광철 之孫 예조전서 예문관
제학 광산인 김섬이며, 제 8서는 사윤공 김수천이요, 제 9서는 부정공 화순인 최자하이다.
영가화문의 품성이 유유초연하고, 기백이 호호강의함은 낙강 상낙대에 비롯하니 망망차해를
건너 사사독강의 순국하신 조상의 얼이 스며서인가 경향의 종인들이 힘을 모아 늦게나마
삼위지단을 설하여 세 일제를 봉사하니 개경의 충혼은 이제 영원히 이 곳에 안면하리다.
서기 1990년 3월
상락군 21세손 在承 謹撰
상락군 21세손 在洪 謹書
////////////////////////////////////////////////////////////////////////////////
21.驪興郡 夫人 閔氏 墓誌銘
원문 생략(볼 수 있는 곳:문온공파 파보 122page.목은집,동문선)
번역문
나의 벗 김구용씨가 금년 윤 5월 갑진 이래 그의 어머니 여흥군 부인 (추봉 삼한국부인)민씨를
조모 김씨(영창군 시 양간공 휘 승택 지배위 추봉 낭랑국부인 경주김씨)의 묘소에서 바로
그 서쪽 십수보 되는 곳에 장사를 지냈는데 이미 그의 장자인 참군사 명선을 그 곳에 보내고
나에게 묘지명을 청하여 왔다. 나는 김구용씨와 지내는 도의상 사양하지 않고 그 집안의
가계상황을 살펴보았더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시 문온공 급암선생이신 휘 사평은 부인의 아버지요, 광정대부 부 밀직사사 시 문순공 휘 적은
조부이시며, 도첨의찬성사 시 충순공 휘 종윤은 그의 증조부가 되시며, 도첨의정승 시 정렬공
호 죽헌 언양김공 윤은 외조부가 되시니 친정과 외가가 모두 혁연하여 일국이 두루 숭무하는
바이다. 부인께서 그러한 명문가에 태어나시어 견문을 익혀 배우시고 모든 일을 한결같이 하시니
이 모두가 그의 어머님의 법도를 본받았음인지라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를 다하였고,
조석문안은 병환 중일지라도 그치는 일이 없어 종족이 모두 칭송하였었다. 서기 1361년 겨울에
홍건적의 침입을 피하여 개성에서 남쪽 여흥 땅에 내려갈 때 부인이 그의 친정어머님을 모시고
가셨는데 그의 어머님의 평안함이 평소 급암댁에 계시는 것과 같았다. 그 후 부인께서는
여흥의 고향에서 10여년을 살으셨는데 더욱 부지런히 섬기셨으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부인의 아들과 사위들이 서울(개경)로 돌아오시도록 간청하였으나 부인은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시기를 "나의 친정 어머님을 이 곳 여흥 땅에 묻어두고 내가 가버린다면 묘소의 첨소를
궐하게 되니 내 어찌 견디리랴. 내 어찌 견디리랴." 하시었다. 그 후 5월 계사일에 부인이
병환으로 개성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6이었다. 구용씨가 또한 말하기를 "우리 아버님은
청덕하시어 지식이 높은 분을 두렵게 존경하시고 부모에겐 오래도록 봉양하시기를 즐기셨는데
이제 어머님 마저 돌아가셨으니 어찌 하리오." 하였다. 이에 색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착하신
어머님이시었도다." 문온공 급암 선생께서는 비록 아들이 없었으나 이러한 따님을 낳으심으로써
구용씨 댁과 서로 역사의 전승을 이루었으니 가히 어지시다고 말하지 않을수 있으리오.
아들 삼형제를 두셨는데 장자 구용은 전 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 직제학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이요 차남은 제안인바 중의대부 병부랑중 겸 첨서하남강북등처행 추밀원사
봉선대부 전교부령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 (사천김씨 시조 김부의 아버지)이며,
다음 삼남은 구덕(안정공)은 전 좌우위보승산원이다. 딸이 아홉이니 전 밀직사부사 김사안,
전 개성윤 이장로, 전 종부령 최유경, 전 낭장 허호, 전 부령 허선, 박사 이존사,
문하주서 김섬에게 각각 출가하고, 다음은 미혼이다.(8녀 4윤 김천수 9녀 부정 최자하)
명(묘지의 끝에 쓰는 그 사람의 공덕을 찬양하는 글)에 이르되
만물은 필연히 그 근본으로 돌아가라니
죽음이란 끝이 아니도다
여흥 민씨는 이런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돌아가셨으니
저 강이 구비쳐 흐르는 것처럼 어찌 끝이 있단 말이요
좋은 것 모두 갖추었으니
이는 영가(안동의 옛 이름)김씨의 가풍이 되리라
문충보절찬화공신 숭록대부 정당문학 집현전 태학사 지 춘추관사 겸 성균관 대사성 한산 목은 이색 씀.
*참고설명 척약재 김구용 선조의 어머니이신 여흥군부인의 친정 아버님이 금암 민사평이며,
민사평의 아버지는 민적이며 어머니는 영가군부인인데, 영가군부인이 충렬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김 흔공의 외동따님이시며(아들은 무후) 영가군부인은 민사평 한분만 낳고 돌아가셨다.,
민사평은 척약재 어머니 여흥군부인 한분밖에 못 두셨으니,
척약재 선조는 김흔 선조의 유일한 외손자(민사평)의 외손자가 된다.
민사평의 이복동생이 민변이고, 민변의 아들이 민제이며 민제의 딸이 태종비 원경왕후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