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6) 나(김사달)의 自敍小傳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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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영환 작성일02-08-13 18:46 조회1,750회 댓글0건본문
西峰 金思達 박사
나의 自敍小傳 -1
흔히 인생을 고해( 苦海)라 한다. 험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배와 사람의 한평생을 비교한 말이다.
어떤 사람은 순풍에 돛을 달고 순조롭게 나아가는 배처럼 별다른 장애나 큰 고난없이 목적지에
이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거센 파도와 싸우며 홀로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너는 사람도 있다.
이 세상에는 가난과 역경에 처하여 싸우는 용감한 젊은이도 드물지 않다. 그런가 하면 부모의 따뜻한
보호와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여 마침내 세상에서 낙오가 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바야흐로 시대는 우주과학 시대로 눈부신 비약을 거듭하고 있다. 옛날처럼 부모의 유산이나 가문(家門)
으로 버티어 나갈 수는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실력본위, 인물본위의 경쟁시대가 된 것이다.
그 치열한 경쟁에서 뒤지지 않고 이겨 나가려면 두뇌와 재능을 연마하여 실력을 지니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자면 아무리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꾸준한 노력과 인내라는 것이 필요하다.
즉 강인하고 굳센 의지력이 있어야만 한다고 본다.
나는 이제 지천명( 知天命 )오순(五旬)의 고갯마루를 넘어서서 내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볼 때,
입맛이 씁쓸할 때가 많다. 어떻게 해서 내가 그렇게 유명한(?) 인간이 된 것일까? 나도 모를 일이다.
[하루아침에 눈을 떠보니 나는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던 바이런을 생각하며 苦笑를 금할 수가 없다.
걸핏하면 매스콤에서는 나를 일러 귀재(鬼才)요, 천재요, 다능(多能)이라고까지 추켜세워 망신을
주기 일쑤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아마도 내가 국민학교만을 나와 갖가지 검정고시를 거쳐 의사(醫師)가 되고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를 거쳐 국전(國展) 서예부 추천작가 등의 경력을 지닌 탓이리라.
그러나 나는 지나간 회색 노트의 추억을 간추려 헤아리기에 정녕 내 자신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엉뚱하고 어이없이 연쇄반응의 당위(當爲) 속에서 살아왔다. 나를 둘러싼 몇사람의
비예(비=目+卑 예=目+兒)예)와 짐작을 어리석은 것으로 돌리고, 낡아빠진 직위나 학벌에도
좌충우돌하며 실로 집요한 광기(狂氣)로 억척같이 살아 왔다.
결과야 어떻든 간에 나는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할 값어치가 있겠다고 생각한 일에
대하여는 일단 필사적으로 부딪쳐 왔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말은 우리 고장에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말이다.
나의 고향은 충북 괴산군(槐山郡) 청천면(靑 川面)도원리(桃源里) 어룡동( 魚龍洞) 이라는 곳인데,
겹겹 산이 둘러싸인 두메산골이다. 나는 일제 식민지 치하였던 1928년 10월 30일에 구안동김씨
(+안동김씨 안렴사공 18대-19세-손)후예로 이 곳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던 해가 일본이 우리나라를 삼킨 지 18년 반이요, 3·1운동이 일어난지 9년째로 접어드는
해였다. 때는 바야흐로 일본이 식민지 강압정책의 절정기였으므로 당시 우리 민족이 받는 박해와
탄압은 이루 형언할 수조차 없을 때였다.
누구나 고향과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하게 뛰놀던 추억이 그리운 것이지만 가난 속에서 독학으로
거친 사회 밑바닥에서부터 싸우며 고생한 나에게는 남달리 어린 시절의 따뜻한 보금자리가
애타게 그리운 것이다.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한 앞 뒷산으로, 아지랑이 하늘거리는 보리밭으로 코흘리개 개구쟁이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며, 장난을 즐기기에 일사불란, 여념이 없었다. 나는 좋은 장난, 나쁜 장난, 가릴 것
없이 언제나 앞장서서 해치우는 악명 높은 개구쟁이 대장이었다.
그러나 가난과 망국(亡國)의 설움으로 풍월(風月)이나 읊는 것으로 시름을 달래던 유생(儒生)이요,
선비인 주태백이 아버지 밑에서 나의 즐거웠던 개구쟁이 시절은 그리 길지를 못하였다.
원래 나의 선친(先親)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도 없었을 뿐더러 지지리 가난한 시골선비로
노동능력을 필요로 하는 농사일은 물론, 그나마 양반만 찾는 완고한 옹고집 탓으로 이렇다 할
생활근거가 없어 가정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다.
이 무렵에는 일제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여 아이들을 글방<서당>에만 다니게 한 부모도 적지 않았다.
다행히 선친은 한학(漢學)만이 유일한 밑천이었으므로, 당시 우리 집 사랑방에 글방을 차려 놓고
학교를 다니지 않는 같은 마을이나 이웃동네 소년들에게 한문을 가르치시며 그 보상으로 글방
아이들로부터 추수(秋收)때 받은 얼마 안 되는 곡식류<훈장사례>로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생계가
이어져 나갔던 것이다.
이 무렵(1933-35), 나는 글방 아이들과 함께 천자문(千字文)이나 동몽선습(童蒙先習), 통감(通鑑 )등
한문의 기초를 익혔다. 그러나 그것은 수박 겉 핥기요, 개머루 먹듯 맹목적인 誦讀(송독)에 불과했고,
개구쟁이들과 장난을 치고 다니는 것이 내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일과이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찬용 -
▣ 김재원 -
▣ 김정중 - 잘 보았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郡/김태영 -
▣ 김주회 -
나의 自敍小傳 -1
흔히 인생을 고해( 苦海)라 한다. 험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배와 사람의 한평생을 비교한 말이다.
어떤 사람은 순풍에 돛을 달고 순조롭게 나아가는 배처럼 별다른 장애나 큰 고난없이 목적지에
이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거센 파도와 싸우며 홀로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너는 사람도 있다.
이 세상에는 가난과 역경에 처하여 싸우는 용감한 젊은이도 드물지 않다. 그런가 하면 부모의 따뜻한
보호와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여 마침내 세상에서 낙오가 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바야흐로 시대는 우주과학 시대로 눈부신 비약을 거듭하고 있다. 옛날처럼 부모의 유산이나 가문(家門)
으로 버티어 나갈 수는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실력본위, 인물본위의 경쟁시대가 된 것이다.
그 치열한 경쟁에서 뒤지지 않고 이겨 나가려면 두뇌와 재능을 연마하여 실력을 지니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자면 아무리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꾸준한 노력과 인내라는 것이 필요하다.
즉 강인하고 굳센 의지력이 있어야만 한다고 본다.
나는 이제 지천명( 知天命 )오순(五旬)의 고갯마루를 넘어서서 내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볼 때,
입맛이 씁쓸할 때가 많다. 어떻게 해서 내가 그렇게 유명한(?) 인간이 된 것일까? 나도 모를 일이다.
[하루아침에 눈을 떠보니 나는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던 바이런을 생각하며 苦笑를 금할 수가 없다.
걸핏하면 매스콤에서는 나를 일러 귀재(鬼才)요, 천재요, 다능(多能)이라고까지 추켜세워 망신을
주기 일쑤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아마도 내가 국민학교만을 나와 갖가지 검정고시를 거쳐 의사(醫師)가 되고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를 거쳐 국전(國展) 서예부 추천작가 등의 경력을 지닌 탓이리라.
그러나 나는 지나간 회색 노트의 추억을 간추려 헤아리기에 정녕 내 자신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엉뚱하고 어이없이 연쇄반응의 당위(當爲) 속에서 살아왔다. 나를 둘러싼 몇사람의
비예(비=目+卑 예=目+兒)예)와 짐작을 어리석은 것으로 돌리고, 낡아빠진 직위나 학벌에도
좌충우돌하며 실로 집요한 광기(狂氣)로 억척같이 살아 왔다.
결과야 어떻든 간에 나는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할 값어치가 있겠다고 생각한 일에
대하여는 일단 필사적으로 부딪쳐 왔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말은 우리 고장에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말이다.
나의 고향은 충북 괴산군(槐山郡) 청천면(靑 川面)도원리(桃源里) 어룡동( 魚龍洞) 이라는 곳인데,
겹겹 산이 둘러싸인 두메산골이다. 나는 일제 식민지 치하였던 1928년 10월 30일에 구안동김씨
(+안동김씨 안렴사공 18대-19세-손)후예로 이 곳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던 해가 일본이 우리나라를 삼킨 지 18년 반이요, 3·1운동이 일어난지 9년째로 접어드는
해였다. 때는 바야흐로 일본이 식민지 강압정책의 절정기였으므로 당시 우리 민족이 받는 박해와
탄압은 이루 형언할 수조차 없을 때였다.
누구나 고향과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하게 뛰놀던 추억이 그리운 것이지만 가난 속에서 독학으로
거친 사회 밑바닥에서부터 싸우며 고생한 나에게는 남달리 어린 시절의 따뜻한 보금자리가
애타게 그리운 것이다.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한 앞 뒷산으로, 아지랑이 하늘거리는 보리밭으로 코흘리개 개구쟁이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며, 장난을 즐기기에 일사불란, 여념이 없었다. 나는 좋은 장난, 나쁜 장난, 가릴 것
없이 언제나 앞장서서 해치우는 악명 높은 개구쟁이 대장이었다.
그러나 가난과 망국(亡國)의 설움으로 풍월(風月)이나 읊는 것으로 시름을 달래던 유생(儒生)이요,
선비인 주태백이 아버지 밑에서 나의 즐거웠던 개구쟁이 시절은 그리 길지를 못하였다.
원래 나의 선친(先親)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도 없었을 뿐더러 지지리 가난한 시골선비로
노동능력을 필요로 하는 농사일은 물론, 그나마 양반만 찾는 완고한 옹고집 탓으로 이렇다 할
생활근거가 없어 가정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다.
이 무렵에는 일제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여 아이들을 글방<서당>에만 다니게 한 부모도 적지 않았다.
다행히 선친은 한학(漢學)만이 유일한 밑천이었으므로, 당시 우리 집 사랑방에 글방을 차려 놓고
학교를 다니지 않는 같은 마을이나 이웃동네 소년들에게 한문을 가르치시며 그 보상으로 글방
아이들로부터 추수(秋收)때 받은 얼마 안 되는 곡식류<훈장사례>로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생계가
이어져 나갔던 것이다.
이 무렵(1933-35), 나는 글방 아이들과 함께 천자문(千字文)이나 동몽선습(童蒙先習), 통감(通鑑 )등
한문의 기초를 익혔다. 그러나 그것은 수박 겉 핥기요, 개머루 먹듯 맹목적인 誦讀(송독)에 불과했고,
개구쟁이들과 장난을 치고 다니는 것이 내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일과이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찬용 -
▣ 김재원 -
▣ 김정중 - 잘 보았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郡/김태영 -
▣ 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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