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祖의 墨香을 찾아서] 03(김순)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2-08-27 03:49 조회1,617회 댓글0건본문
[先祖의 墨香을 찾아서] 03(김순)
3. 문영공 金恂 1258(고종 45)∼1321(충숙왕 8)
디지털한국학 홈
김순(金恂){5}
1258(고종 45)∼1321(충숙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귀후(歸厚). 방경(方慶)의 넷째아들이다.
1279년(충렬왕 5)에 과거에 급제하여 낭장(郎將)으로 학사(學士)·직강(直講)이 되었다. 아버지 방경이 일본을 정벌할 때 종군하고자 했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몰래 배에 올라 종군하고 돌아와서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다.
1297년 좌부승지, 이듬해 좌승지에 오르고 광정부사(光政副使)·승지(承旨)·성균좨주(成均祭酒)·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지민조사(知民曹事)를 역임했으며, 다시 삼사좌사(三司左使)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사직했다.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등용되어 1312년(충선왕 4)에 중대광(重大匡)·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1316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성격이 관후하고 예서(隷書)를 잘 썼으며, 거문고와 퉁소를 즐겼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閔丙河〉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자는 귀후. 본관은 안동. 상락공 김방경의 아들. 벼슬은 밀직부사
성품이 너그럽고 후했으며, 예서에 뛰어났다. 기예인을 두고 날마다 음악으로 소일했다. <고려사>
충렬왕24 戊戌 (1298)에 세운 동화사 홍진국존비는 金暄(김훤)이 짓고 밀직승지 김순이 썼으니 대구 팔공산에 있다. <해동금석총목>
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김순의 동화사 碑書>
김순(1258-1321)의 본관은 안동. 자는 귀후. 고려 명장 김방경의 아들이요 김효인의 손자이다. 그래서 3대 書家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이 되었다.
<고려사 세가35>에 의하면 "그의 천성이 寬厚하고 隸書를 잘 썼고, 聲技를 집에 두고 絲竹으로 낙을 삼았다"고 그의 서예와 풍류취미를 전하고 있다.
또 <金石評>에는 그의 書蹟이 대구 팔공산의 동화사 홍진국사 탑비에 남아 있다. 동 비문은 김훤이 지었다."
원대여사자료집록 (1997, 장동익)
<高麗國大藏移安記> : 주남서 편 <天下同文> 전갑집7 (閔漬 作)
○ 著者 閔漬(1248-1326)는 고려 충렬왕대의 대표적인 문신으로서 충선왕이 세자시에 元에 宿衛할 때 정가신(?-1298)과 함께 수종신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충선왕에게 학문을 전수하면서 자주 元 세조의 부름에 응하여 고려의 사정에 대해 자문하기도 하였고, 교지정벌에 대한 獻議를 올려 원의 한림직학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에서 <천추금경록> <세대편년절요> <본국편년강목>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이들이 현존하지 않아 그의 학문적 성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85)
*85) 이제현, <민지 묘지명>,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 1991)
그 외 민지의 저술로 전해지는 것으로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 <금강산 시병서> <풍악산 장안사 사적기발> <보개산 석대기> 등이 김탄월 편 <유점사 본말사지> (유점사, 1942)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본 자료는 민지의 문학적 역량과 학문적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典據 <天下同文> 전갑집7, <사고전서> 총집 (영인본1366)의 천하동문집7
○ 校勘 이 자료는 元의 周南瑞(주남서) *86)가 편찬한 <天下同文>에 수록되어 있는데,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에도 본문이 축소된 채 수록되어 있다.
*86) 주남서(?-?) : 강서행성 길안로 안성인으로 자는 경수이고 향공진사 출신으로 <天下同文>44권을 편찬하였다.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 서문)
또 劉喜海(유희해)의 <海東金石存攷>26에는 "대덕10년9월 민지찬 김순서 재강원도 회양부 금강산"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26, p19514
<천하동문>과 <천하동문집>의 내용과 글자에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는 데, <천하동문>의 것이 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곧 <천하동문집>에는 모두에 찬자인 민지의 구체적인 관직 및 말미의 비문의 서자, 전액자, 입석자 등에 대한 기록이 모두 빠져 있다.
이러한 점을 보아 <천하동문>은 본문이 碑石에 새겨진 후에 이 비문을 수습하여 수록한 것을 알 수 있고, <천하동문집>은 천하동문을 바탕으로 모두와 말미를 삭제한 채 轉載하였던 것으로 짐직된다.
○ 內容槪要 이 자료는 1306년 (충렬왕32, 대덕10) 고려인 閔漬가 찬한 大藏經 移安記로서, 그 주된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철산경 (소경)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려의 大藏經이 元으로 수출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러한 예로는 다음의 자료 2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봉화상 명본이 고려의 <금서법화경>을 구득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 외 이 시기에는 대장경의 수출만이 아니라 고려의 사경승들이 대거 원에 진출하여 수많은 대장경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 參考 허흥식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p706-717, 1986)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이?, 옥금산혜인고려화엄교사지6)
○ 著者 閔漬 (1248-1326)
○ 典據 <옥금산 혜인고려화엄교사지>7
○ 內容槪要 이 자료는 1314년 (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인데, 이의 찬자는 민지, 서자는 김순(1258-1321)으로서 이들 두 사람은 <고려국대장이안기>에서도 찬,서를 함께 하였다.
이의 내용은 첨의찬성사 元瓘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사명산의 천동선찰 *69)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69) 이는 강절행성 경원로 ?현의 사명산에 위치한 천동사를 말한다.
이에 나타난 元瓘(?-?)은 첨의중찬 元傅의 아들로서 1298년 (충렬왕24, 대덕2) 11월에 지밀직사사 판도판서에 임명되었고, 1308년 (충선왕 복위년) 10월에 宰臣으로서 왕을 수녕궁에서 饗宴(향연)한 인물이지만 *70) 고려측의 자료에서는 그의 행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70) 고려사열전20, 원부
고려사 세가31 충렬왕24년 11월 경술, 세가33 충선왕복위년 10월 갑진, 고려묘지명집성 <박거실처원씨 묘지명>, <원충 묘지명>
이 자료 및 다음의 자료를 통해 볼 때 그의 호가 退翁임을 알 수 있고, 충선왕의 퇴위 이후 왕을 수종하여 元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71)
*71)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인해 그의 아들 元忠이 충선왕으로부터 賜姓받게 되었을 것이다.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원충묘지명)
아울러 강남 지역에 진출하여 강절행성 경원로 >현에 위치한 천동사 *72) 및 항주의 고려혜인사에 대장경의 인본과 토지를 시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2) 이 천동사는 후일 충선왕이 임백안독고사의 무고를 피해 피신한 사찰이다.
3-1. 동화사 홍진국존비 (1298, 김순 書)
비석 실물 현재 소재 불명
홍진국사의 부도로 추정하고 있는 달성도학동 석조부도(보물 601호)는 원래 도학동의 내학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동화사 안으로 옮긴 것으로 볼 때
1)홍진국존비도 도학동의 내학 부락에 석조부도 옆에 세워져 있다가 어느 시기엔가 도궤되었다고 볼 수 있음. 도학동 내학 부락 어디엔가 비편이라도 묻혀있을 가능성이 있음
2)진각국사 부도는 송광사 광원암에 비는 월남사지에 있는 경우와 같이, 홍진국사 부도는 도학동 내학 마을에 비는 동학사 내 또는 홍진국사와 관련된 주변의 어느 절에 (은해사 홍진국사 중창) 있었을 수도 있음
문화재청 홈
종목 보물 601호
명칭 달성도학동석조부도(達城道鶴洞石造浮屠)
분류 부도 수량 1기 지정일 1975.08.04
소재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30 시대 미상 소유자 국유 관리자 동화사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동화사 안에 세워져 있는 이 부도는 원래 동학동의 학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긴 것으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基壇)과 탑신(塔身)이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인터넷 검색>
도학동 석조부도
금당선원 입구에 외로이 서 있다. 이 부도은 원래 동화사에서 1㎞ 정도 떨어진 도학동의 내학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와 복원한 것으로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없다. 일명 홍진국사 부도라고도 한다.
팔각원당형 부도로 높이는 1.72m이다. 상대석에 연꽃 16송이가 새겨져 있다.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601호 지정되어 있다.
디지털한국학 홈
혜영(惠永)
1228(고종 15)∼1294(충렬왕 20). 고려 충렬왕 때 국존(國尊), 유가종의 고승. 성은 강씨(康氏). 혜영(惠永)은 이름이다. 문경 출신. 한림원 자원(子元)의 아들이다.
11세에 출가하여 남백월산(南白月山)의 수좌(首座) 충연(#충01淵)의 제자가 되었고, 17세에 왕륜사(王輪寺) 선불장(選佛場)에 합격하고, 흥덕사(興德寺)에 머물렀다.
1259년(고종 46) 삼중대사(三重大師), 1263년 수좌가 되었다.
1267년(원종 8) 속리사(俗離寺)에 이주하였으며, 1269년 승통(僧統)이 되었다.
1274년 통도사에서 사리 여러 매를 얻어 항상 좌우에 두었더니 많은 분신사리(分身舍利)가 생겨났으며, 이를 구하는 사람에게 주었다. 이해에 중흥사(重興寺)로 옮기고, 왕명에 의하여 9년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1285년(충렬왕 11) 유가사(瑜伽寺)로 옮겼고, 1290년 사경승(寫經僧)100명을 데리고 원나라에 들어가 세조를 만나자 경주사(慶州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만안사(萬安寺) 당두(堂頭)의 청으로 《인왕경 仁王經》을 강의하여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이듬해 금니(金泥)로 대장경을 사(寫)하여 귀국하였다.
1292년 국존에 봉해져 보자(普慈)라는 법호를 받았고, 또한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어 동화사의 주지를 맡았다.
1294년 1월 미질(微疾)이 있었는데, 24일 단정히 앉아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을 읽다가 입적하였다. 시호는 홍진(弘眞), 탑호(塔號)는 진응(眞應)이다. 문인에는 금산사주지 승통 효도(孝棹) 등이 있다.
저서로 42세 때 유경(柳璥)의 청으로 지은 《백의해 白衣解》 1권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金石總覽,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金相鉉〉
탁본 실물
全面탁본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
- 소장기호 : 4046-2 (구 2198) - 연대 : 1298 (고려충렬왕 24)
- 소재 : 서울 柳正秀 藏 舊탁본 - 규모 : 154.5×84.8
탁본첩1
대동금석서에 실려있는 탁본 1점은 비석 말미에 적는 銘 부분 탁본으로 장서각 소장 탁본의 4조각중 좌측 아래 조각과 대동금석서 탁본 우측 위 4-5글자는 같은 부분임
탁본(법)첩2
조속의 금석청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실려있는 탁본 1점은 비명제목6자(弘眞國尊碑銘)를 1행에 3자 2행에 3자, 두칸으로 나누어 제작, 비문 중앙의 일부분을 6행 11열로 총 60자로 제작
탁본첩3
장서각소장탁본자료집1에 탁본 1점이 있는데 비편 4점을 모아 1장으로 탁본한 것임
☞추진사항
동화사 문의
- 달성 도학동 석조부도를 도학동 내학부락에서 동화사 안으로 옮긴 당시의 기록이 있는지?
은해사 문의
- 홍진국사와 관련된 유적 유물 기록이 은해사에 있는지?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 소장하고 있는 동화사홍진국존진응탑비 탁본 실물 열람
도학동 내학마을
- 현지 답사하여 석조부도가 있던 위치 확인 및 혹 묻혀 있을 수 있는 비편이나 비의 흔적 확인
3-2. 고려국 대장이안기 (1306, 김순 書)
소재 불명
고려국 대장이안기는 문헌에 강원도 회양부 금강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를 찬한 閔漬(민지)라는 분이 금강산 유점사와 장안사에 관련된 기록을 많이 남겼으므로 이곳중 한 곳에 있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으나 남북 분단으로 현재 확인하지 못하고 있음
고려국 대장이안기는 현재 일본의 정가당문고에 소장되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에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탁본인지 기록인지 확인하지 못했음
학문적 연구동향
허흥식의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1986,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p706-717)
3-3.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1314, 김순 書)
소재 불명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이라고 하는데 확인하지 못했음
※원공은 김순의 조카인 김승용의 장인 원관이라는 분임
김방경-김선-김승용
김방경-김순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 김정중 -
▣ 郡/김태영 - 수고하셨습니다.
▣ 김재이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3. 문영공 金恂 1258(고종 45)∼1321(충숙왕 8)
디지털한국학 홈
김순(金恂){5}
1258(고종 45)∼1321(충숙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귀후(歸厚). 방경(方慶)의 넷째아들이다.
1279년(충렬왕 5)에 과거에 급제하여 낭장(郎將)으로 학사(學士)·직강(直講)이 되었다. 아버지 방경이 일본을 정벌할 때 종군하고자 했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몰래 배에 올라 종군하고 돌아와서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다.
1297년 좌부승지, 이듬해 좌승지에 오르고 광정부사(光政副使)·승지(承旨)·성균좨주(成均祭酒)·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지민조사(知民曹事)를 역임했으며, 다시 삼사좌사(三司左使)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사직했다.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등용되어 1312년(충선왕 4)에 중대광(重大匡)·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1316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성격이 관후하고 예서(隷書)를 잘 썼으며, 거문고와 퉁소를 즐겼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閔丙河〉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자는 귀후. 본관은 안동. 상락공 김방경의 아들. 벼슬은 밀직부사
성품이 너그럽고 후했으며, 예서에 뛰어났다. 기예인을 두고 날마다 음악으로 소일했다. <고려사>
충렬왕24 戊戌 (1298)에 세운 동화사 홍진국존비는 金暄(김훤)이 짓고 밀직승지 김순이 썼으니 대구 팔공산에 있다. <해동금석총목>
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김순의 동화사 碑書>
김순(1258-1321)의 본관은 안동. 자는 귀후. 고려 명장 김방경의 아들이요 김효인의 손자이다. 그래서 3대 書家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이 되었다.
<고려사 세가35>에 의하면 "그의 천성이 寬厚하고 隸書를 잘 썼고, 聲技를 집에 두고 絲竹으로 낙을 삼았다"고 그의 서예와 풍류취미를 전하고 있다.
또 <金石評>에는 그의 書蹟이 대구 팔공산의 동화사 홍진국사 탑비에 남아 있다. 동 비문은 김훤이 지었다."
원대여사자료집록 (1997, 장동익)
<高麗國大藏移安記> : 주남서 편 <天下同文> 전갑집7 (閔漬 作)
○ 著者 閔漬(1248-1326)는 고려 충렬왕대의 대표적인 문신으로서 충선왕이 세자시에 元에 宿衛할 때 정가신(?-1298)과 함께 수종신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충선왕에게 학문을 전수하면서 자주 元 세조의 부름에 응하여 고려의 사정에 대해 자문하기도 하였고, 교지정벌에 대한 獻議를 올려 원의 한림직학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에서 <천추금경록> <세대편년절요> <본국편년강목>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이들이 현존하지 않아 그의 학문적 성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85)
*85) 이제현, <민지 묘지명>,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 1991)
그 외 민지의 저술로 전해지는 것으로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 <금강산 시병서> <풍악산 장안사 사적기발> <보개산 석대기> 등이 김탄월 편 <유점사 본말사지> (유점사, 1942)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본 자료는 민지의 문학적 역량과 학문적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典據 <天下同文> 전갑집7, <사고전서> 총집 (영인본1366)의 천하동문집7
○ 校勘 이 자료는 元의 周南瑞(주남서) *86)가 편찬한 <天下同文>에 수록되어 있는데,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에도 본문이 축소된 채 수록되어 있다.
*86) 주남서(?-?) : 강서행성 길안로 안성인으로 자는 경수이고 향공진사 출신으로 <天下同文>44권을 편찬하였다.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 서문)
또 劉喜海(유희해)의 <海東金石存攷>26에는 "대덕10년9월 민지찬 김순서 재강원도 회양부 금강산"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26, p19514
<천하동문>과 <천하동문집>의 내용과 글자에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는 데, <천하동문>의 것이 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곧 <천하동문집>에는 모두에 찬자인 민지의 구체적인 관직 및 말미의 비문의 서자, 전액자, 입석자 등에 대한 기록이 모두 빠져 있다.
이러한 점을 보아 <천하동문>은 본문이 碑石에 새겨진 후에 이 비문을 수습하여 수록한 것을 알 수 있고, <천하동문집>은 천하동문을 바탕으로 모두와 말미를 삭제한 채 轉載하였던 것으로 짐직된다.
○ 內容槪要 이 자료는 1306년 (충렬왕32, 대덕10) 고려인 閔漬가 찬한 大藏經 移安記로서, 그 주된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철산경 (소경)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려의 大藏經이 元으로 수출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러한 예로는 다음의 자료 2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봉화상 명본이 고려의 <금서법화경>을 구득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 외 이 시기에는 대장경의 수출만이 아니라 고려의 사경승들이 대거 원에 진출하여 수많은 대장경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 參考 허흥식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p706-717, 1986)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이?, 옥금산혜인고려화엄교사지6)
○ 著者 閔漬 (1248-1326)
○ 典據 <옥금산 혜인고려화엄교사지>7
○ 內容槪要 이 자료는 1314년 (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인데, 이의 찬자는 민지, 서자는 김순(1258-1321)으로서 이들 두 사람은 <고려국대장이안기>에서도 찬,서를 함께 하였다.
이의 내용은 첨의찬성사 元瓘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사명산의 천동선찰 *69)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69) 이는 강절행성 경원로 ?현의 사명산에 위치한 천동사를 말한다.
이에 나타난 元瓘(?-?)은 첨의중찬 元傅의 아들로서 1298년 (충렬왕24, 대덕2) 11월에 지밀직사사 판도판서에 임명되었고, 1308년 (충선왕 복위년) 10월에 宰臣으로서 왕을 수녕궁에서 饗宴(향연)한 인물이지만 *70) 고려측의 자료에서는 그의 행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70) 고려사열전20, 원부
고려사 세가31 충렬왕24년 11월 경술, 세가33 충선왕복위년 10월 갑진, 고려묘지명집성 <박거실처원씨 묘지명>, <원충 묘지명>
이 자료 및 다음의 자료를 통해 볼 때 그의 호가 退翁임을 알 수 있고, 충선왕의 퇴위 이후 왕을 수종하여 元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71)
*71)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인해 그의 아들 元忠이 충선왕으로부터 賜姓받게 되었을 것이다.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원충묘지명)
아울러 강남 지역에 진출하여 강절행성 경원로 >현에 위치한 천동사 *72) 및 항주의 고려혜인사에 대장경의 인본과 토지를 시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2) 이 천동사는 후일 충선왕이 임백안독고사의 무고를 피해 피신한 사찰이다.
3-1. 동화사 홍진국존비 (1298, 김순 書)
비석 실물 현재 소재 불명
홍진국사의 부도로 추정하고 있는 달성도학동 석조부도(보물 601호)는 원래 도학동의 내학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동화사 안으로 옮긴 것으로 볼 때
1)홍진국존비도 도학동의 내학 부락에 석조부도 옆에 세워져 있다가 어느 시기엔가 도궤되었다고 볼 수 있음. 도학동 내학 부락 어디엔가 비편이라도 묻혀있을 가능성이 있음
2)진각국사 부도는 송광사 광원암에 비는 월남사지에 있는 경우와 같이, 홍진국사 부도는 도학동 내학 마을에 비는 동학사 내 또는 홍진국사와 관련된 주변의 어느 절에 (은해사 홍진국사 중창) 있었을 수도 있음
문화재청 홈
종목 보물 601호
명칭 달성도학동석조부도(達城道鶴洞石造浮屠)
분류 부도 수량 1기 지정일 1975.08.04
소재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30 시대 미상 소유자 국유 관리자 동화사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동화사 안에 세워져 있는 이 부도는 원래 동학동의 학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긴 것으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基壇)과 탑신(塔身)이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인터넷 검색>
도학동 석조부도
금당선원 입구에 외로이 서 있다. 이 부도은 원래 동화사에서 1㎞ 정도 떨어진 도학동의 내학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와 복원한 것으로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없다. 일명 홍진국사 부도라고도 한다.
팔각원당형 부도로 높이는 1.72m이다. 상대석에 연꽃 16송이가 새겨져 있다.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601호 지정되어 있다.
디지털한국학 홈
혜영(惠永)
1228(고종 15)∼1294(충렬왕 20). 고려 충렬왕 때 국존(國尊), 유가종의 고승. 성은 강씨(康氏). 혜영(惠永)은 이름이다. 문경 출신. 한림원 자원(子元)의 아들이다.
11세에 출가하여 남백월산(南白月山)의 수좌(首座) 충연(#충01淵)의 제자가 되었고, 17세에 왕륜사(王輪寺) 선불장(選佛場)에 합격하고, 흥덕사(興德寺)에 머물렀다.
1259년(고종 46) 삼중대사(三重大師), 1263년 수좌가 되었다.
1267년(원종 8) 속리사(俗離寺)에 이주하였으며, 1269년 승통(僧統)이 되었다.
1274년 통도사에서 사리 여러 매를 얻어 항상 좌우에 두었더니 많은 분신사리(分身舍利)가 생겨났으며, 이를 구하는 사람에게 주었다. 이해에 중흥사(重興寺)로 옮기고, 왕명에 의하여 9년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1285년(충렬왕 11) 유가사(瑜伽寺)로 옮겼고, 1290년 사경승(寫經僧)100명을 데리고 원나라에 들어가 세조를 만나자 경주사(慶州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만안사(萬安寺) 당두(堂頭)의 청으로 《인왕경 仁王經》을 강의하여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이듬해 금니(金泥)로 대장경을 사(寫)하여 귀국하였다.
1292년 국존에 봉해져 보자(普慈)라는 법호를 받았고, 또한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어 동화사의 주지를 맡았다.
1294년 1월 미질(微疾)이 있었는데, 24일 단정히 앉아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을 읽다가 입적하였다. 시호는 홍진(弘眞), 탑호(塔號)는 진응(眞應)이다. 문인에는 금산사주지 승통 효도(孝棹) 등이 있다.
저서로 42세 때 유경(柳璥)의 청으로 지은 《백의해 白衣解》 1권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金石總覽,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金相鉉〉
탁본 실물
全面탁본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
- 소장기호 : 4046-2 (구 2198) - 연대 : 1298 (고려충렬왕 24)
- 소재 : 서울 柳正秀 藏 舊탁본 - 규모 : 154.5×84.8
탁본첩1
대동금석서에 실려있는 탁본 1점은 비석 말미에 적는 銘 부분 탁본으로 장서각 소장 탁본의 4조각중 좌측 아래 조각과 대동금석서 탁본 우측 위 4-5글자는 같은 부분임
탁본(법)첩2
조속의 금석청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실려있는 탁본 1점은 비명제목6자(弘眞國尊碑銘)를 1행에 3자 2행에 3자, 두칸으로 나누어 제작, 비문 중앙의 일부분을 6행 11열로 총 60자로 제작
탁본첩3
장서각소장탁본자료집1에 탁본 1점이 있는데 비편 4점을 모아 1장으로 탁본한 것임
☞추진사항
동화사 문의
- 달성 도학동 석조부도를 도학동 내학부락에서 동화사 안으로 옮긴 당시의 기록이 있는지?
은해사 문의
- 홍진국사와 관련된 유적 유물 기록이 은해사에 있는지?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 소장하고 있는 동화사홍진국존진응탑비 탁본 실물 열람
도학동 내학마을
- 현지 답사하여 석조부도가 있던 위치 확인 및 혹 묻혀 있을 수 있는 비편이나 비의 흔적 확인
3-2. 고려국 대장이안기 (1306, 김순 書)
소재 불명
고려국 대장이안기는 문헌에 강원도 회양부 금강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를 찬한 閔漬(민지)라는 분이 금강산 유점사와 장안사에 관련된 기록을 많이 남겼으므로 이곳중 한 곳에 있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으나 남북 분단으로 현재 확인하지 못하고 있음
고려국 대장이안기는 현재 일본의 정가당문고에 소장되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에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탁본인지 기록인지 확인하지 못했음
학문적 연구동향
허흥식의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1986,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p706-717)
3-3.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1314, 김순 書)
소재 불명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이라고 하는데 확인하지 못했음
※원공은 김순의 조카인 김승용의 장인 원관이라는 분임
김방경-김선-김승용
김방경-김순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 김정중 -
▣ 郡/김태영 - 수고하셨습니다.
▣ 김재이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