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祖의 墨香을 찾아서] 04(김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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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8-28 04:17 조회1,455회 댓글0건본문
[先祖의 墨香을 찾아서] 04(김구용)
4.문온공 척약재 金九容 1338(충숙왕복위7)∼1384(우왕10)
디지털한국학 홈
김구용(金九容)
1338(충숙왕복위7)∼1384(우왕10).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척08若齋) 또는 육우당(六友堂).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현손으로 묘(昴)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하고,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일등을 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다.
18세에 등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고, 1367년(공민왕 16)성균관이 중건되고 나서 민부의랑겸성균직강(民部議郎兼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하여 성리학을 일으키는 일익을 담당하였다.
1375년(우왕 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어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귀양갔으며, 뒤에 여흥(驪興)으로 옮겨 강호에 노닐며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이라 이름하고 시와 술로 날을 보냈다.
1381년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어 왕의 절제 없는 거둥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였고,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84년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떠날 때 국서와 함께 백금 1백냥과 세저(細苧)·마포 각 50필을 가지고 갔다. 요동에서 체포되어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는데,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되던 도중 노주 영녕현(瀘州永寧縣)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사장(詞章)을 잘하여, 특히 시로 유명하였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 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다.
《주관육익 周官六翼》을 찬하였으며, 문집인 《척약재집》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牧隱集, 惺#수04詩話, 警修堂集, 韓國漢文學史(李家源, 民衆書館, 1961). 〈朴天圭〉
4-1 소천서원 청원정 (문온공 친필 遺墨 암각문)
* 소재지 : 경북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 소천서원 내
* 소천서원 정자 편액이 淸遠亭인데 이 글씨는 절벽에 새겨진 척약재 선조의 친필을 탁본 보필하였다.
청원정 重修記에 이르기를
山이 있어 千丈을 우뚝 솟아 옮아 오니 武夷라 한다. 물이 있어 三江에 會合하니 洛東江 上流를 省火라 하고 亭子가 있어 날아갈 듯이 가장 웅결한 곳에 서 있으니 이름하여 淸遠이라(香遠益淸-예기에서 온말-에서 준 말로 맑지 않음이 세속이라 이를 멀리하여 인생을 맑게 살아 심오한 진리를 머물게 하는 곳이란 뜻)
실로 竺山君 菊坡 全元發선생이 만년에 休老하신 때 지은 것이다. 그 위에 淸遠亭이라 三字를 새긴 것이 있는데 이는 척약재 김구용선생의 平筆이라.
소천서원은 낙동강의 상류인 성화천이 김돌아나가는 경치 좋은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름답기로는 청원정이라는 정자가 으뜸이다.
청원정 정자는 임란시 소실되고, 그 후 복원하였는데, 정자의 편액은 원래 척약재 김구용 선조께서 쓰신 것이어서 이를 다시 복원하려 하였으나 원본을 잃어버렸고, 또 척약재 유묵이 가야리 창벽위에 새겨저 있었으나 떨어저 나가 강가운데로 묻히어 버렸으므로 도저히 고증할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강속에서 자주빛이 밤마다 비추어서 본토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강속을 샅샅히 살펴보니 커다란 돌위에 글씨가 새겨저 있는데 그 글씨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건져 올려서 다시 절벽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문중에서 이는 선조의 도움으로 청원정의 현판을 다시 척약재 필적으로 하라는 계시라 여기고 모사하여 청원정의 편액으로 달았다고 한다.
▣ 김태서 - 잘보았습니다.
▣ 김영환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포천 광렬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영윤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金在益 -
4.문온공 척약재 金九容 1338(충숙왕복위7)∼1384(우왕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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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용(金九容)
1338(충숙왕복위7)∼1384(우왕10).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척08若齋) 또는 육우당(六友堂).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현손으로 묘(昴)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하고,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일등을 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다.
18세에 등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고, 1367년(공민왕 16)성균관이 중건되고 나서 민부의랑겸성균직강(民部議郎兼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하여 성리학을 일으키는 일익을 담당하였다.
1375년(우왕 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어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귀양갔으며, 뒤에 여흥(驪興)으로 옮겨 강호에 노닐며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이라 이름하고 시와 술로 날을 보냈다.
1381년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어 왕의 절제 없는 거둥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였고,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84년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떠날 때 국서와 함께 백금 1백냥과 세저(細苧)·마포 각 50필을 가지고 갔다. 요동에서 체포되어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는데,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되던 도중 노주 영녕현(瀘州永寧縣)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사장(詞章)을 잘하여, 특히 시로 유명하였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 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다.
《주관육익 周官六翼》을 찬하였으며, 문집인 《척약재집》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牧隱集, 惺#수04詩話, 警修堂集, 韓國漢文學史(李家源, 民衆書館, 1961). 〈朴天圭〉
4-1 소천서원 청원정 (문온공 친필 遺墨 암각문)
* 소재지 : 경북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 소천서원 내
* 소천서원 정자 편액이 淸遠亭인데 이 글씨는 절벽에 새겨진 척약재 선조의 친필을 탁본 보필하였다.
청원정 重修記에 이르기를
山이 있어 千丈을 우뚝 솟아 옮아 오니 武夷라 한다. 물이 있어 三江에 會合하니 洛東江 上流를 省火라 하고 亭子가 있어 날아갈 듯이 가장 웅결한 곳에 서 있으니 이름하여 淸遠이라(香遠益淸-예기에서 온말-에서 준 말로 맑지 않음이 세속이라 이를 멀리하여 인생을 맑게 살아 심오한 진리를 머물게 하는 곳이란 뜻)
실로 竺山君 菊坡 全元發선생이 만년에 休老하신 때 지은 것이다. 그 위에 淸遠亭이라 三字를 새긴 것이 있는데 이는 척약재 김구용선생의 平筆이라.
소천서원은 낙동강의 상류인 성화천이 김돌아나가는 경치 좋은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름답기로는 청원정이라는 정자가 으뜸이다.
청원정 정자는 임란시 소실되고, 그 후 복원하였는데, 정자의 편액은 원래 척약재 김구용 선조께서 쓰신 것이어서 이를 다시 복원하려 하였으나 원본을 잃어버렸고, 또 척약재 유묵이 가야리 창벽위에 새겨저 있었으나 떨어저 나가 강가운데로 묻히어 버렸으므로 도저히 고증할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강속에서 자주빛이 밤마다 비추어서 본토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강속을 샅샅히 살펴보니 커다란 돌위에 글씨가 새겨저 있는데 그 글씨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건져 올려서 다시 절벽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문중에서 이는 선조의 도움으로 청원정의 현판을 다시 척약재 필적으로 하라는 계시라 여기고 모사하여 청원정의 편액으로 달았다고 한다.
▣ 김태서 - 잘보았습니다.
▣ 김영환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포천 광렬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영윤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金在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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