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큰아버지 김창金敞 01 (족보, 고려사)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2-08-29 03:19 조회1,610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 큰아버지 김창 01 (족보, 고려사)
문간(文簡)공 ★김창(金敞, ?-1256, 초명 김효공) 선조는 충렬공의 할아버지이신 ★김민성(金敏成)의 5남 (김효공, 김효인, 김효구, 김효수, 김효조) 1녀(윤신에 출가) 중 장남으로 충렬공에게는 큰 아버지가 되시므로 충렬공(1212-1300)의 성장과 관직생활에 직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문간공 김창 선조에 대한 기록을 모아 보면 혹 충렬공 기록에 대한 또다른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정리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동김씨 족보
김민성(金敏成)
문과, 한림직사관겸장치서령 추봉 상서복야, 묘 안동부서一息화림촌
---고려사에 "★김방경이 낳자 조부 ★김민성의 집에서 자랐었는데 뜻에 조금만 마땅치 않고 노여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거리에 나가 들어 누워서 울었으나 오가는 소와 말이 그를 피해서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충렬공께서는 어릴 때 조부의 교육하에 성장한 것으로 보이며
김민성 선조께서 문과에 급제하시고, 1남 김효공, 2남 김효인이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임
김민성 할아버지는 5남 (김효공, 김효인, 김효구, 김효수, 김효조) 1녀(윤신에 출가)를 두셨는데
1남 ★김효공(金孝恭)
개명敞, 고려희종조 문과,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 시文簡
公性溫和 無 於人 臨終語其姪方慶等 辭禮葬事 見麗史及勝覽 (공은 성품이 온화하고 다른이에게 오만하지 않았다. 임종시에 조카 방경등에게 예장으로 하지 말라고 하였다. 여사와 승람에 기록이 있다.)
2남 ★김효인(金孝印)은 충렬공의 아버지이시고,
3남 ★김효구(金孝 )는 同正을 지내시고 1남 ★金惟善 (검교감 군기감)을 두었고,
4남 ★김효수(金孝綬)는 상락백 밀직부사를 지내시고 1남 ★金天錫을 두었으며,
5남 ★김효조(金孝組)는 좌정승 상락후를 지내시고 1남 ★金天弼을 두었다.
1女는 ★윤신(尹莘)에게 출가하였다.
☞ 孝자 항렬 아래 충렬공 4촌형제 항렬이 제각각인데 무슨 연유가 있는지?
(방경, 지경, 현경, 유선, 천필, 천석)
☞ 효구, 효수, 효조는 동정, 상락백 밀직부사, 좌정승 상락후 등 고관대작을 지냈는데, 사서에 기록이 없음?
▣ 김방경 묘지명 (1300년, 이진 찬)
公의 성은 김이요 휘는 方慶이니 영가군 사람이다.
曾祖는 사호 벼슬을 지내신 ★義和요 贈검교 군기감이시고
祖는 장야서승 겸 직사관 ★敏成이시며 贈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이시고
考는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 ★孝印이시며 贈금자광록대부 중서령이시니
모두 公으로 인하여 추봉된 것이다.
비(어머니)는 원흥진부사 낭장 김해부 ★宋耆의 따님이시다
▣ 김순 묘지명 (1321년, 민지 찬)
공의 휘는 恂이요 자는 歸厚며 신라왕 金傅의 10세손으로 태어나시니 안동부는 즉 그의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고향이다.
증조의 휘는 ★敏成이시니 좌복야로 追封되고 장야서승 겸 직사관을 지냈으며
조의 휘는 ★孝印이시니 중서령으로 追封되시어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수관수찬관 지제고를 지내시고
고의 휘는 ★方慶이시니 元帝로부터 중봉대부 관고려군 도원수 추충정난 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 전리사사 상장군 상락군개국공 食邑 1천호를 宣授하니 實封은 3백호이며 돌아가신 후에 고려에서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을 贈職하고 시호는 忠烈이라 내렸다.
공의 어머님은 박씨요 중서사인 지제고 ★益旌의 따님으로서 陰平郡夫人을 봉하였다.
▣ 디지털한국학 홈
★김창(金敞)
시대 고려
생몰년 ?-1256(고종43)
본관 안동(安東)
자
호
시호 문간(文簡)
활동분야 문신
다른 이름 ★효공(孝恭)
?∼1256(고종 4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효공(孝恭). 희종 때에 급제하여, 사관을 거쳐 병부우승(兵部右丞)이 되었다. 고종 때에 ★최우(崔瑀)에게 등용되어 정방에서 전선(銓選)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는데, 이때 이부·병부의 선발에 응한 자가 무려 수백명이었지만 한번 보고 그 이름을 다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우의 지시대로만 따른다는 비난도 받았다.
1237년에 대복시사로서 국자감시의 시관이 되었으며, 1242년에는 추밀원부사로서 지공거가 되어 ★홍지경(洪之慶) 등 진사를 선발하였다. 그뒤 추밀원사를 거쳐 문하평장사가 되었다.
최씨 집권자의 신임을 얻어 오랫동안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진퇴를 분명히 하여 육십이 되어서 재상이 될 정도로 청렴하였다.
1256년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守太師門下侍郎平章事判吏部事)로 죽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申千湜〉
▣ 고려사
⊙《고려사》 제102권 - 열전 제15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신 정인지가 왕의 교서를 받들고 편수하였음.
금의 (1153-1230)
이규보 (1168-1241)
유승단 (1168-1232)
김인경 (?-1235)
이공로 (?-1224)
이인로 (1152-1220)
조문발 (?-1227)
이순목 (?-1249)
★김창 (?-1256) 김효인(?-1253) 김방경(1212-1300)
송국첨 (?-1250)
최자 (1188-1260)
채송년 (?-1251)
손변 (?-1251)
권수평 (?-1250)
이순효 (?-1254)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1190-1266)
이장용 (1201-1272)
★김창
★김창의 그전 이름은 ★효공(孝恭)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니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희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고 직사관(直史館)으로 있다가 여러 번 벼슬이 올라서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임명되었다.
★최이가 그를 불러서 정방(政房)에 두고 전선(銓選-인재 선발)임무를 맡겼는데 당시 이부(吏部), 병부(兵部) 관계의 선발에 응하는 자가 무려 수만 명에 달하였다. ★김창이 한 번 보면 그들의 성명을 모두 기억하였으며 무슨 일로 신소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즉시 그 질문에 응답하여 해명해 주었으나 그 내용이 사소한 착오도 없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기억력이 강한 데 대하여 탄복하였다.
그러나 전주(銓注)할 때에는 일일이 ★최이에게 문의하고 결정하였으며 자기의 견해로 가부를 정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은즉 그가 대답하기를 “하늘이 우리 진양공(晋陽公-최이)의 손을 빌리어서 국정을 처리하는 것인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간섭하겠느냐?”고 하였다. 그의 아첨이 대개 이러하였다.
고종 때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되었다가 문하 평장사(門下平章事)로 승진되었다. ★김창은 세도가에 아부하여 오랜 기간 정권에 참가하고 있었던 터이라 하루 사이에 아홉 번이라도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항상 자격과 절차를 준수하였기 때문에 자기 나이 60세에 가까워서야 상(相)으로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벼슬에 대한 탐욕이 적은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43년(1256년)에 수 태사 문하시랑(守太師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판 이부사(判吏部事)로 재직하다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다. 임종시에 그의 조카 ★김방경(金方慶) 등에게 유언하기를 “자기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하는 것을 사절하라”고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라고 하였다.
⊙《고려사》 제74권 - 지 제28 > 선거 2 > 과목 2 >
국자감 시험
국자감(國子監) 시험. 이는 곧 진사 시험인데 덕종(德宗)이 처음으로 설치하고 부(賦)와 6운(韻) 및 10운 시(詩)를 시험쳤으며 그 후에는 이를 혹은 성균 시험(成均試)이라고도 하고 혹은 남성 시험(南省試)이라고도 하였다.
문종 25년(1071)에는 다만 6운 시와 10운 시만 시험쳤으며 의종(毅宗) 2년(1148)에는 부와 10운 시만 시험쳤다. 충선왕(忠宣王)은 이를 폐지하였고 충숙왕 4년(1317)에 와서는 구재(九齎)의 삭시(朔試-매월 초하루마다 실시하던 것)로써 이를 대신하였다. 7년에 와서는 이를 거자시(擧子試)라고 하였다.
국자시시원(國子試試員)
국자감 시험의 시험관은 3품 이하의 관원으로서 임명하였다.
국자시지액(國子試之額)
(1237=) 24년 4월에 태복시사(大僕寺事) ★김창(金敞)이 시, 부 시험으로 ★오수(吳壽)와 10운 시 시험으로 ★조희보(曹希甫) 등 81명과 명경 시험으로 4명을 뽑았다.
⊙《고려사》 제73권 - 지 제27 > 선거 1 >
(1242=) 29년 4월에 추밀원 부사 ★김창(金敞)이 지공거로 되고 판 예빈성사 ★설신(薛愼)이 동지 공거로 되어 진사를 뽑았는데 을과 ★홍지경(洪之慶)등 3명, 병과 7명, 동진사과 17명, 명경과 2명, 은사과 8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250=) 37년 5월에 평장사 ★임경숙이 지공거로 되고 상서좌승 ★김효인(金孝印)이 동지 공거로 되어 진사를 뽑았는데 ★김응문(金應文) 등 29명, 명경과 3명, 은사과 8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고려사》 제24권 - 세가 제24 > 고종 3 >
고종 병진 43년(1256)
2월 을축일에 수 태사 문하시랑평장사 ★김창(金敞)이 죽었다.
⊙《고려사》 제95권 - 열전 제8 >
★임의
제고(制誥)를 맡아 본 지 16년 동안에 당시 유명한 조칙들이 모두 그의 손에 의하여 기초되었으며 네 차례나 과거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그가 선출한 인재들은 모두 다 당시의 명사로 되었다. 예하면 ★조충(趙沖), ★이규보(李奎報), ★김창(金敞), ★유승단(兪升旦) 같은 인사들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고려사》 제105권 - 열전 제18 >
★유천우
유천우의 자(子)는 지일(之一)이요 처음 이름은 ★양(亮)이었는데 그 후에 또 ★증(證)으로 고쳤다. 그는 장사현(長沙縣) 사람으로 고종 때에 과거에 합격하고 내시(內侍)에 소속되었다.
상서 ★김창(金敞)이 그를 높이 평가하여 진양공(晉陽公) ★최이(崔怡)에게 추천하였더니 최이가 말하기를 “얼굴은 잘 생기지는 못했으나 정말 좋은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그를 정방에다 두었고 자기의 문객(門客)으로 삼았다.
⊙《고려사》 제106권 - 열전 제19 >
★이주
〔이행검(李行儉)의 기사 첨부〕
이주는 자(字)가 호연(浩然)인데 금마군(金馬郡) 사람이었다. 고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부성(富城) 현위(縣尉)로 임명되었다가 중앙에 들어와서 도병마 녹사로 되었으며 직사관(直史館)으로 선발되었다가 일이 있어서 관직에서 떨어졌다.
상서(尙書) ★김창(金敞)이 그의 재능을 사랑하여 추천하고 교서랑(校書郞)으로 임명되게 하였다. 그 후 여러 관직들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되었다.
원종 때에 병부, 예부의 시랑(侍郞) 및 국자제주(祭酒)를 역임하였고 좌간의대부로 있다가 왕에게 글을 올려 퇴관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왕이 상서 좌복야, 한림학사, 승지로 벼슬을 올려 주어 치사케 하였다.
그는 충렬왕 4년에 죽었는데 나이는 78세였다. 그는 성질이 온순하고 어질었으며 글을 잘 지었고 편지 기타의 글씨를 잘 썼으며 평생토록 생산(生産-이익이 나는 일)에 힘쓰지 않았으므로 그 집에는 쌀 한 섬의 저축도 없었다. 그의 아들은 이행검(行儉)이다.
★이행검은 과거에 급제하여 진주(晋州) 사록(司錄)으로 배치되었다가 얼마 후에 상서 도사(尙書 都事) 겸 직사관(直史館)으로 조동되었다.
여기서 오래 근무하다가 지홍주사(知洪州事)로 파견되어 갔는데 삼별초의 반란 때에 적들에게 붙잡혔다. 적들이 그에게 관리의 선발, 임명 사업을 맡게 하였는데 ★김방경이 반적들을 격파하자 이행검이 그의 아버지 ★김효인(金孝印)의 문생(文生)이 된다 하여 이행검을 살려 주었다. 그 후 청주(淸州), 곡주(谷州-곡산), 풍주(豊州)의 세 고을에서 수령으로 있었는데 청렴하고 정치가 간결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고려사》 제125권 - 열전 제38 > 간신 1 >
★박훤
박훤의 첫 이름은 ★박문수(文秀)며 공주(公州) 사람이다. 과거에 급제하고 ★최이(崔怡)의 가신(家臣)으로 되었는데 사람이 기민하고 말을 잘 해서 누차 최이의 뜻을 잘 맞추었으므로 최이가 그를 사랑하고 신임하게 되어 불과 수년에 요직을 지내고 정방(政房)으로 들어가서 ★김창(金敞), ★송국첨(宋國瞻)과 더불어 이름을 날리고 권세도 부렸으며 국내에서 세력이 매우 컸다.
작성자 :김태영 작성일 : 2003/12/22 09:10 (from:61.40.37.185) 조회 : 71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제5권 (5)
[孫] 아들의 아들이 손자이다. 공손하다(遜)는 뜻이다. 아들의 도는 공손하고 순종하며 마땅히 뒤를 이어 실천해야 하므로 자(子)와 계(系)로 손(孫)자를 만들었다.
[대전외손(帶傳外孫)]: 평장사(平章事) 김창(金敞)이 붉은 가죽띠를 외손자인 밀직(密直) 학사(學士) 이윤온(李允蘊)에게 전해 주었고, 밀직은 또 그 띠를 외손인 제학(提學) 이방직(李邦直)에게 전해 주었다. 제학은 또 외손 이천동(李天童)에게 전해 주었는데, 이때 시를 지어 주기를,
“가죽띠를 대대로 외가로 전해주니,
내 이제 너에게 주면서 생각이 더욱 많도다.
팔순의 긴 수명까지 나누어 주시어,
지극히 좋은물건 이어 받았으니 네 할애비에 대해 어찌 하겠느냐?
[정帶相傳自外家, 我今贈汝意尤多, 八旬壽考幷分付, 極品仍承爾祖何]”라고 하였다. 김공과 이공 두 분이 모두 85세까지 살아서 ‘팔순의 긴 수명’이란 말을 한것이다. <李義谷集>
김창(金敞): ? ~ 1256 초명은 효공(孝恭)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벼슬은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守太師 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에 이르렀다.
이방직(李邦直): 자는 청경(淸卿), 호는 의곡(義谷),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벼슬은 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提學)에 이르렀다.
▣ 김재원 -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그 많은 자료를 공유할 수 있도록 정리하여 주시는데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郡/김태영 - 많은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헌 - 항상 많은 공부를 할수있게 해주셨어 감사드림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재이 - 정말새롭기만 합니다 감사합니다
▣ 金在益 -
▣ 김정중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