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차안에서 나눈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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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2-09-07 20:05 조회1,783회 댓글0건본문
9월 1일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의 대화 중에, 이 근방에 기계유씨의 큰 묘소가
있다는 은회 아저씨의 말씀에 대한 주회 아저씨의 자료가 있어 올려 봅니다.
▣ [육관도사의 풍수,명당이야기 터 하권] (1993, 손석우 지음, 답게 출판)을 보면
김자점은 광화문 부근의 당주동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대궐 못지 않은 큰 규모의 집을 가지고
있었고, 김자점의 아버지 김함의 묘를 충남 논산군 양촌면 양촌리 명당에 모심으로써 영의정에
까지 오르고, 할아버지 김억령의 묘를 강원 철원군 보계면 양촌리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 모셨
다가 명당터를 잡아준 성지스님 이라는 분을 죽게 함으로써 왕의 자리에 오를수 있는 바로 전날
밤에 역모에 걸렸다는 내용과, 외조부인 기계유씨의 묘를 광주군 남한산성 가는 도중에 있
는 명당터에 모시게 함으로써 그 자손들이 번창하였다는 내용입니다. 그 후손으로 유길
준, 유억겸, 유진오, 유재흥, 유학성 등이 있다고 합니다.
이 내용으로 보아 은회 아저씨가 말씀하신 곳이 김자점 선조님의 외조부 묘소가 아닐까 추측합
니다. 다음에 지나가는 길이 있으면 답사 하고자 합니다. 은회 아저씨, 그 곳에 정확한 위치를 부
탁합니다.
지명유래 (연천군청 읍면홈페이지 참고)
백령리
본래 장단도호부의 장동면 지역으로, 고려시대부터 백령역이 있어 ‘백령리’ 또는 ‘역말’이라 하
였다. 1895 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마전군 장신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
에 놓였다가, 한국전쟁 후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군사분계선과 지리 적으로 인접해 있으므로 일부 지역에만 민간인이 입주해 있
고 출입 영농만 가능한 상태이다. 현재 3개의 행정리, 8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명고개[百名峴] : 역말과 갈현리 사이에 있는 고개. 호랑이와 도둑이 항시 들끓어 백 명이 모
여야만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붙여졌다. 그러나 원래는 ‘산고개’라는 뜻을 가진 지명으로, 산의
뜻인 ‘받’이 ‘백’으 로 음이 변하여 ‘백고개’로 불리워지면서 백령리의 유래가 되는 한자지명의
‘백령’으로 표기된 것이다.
*삭시골 : 샘골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샘골[泉谷] : 달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샘이 있다 하
여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파평 윤씨 (坡平尹氏)*원주 원씨(原州元氏)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석물세기 : 샘골 동쪽에 있는 산등. 큰 석물을 갖춘 김자점(金自點)의 조상 묘가 있었으나 그가
역모 로 처형되자 묘도 파헤쳐 버렸다 한다.
▣ 郡/김태영 - 잘읽었습니다.
▣ 金在益 -
▣ 김재이 - 잘읽었습니다
▣ 김항용 - 좋은 자료를 읽었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자점할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열받쳐서 원. . .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 김정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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