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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용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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郡/김태영 작성일02-09-07 21:50 조회1,4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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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용묘지명(金承用墓誌銘)



(--- 마 멸 ---) 천력<天曆, 원나라 문종(文宗)의 연호> 二 년 기사(一三二九)년 三월 갑술(甲戌)에 선수선무장군(宣授宣武將軍) 관고려국만호(管高麗國萬戶)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密直使)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상호군(上護軍) 김공이 표(表)를 받들고 원나라에 하례(賀禮)하고 돌아오다가 압록강을건너면서 병에 걸려 신안(新安)의 여관에서 죽었다.

이달 경진(庚辰)일에 영구(靈柩)가 역마(驛馬)로 운송되어 서울에 들어와서 고류동(孤柳洞)에 있는 사저(私邸)에 빈청(殯廳)이 마련되었다. 다음 달인 四월 병신(丙申)일에 묵동(墨洞)의 북쪽 산 기슭에 장사 지냈다. 아아! 공의 휘(諱)는 승용(承用)으로 영가<永嘉, 안동(安東)의 고호>가 본관이다.

증조는 정의대부(正議大夫)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충사관수찬관(充史館修撰官) 지제고(知制誥)를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에 추봉(追奉)된 휘 효인(孝印)이며, 조 는 중봉대부(中奉大夫) 도원수(都元帥) 추충선력정난정원공신(推忠宣力靖難定遠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상장군(上將軍) 판전리사(判典理事) 세자사(世子師) 상락공(上洛公) 휘 방경(方慶)이다. 부 는 봉익대부(奉翊大夫)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전법판서(典法판書) 상호군(上護軍) 휘 선(瑄)이며, 모 는 조정대부(朝靖大夫) 사재경(司宰卿) 설인검(薛仁儉)의 딸이다.

공은 사람됨이 매우 점잖고 말수가 적었으며 온화 하면서도 곧았고 항상 화락(화樂)한 모습을 지녔고, 훨칠한 키에 대담한 배짱은 정말 재상(宰相)의 풍채로서 손색이 없었다. 관직(官職)에 있을때는 청렴하고 소하기를 힘썼으며 특히 통솔력이 매우 뛰어났다. 장수로 나가서는 사졸(士卒)과 함께 동고동락 하여 언제나 인심을 잃지 않았고 지방에 수령(守令)이 되어서는 아전들이 감히 속일수도 없었으며 모든 백성들 부모처럼 받들었다. 중앙으로 돌아와 재상(宰相)이 되어서는 공무를 정도로 처리하여 사정(私情)을 두지 않았으며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지조(志操)를 바꾸지 않았다. 공은 사람과 사귐에 물 처럼 담담(淡淡)하게 하여 평생 에 남의 잘잘못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다만 붕당(朋黨)의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선왕(先王)의 뜻에 거슬려서 완산주(完山州)의 목사로 나가게 되었고 이어 익성부(益城府) 자사(刺使)로 옮기게 되었으며, 또 더욱 멀리 떨어진 장흥부(長興府)와 영광군(靈光郡)에 까지 가게 되었으니 이는 백성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동번병마사겸회양도감창안집사(東藩兵馬使兼淮陽道監倉安集使) 와 억마진(抑摩鎭) 합포영(合浦營) 겸경상전라도순문사(兼慶尙全羅道巡問使)를 역임한 것은 공론에 따른것 이었고 찌기 조정의 풍헌관(風憲官)이 되었을 때나 형조(刑曺)에서 옥사(獄事)를 처결 할때에는 언제나 칭송을 받았으며 온나라의 사람들이 그공평함에 신복(信服) 하였다. 공은 문음(門蔭)으로서 나이14세가 되자 천화사진전(天和寺眞殿)에 조용(調用)되었으며 23세에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하였다. 27세에는 무사로서 왕을 호종(扈從)하여 원(元)에 갔었다. 위위주부(衛衛注簿)로 부터 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 신호위장사(神虎衛長史), 비서랑(秘書郞), 군부좌랑(軍簿佐郞), 도관정랑(都官正郞), 감찰시사(監察侍事), 사재소윤(司宰小尹), 국자사업(國子司業), 사헌장렬(司憲掌令), 총부의랑(摠部議郞), 사헌집의(司憲執義), 판내부사(判內部事), 헌부전서(言+獻部部典書),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밀직사(密直使), 한림원및보문각 대학사(翰林院,寶文閣大學士), 상장군(上將軍)을 역임 하였으며 품계(品階)는 봉상(奉常),중현(中顯), 중정(中正), 봉순(奉順), 통헌(通憲)을 거쳐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공 의 상세한 이력이다. 공은 처음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원관일(元瓘一)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1녀를 낳았다. 첫아들은 후(厚)인데 지금 서부부령(西部副令)이고, 둘째아들은 구(玖)인데 낭장(郎將)이다. 딸은 개성판관(開城判官)유지연(柳之演)에게 시집가서 자녀를 두었다. 첫부인은 공보다 먼저 죽었다. 나중에 대호군(大護軍) 이자(李資)의 딸및 감찰시사(監察侍史) 박영견(朴永堅)의 딸에게 장가 들었으나 모두 후손을 두지 못하였다. 아아! 향년(享年)이 예순둘이니 일찍 돌아가신 것이 아니며 금자(金紫)의 품계에 올랐으니 관작(官爵)이 낮은것도 아니니, 공에게 있어서 연세(年歲)나 관작은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다만 가슴 가득한 경륜(經綸)과 커다란 도량을 조정에서 펴보지 못하였으니 우리나라를 위하여 매우 애석하다.

두 아들이 내가 선군(先君)의 오랜 친구라는 것을 알고 울면서 지문(誌文)을 청하니 눈물을 붓끝에 적시어 명(銘)을 짓는다.





곡봉(鵠峰)을 지나니



압록강 넘실 넘실



돌아와 왕 뵈오려는 한가지 생각에



돌아가는 고향길 빨리 가자 독려 했네.



집에는 상사(喪事)와 화란(禍亂)을 만나고



국가는 충량한 신하 잃었네.



상락공(上洛公)의 공업은



공이 전해 드날렸건만



이제 문득 돌아가시니



누가 뒤를 이을건가.



이 아름다움 돌에 새겨



어둔 묘혈(墓穴)에 빛 삼으니



천년 만년 지나도록



길이 빛나 잊혀지지 않으리.





중정대부 밀직사좌부대언 삼사우윤 보문각제학 지제교 이숙기

(中正大夫 密直司左副大言 三司右尹 寶文閣提學 知製敎 李叔琪)











▣ 金在益 -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 김재이 - 잘보았습니자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본 홈 군사공파란에 올리겠습니다.

▣ 김주회 - 정말 귀한 자료를 발굴하셨습니다. 작년 말부터 찾아 헤매던 자료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군사공파 홈페이지 온갖 보물로 가득가득 차시길. . . .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영윤 -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할어버님 묘가 실묘인가요? 실묘라면 묵동에서 언제 옮겨모신 것일까요? 본댁이 세류동이라고 되어 있는데 개성 어느쯤일까요? 이런 문제를 찾고자 합니다. 이런 좋은 자료 제공하신 태영씨 감사합니다.

▣ 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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