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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민족의 영웅 백범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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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1-08-23 03:31 조회2,3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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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1876-1949)



항일 독립운동가.정치가.아명 창암,초명 구.창수,호 백범,초호 연하.본관 안동. 황해도 해주 출신.



15세 때에 한학자 정문재에게서 한학을 배웠고,1893년(고종30)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고 이듬해 팔



봉도소접주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혁명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95년(고종32) 만주로 피신하



여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을미사변 때 일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자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었다.복



역 중 98년(광무2)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중이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1903년(광무27)그리스도교에 입



교하였다.1909년 안악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에 참가하고, 11년에 소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14년 출옥하여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 농감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 운동 후에 상하이로 망명,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하



면서,28년 이시영.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당수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 무력활동을 시작, 결사



단체인<한인애국단>을 조직,32년 사쿠라다몽 일본천황 저격 사건,상하이 홍구공원 일본천황 생일축하식



장의 폭탄 투척 사건 등 이봉창.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33년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나 한국인 부



관학교 설치와 대일본 전투방책을 협의하고 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40년 임시정부가 충칭



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을 임명하고 44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45년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



하여 본국상륙작전훈련을 실시하다가 8.15 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



을 인정받지 못하고,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서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



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 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 총본부 주총재 등을 역임하



면서 극우파로서 활약하였다 . 48년 남한만의 단독총선거를 실시한다는 UN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 정



부 수립을 위한 남한 협상을 제창하고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 하였다 그후 정부수립



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



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고 62년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백범일지>가 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치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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