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곡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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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2-10-03 23:18 조회1,577회 댓글0건본문
오늘은 개천절입니다.
아들(형주)와 함께 청계천 헌책방을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섰는데 차가 고장이 나서 기아차 서비스에 차수리를 의뢰하고 pc방에 와 있습니다.
아이는 신이나서 게임을 하고있고 저는 그냥 인터넷 항해중입니다.
항해 중 여름캠프때 다녀온 의성에 대한 내용이 있어 퍼왔습니다.
이자리를 빌어 사촌 마을의 어르신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점곡면의 연혁과 개황
점곡면은 중국 춘추 전국시대 공자의 고제자 증자의 부친 증점의 점자를 따라 점곡(원래 사촌리의 명칭)이라 불렀다
증자의 시에 "기수에 목욕하고 바람을 쏘인다"라고 한 귀절이 있었는데, 그래 인해 면 중앙을 흐르는 하천을 또한 기천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면적은 64.64제급킬로미터, 인구는 2.904명이며, 동쪽은 옥산면, 서쪽은 단촌면, 의성읍, 남쪽은 사곡면, 의성읍과 접하고, 북쪽은 단촌면, 안동시 남선면, 임하면에 이어진다
자연 마을 25개 동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 면 폐합 이후 8개 리로 개편되었다
면의 대부분이 200 - 500m의 구릉성 산지이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기천의 지류를 따라 기름진 평야가 전개된다
토질은 사질 양토이며 기후는 일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이다
쌀과 보리를 중심으로 한 주곡 작물과 사과, 고추, 마늘, 담배 등이 산출된다
청송과 의성간의 지방도가 지나고 점곡과 단촌 사이의 군도가 포장되어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며 면내에 고등학교 1개교, 중학교 1개교,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점곡면의 자랑
◇ 연면한 문향, 병신 의병의 요람
조선조 초기부터 몇몇 성씨가 안동지방에서 이주하여 전통적인 씨족마을을 형성했다
그들은 각기 인의예지를 숭상 궁행하는 한편, 학문과 덕행을 힘써 많은 유현과 지조높은 석학이 배출되었다
대소과에 급제한 이도 50여명이 넘어 각 각 그 시대의 대소관직에 임하거나 또는 은둔 자수하여 적덕수범하는 가운데 후진을 길렀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의 여러 난에 구국의 기치를 높였던 전통이 맥맥히 이어진 이 고장에 또 한 번의 의병이 일어났으니, 병신 의병이 그것이다(병신년에 일어난 의병을 의미한다)
한말, 일제가 여러 차례 간교한 조약으로 조국 강토를 잠식하고 주권을 침탈해 올 무렵 왜군과의 결사적 항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1896년 고종이 밀명을 받은 의병대장 김상종 등이 의병을 모아 금성면 산운동에서 1차 접전하고 그 해 3월 29일 옥산면 황산에서 혈전했으나 역부족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김수담, 김수형 등은 많은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니 왜군들은 승세를 몰아 의병의 본거지였던 점곡면 사천에 내려 와서 와해라고 일컬었던 와가 대촌을 삽시간에 불살랐다
그 뒤 파병조칙이 내려 남은 의병들은 절치 분통하여 해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병신년의 애국혼은 3. 1 운동에 이어져 몇 몇 동리에 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하늘로 메아리치고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룬 투사들고 많았다
◇ 사촌의 가로 숲, 서림
사촌 서편 매봉산 기슭을 따라 길이 약 1,040m, 폭 40m의 방풍 경관림이 길게 놓여 있으니, 이것이 사촌 가로 숲이다
수종은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10여종이며, 수령은 300 - 600년 사이의 노거수가 많고, 수고 10 - 20m로 장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는 경상북도 내에서도 가장 큰 숲의 하나인데 약 600년전 안동 김씨 입향시조인 감목공 김자첨이 안동에서 사촌으로 옮겨 마을을 이룰 때 서편 긴 평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고 소요 휴식을 할 수 있게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지금도 푸른 숲에 100여 마리의 왜가리 떼와 뭇 철새들이 찾아 들어 봄에는 새소리, 여름에는 녹음,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설화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보호림 1등급 9 - 75호로 경상북도에서 지정한 바 있다
우리마을 이야기
사촌(沙村) 3리
◇ 마을 연혁
- 고려중기(高麗中期)의 명장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후손 감목공(監牧公) 김자첨(金子瞻)이 안동(安東)에서 이거(移居)하여 1392년 이곳에 정착하여 사촌(沙村)이라고 칭 하였음
◇ 자연 부락별 유래
- 사촌(沙村)은 약 1392년 전 사촌은 원래 당시의 개기가 아니고 신라(新羅)때 나(羅)씨 손(孫)씨 권(權)씨에 이어 김(金)씨가 들어와 서방(西方)을 막기 위하여 서림을 조성하고 동명(洞名)을 중국 사진촌(沙眞村)을 모방하여 사촌(沙村)이라 칭하였다
◇ 유적 및 유물
- 만취당(晩翠堂) : 만취당(晩翠堂)은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문자(女)질 양성 하기 위 하여 1580년경 창건하여 현존 한 목조 건물로 지금은 사촌 김씨의 종가(宗家) 본청 으로 쓰고 있다
- 후산사(后山祠) :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들이 종조교손(宗祖敎孫)의 전대으로서 후학들이 모여 춘추정(春秋亭)을 지내다가 대원군 당시 원사 훼철령으로 인하여 현재는 주사만 남아있음
- 자여당(自余堂) :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의 손자 김상각(金尙珏)이 조상들의 유덕(遺德)을 추모키 위하여 1977년 사촌(沙村)에 정자를 지어 지금도 자손들이 회소(會所)로 이용되고 있다
◇ 주요 인물
- 나간업(羅干業) : 연대미상(年代未詳) 신라(新羅)때 정승
- 김광수(金光粹) : 조선 연산군 당시(1500년경)유학자로서 일찍이 성균관에서 강학(講學)하다가 임란으로 피해 고향에 은거 영귀정(詠歸亭) 강학하고 후생을 양성하고 자손을 가르쳤음
- 김사원(金士元) : 퇴계 문하에 수학한 선비로 임란에 창의하였음
- 김사정(金士貞) : 김사원(金士元)의 계씨로 임란 때 곽망우호(郭忘優호) 따라 화각산성(火珏山城)에서 전공을 세웠음
- 류성용(柳成龍) :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 선생은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 선생의 외손자로서 1542년 사촌(沙村)에서 출생하여 퇴계 문하에 수학하고 임란 8년 풍진(風塵)을 치란한 이조 역대의 명신이며 이곳 출생의 가장 유명한 명현(名賢)이시다
- 김종덕(金宗德) : 퇴계학의 민원정통 퇴계(退溪) 이황(李滉) 일학봉(一鶴峯) 김성일(金城一) 경당(敬堂) 장환효(張奐孝)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천사(川沙) 김종덕( 金宗德) 완제(完濟) 류치명(流致明)등의 유학자로서 학문을 닦고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고 저서로서는 문집 10권 비롯 초려문탑(草廬問塔) 공내일통(孔內一統) 정본(政本) 고증(考證) 예서(禮書) 기타 저서 50여권을 서술하였음
- 김종경(金宗敬) : 김종발(金宗發) 김종변(金宗變) 김종신(金宗臣) 김종일 김종국(金宗國) 김종헌(金宗憲) 김종식(金宗軾)등 일문 종단이 대소등과로 대과 12명 소과 28명의 많은 유현 다재사 배출하였음
◇ 마을 주요 유래
- 가로숲 : 사촌(沙村)에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정착하여 서방 허(虛)를 막기 위하여 서삼(西森)을 조성하였는데 인공 조림으로 서는 가장 오래된 숲이다 (수종 상수리 나무 및 각종 괴목나무1km 경상북도 3등급 9호로지정)
- 지당(地堂) : 자연 호수로서 마을 중심지가에 있으며 지리학적으로 동리(洞里)가 화(火)혈이라 연못이 있어야 화재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전하고 있어 지금도 보전하고 있다
서변(西邊)리
◇ 연혁
- 원래 사촌(沙村)의 일부로 1350년 김구정(金九鼎)선비가 이 마을에 정착하였으며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동변(東邊)동의 서편이라 서변(西邊)이라 하였음
- 군조례 제1225호(1988. 5. 1)에 의거 리로 개편
◇ 명칭유래
- 원래 사촌의 일부였던 것이 인구증가로 분할하면서 동변(東邊)의 서편이라 하여 서변(西邊)으로 명명하였으며 1988.5.1의성군조례 1225호에 의거 리로 개편
▣ 김정중 - 발용 대부님 ! 대 단 히 감사합니다. ^^*
▣ 태영/문 - 노고가 크셨습니다. 언제 또 가고 싶습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 김재익 - 사촌 정착 년대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수 있다,조선 시대에 와서 고려명신(후손)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국정에 참여를 위해 조치를 한 임금은 태종 때 였으니...
▣ 김재이 - 감사합니다
▣ 김영윤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아들(형주)와 함께 청계천 헌책방을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섰는데 차가 고장이 나서 기아차 서비스에 차수리를 의뢰하고 pc방에 와 있습니다.
아이는 신이나서 게임을 하고있고 저는 그냥 인터넷 항해중입니다.
항해 중 여름캠프때 다녀온 의성에 대한 내용이 있어 퍼왔습니다.
이자리를 빌어 사촌 마을의 어르신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점곡면의 연혁과 개황
점곡면은 중국 춘추 전국시대 공자의 고제자 증자의 부친 증점의 점자를 따라 점곡(원래 사촌리의 명칭)이라 불렀다
증자의 시에 "기수에 목욕하고 바람을 쏘인다"라고 한 귀절이 있었는데, 그래 인해 면 중앙을 흐르는 하천을 또한 기천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면적은 64.64제급킬로미터, 인구는 2.904명이며, 동쪽은 옥산면, 서쪽은 단촌면, 의성읍, 남쪽은 사곡면, 의성읍과 접하고, 북쪽은 단촌면, 안동시 남선면, 임하면에 이어진다
자연 마을 25개 동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 면 폐합 이후 8개 리로 개편되었다
면의 대부분이 200 - 500m의 구릉성 산지이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기천의 지류를 따라 기름진 평야가 전개된다
토질은 사질 양토이며 기후는 일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이다
쌀과 보리를 중심으로 한 주곡 작물과 사과, 고추, 마늘, 담배 등이 산출된다
청송과 의성간의 지방도가 지나고 점곡과 단촌 사이의 군도가 포장되어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며 면내에 고등학교 1개교, 중학교 1개교,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점곡면의 자랑
◇ 연면한 문향, 병신 의병의 요람
조선조 초기부터 몇몇 성씨가 안동지방에서 이주하여 전통적인 씨족마을을 형성했다
그들은 각기 인의예지를 숭상 궁행하는 한편, 학문과 덕행을 힘써 많은 유현과 지조높은 석학이 배출되었다
대소과에 급제한 이도 50여명이 넘어 각 각 그 시대의 대소관직에 임하거나 또는 은둔 자수하여 적덕수범하는 가운데 후진을 길렀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의 여러 난에 구국의 기치를 높였던 전통이 맥맥히 이어진 이 고장에 또 한 번의 의병이 일어났으니, 병신 의병이 그것이다(병신년에 일어난 의병을 의미한다)
한말, 일제가 여러 차례 간교한 조약으로 조국 강토를 잠식하고 주권을 침탈해 올 무렵 왜군과의 결사적 항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1896년 고종이 밀명을 받은 의병대장 김상종 등이 의병을 모아 금성면 산운동에서 1차 접전하고 그 해 3월 29일 옥산면 황산에서 혈전했으나 역부족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김수담, 김수형 등은 많은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니 왜군들은 승세를 몰아 의병의 본거지였던 점곡면 사천에 내려 와서 와해라고 일컬었던 와가 대촌을 삽시간에 불살랐다
그 뒤 파병조칙이 내려 남은 의병들은 절치 분통하여 해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병신년의 애국혼은 3. 1 운동에 이어져 몇 몇 동리에 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하늘로 메아리치고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룬 투사들고 많았다
◇ 사촌의 가로 숲, 서림
사촌 서편 매봉산 기슭을 따라 길이 약 1,040m, 폭 40m의 방풍 경관림이 길게 놓여 있으니, 이것이 사촌 가로 숲이다
수종은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10여종이며, 수령은 300 - 600년 사이의 노거수가 많고, 수고 10 - 20m로 장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는 경상북도 내에서도 가장 큰 숲의 하나인데 약 600년전 안동 김씨 입향시조인 감목공 김자첨이 안동에서 사촌으로 옮겨 마을을 이룰 때 서편 긴 평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고 소요 휴식을 할 수 있게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지금도 푸른 숲에 100여 마리의 왜가리 떼와 뭇 철새들이 찾아 들어 봄에는 새소리, 여름에는 녹음,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설화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보호림 1등급 9 - 75호로 경상북도에서 지정한 바 있다
우리마을 이야기
사촌(沙村) 3리
◇ 마을 연혁
- 고려중기(高麗中期)의 명장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후손 감목공(監牧公) 김자첨(金子瞻)이 안동(安東)에서 이거(移居)하여 1392년 이곳에 정착하여 사촌(沙村)이라고 칭 하였음
◇ 자연 부락별 유래
- 사촌(沙村)은 약 1392년 전 사촌은 원래 당시의 개기가 아니고 신라(新羅)때 나(羅)씨 손(孫)씨 권(權)씨에 이어 김(金)씨가 들어와 서방(西方)을 막기 위하여 서림을 조성하고 동명(洞名)을 중국 사진촌(沙眞村)을 모방하여 사촌(沙村)이라 칭하였다
◇ 유적 및 유물
- 만취당(晩翠堂) : 만취당(晩翠堂)은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문자(女)질 양성 하기 위 하여 1580년경 창건하여 현존 한 목조 건물로 지금은 사촌 김씨의 종가(宗家) 본청 으로 쓰고 있다
- 후산사(后山祠) :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들이 종조교손(宗祖敎孫)의 전대으로서 후학들이 모여 춘추정(春秋亭)을 지내다가 대원군 당시 원사 훼철령으로 인하여 현재는 주사만 남아있음
- 자여당(自余堂) :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의 손자 김상각(金尙珏)이 조상들의 유덕(遺德)을 추모키 위하여 1977년 사촌(沙村)에 정자를 지어 지금도 자손들이 회소(會所)로 이용되고 있다
◇ 주요 인물
- 나간업(羅干業) : 연대미상(年代未詳) 신라(新羅)때 정승
- 김광수(金光粹) : 조선 연산군 당시(1500년경)유학자로서 일찍이 성균관에서 강학(講學)하다가 임란으로 피해 고향에 은거 영귀정(詠歸亭) 강학하고 후생을 양성하고 자손을 가르쳤음
- 김사원(金士元) : 퇴계 문하에 수학한 선비로 임란에 창의하였음
- 김사정(金士貞) : 김사원(金士元)의 계씨로 임란 때 곽망우호(郭忘優호) 따라 화각산성(火珏山城)에서 전공을 세웠음
- 류성용(柳成龍) :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 선생은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 선생의 외손자로서 1542년 사촌(沙村)에서 출생하여 퇴계 문하에 수학하고 임란 8년 풍진(風塵)을 치란한 이조 역대의 명신이며 이곳 출생의 가장 유명한 명현(名賢)이시다
- 김종덕(金宗德) : 퇴계학의 민원정통 퇴계(退溪) 이황(李滉) 일학봉(一鶴峯) 김성일(金城一) 경당(敬堂) 장환효(張奐孝)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천사(川沙) 김종덕( 金宗德) 완제(完濟) 류치명(流致明)등의 유학자로서 학문을 닦고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고 저서로서는 문집 10권 비롯 초려문탑(草廬問塔) 공내일통(孔內一統) 정본(政本) 고증(考證) 예서(禮書) 기타 저서 50여권을 서술하였음
- 김종경(金宗敬) : 김종발(金宗發) 김종변(金宗變) 김종신(金宗臣) 김종일 김종국(金宗國) 김종헌(金宗憲) 김종식(金宗軾)등 일문 종단이 대소등과로 대과 12명 소과 28명의 많은 유현 다재사 배출하였음
◇ 마을 주요 유래
- 가로숲 : 사촌(沙村)에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정착하여 서방 허(虛)를 막기 위하여 서삼(西森)을 조성하였는데 인공 조림으로 서는 가장 오래된 숲이다 (수종 상수리 나무 및 각종 괴목나무1km 경상북도 3등급 9호로지정)
- 지당(地堂) : 자연 호수로서 마을 중심지가에 있으며 지리학적으로 동리(洞里)가 화(火)혈이라 연못이 있어야 화재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전하고 있어 지금도 보전하고 있다
서변(西邊)리
◇ 연혁
- 원래 사촌(沙村)의 일부로 1350년 김구정(金九鼎)선비가 이 마을에 정착하였으며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동변(東邊)동의 서편이라 서변(西邊)이라 하였음
- 군조례 제1225호(1988. 5. 1)에 의거 리로 개편
◇ 명칭유래
- 원래 사촌의 일부였던 것이 인구증가로 분할하면서 동변(東邊)의 서편이라 하여 서변(西邊)으로 명명하였으며 1988.5.1의성군조례 1225호에 의거 리로 개편
▣ 김정중 - 발용 대부님 ! 대 단 히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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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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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익 - 사촌 정착 년대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수 있다,조선 시대에 와서 고려명신(후손)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국정에 참여를 위해 조치를 한 임금은 태종 때 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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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윤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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