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西峰 金思達과 書藝 12끝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2-10-15 04:14 조회1,935회 댓글0건

본문

西峰 金思達과 書藝 12끝





p366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그는 이따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배의 통증이 멎고 활동할 만하면 다시 일어나 붓을 잡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이제 그에게는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통증이 시작되어 진통제인 틴크를 복용하면 통증이 멎으면서 사르르 잠이 왔으므로 그 시간이 바로 잠자는 밤이었고, 깨어 있는 시간은 글씨 쓰는 활동시간으로서 그때가 밤이든 낮이든 상관없이 그에게는 그 시간이 곧 낮인 셈이었다.





그러는 사이 각 일간지에서는 김 박사가 위 수술 후 투병생활을 계속하는 가운데 마지막 작품으로 서화문집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11월초 <중앙일보>에서는 김 박사에 관한 특집기사를 마련하기 위해 사진 기자와 함께 문화부 기자가 찾아가 김 박사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김 박사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기자는 대문 앞에서 두서너 시간을 버티고 서서 가지 않고 졸라댔다.



부인마저 김 박사를 설득하고 간청하는 바람에 할수없이 김 박사는 인터뷰를 허락했다. 이때 그는 담담히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인데, 무엇인가 기념될 만한 것을 남겨 놓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서화문집의 발간과 개인서화전 개최계획을 밝혔다.



이 인터뷰 내용은 11월 3일자 <중앙일보> 사회란에 김 박사의 초췌해진 모습의 사진과 함께 <시한부 인생 사는 팔방미인 김사달 박사>라는 제호로 8단이나 되는 특종 기획기사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런데 다음달 4일부터ㅓ 그는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복통의 주기도 차츰 빨라지는 듯한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0일경에 그는 가까스로 서화문집의 편집을 모두 끝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 담은 그의 서화는 그가 일생동안 쓰고 그렸던 것의 몇십분의 1도 안 되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편집을 끝내고도 그것을 못내 아쉽게 생각했다.







앞서 필자(=박형규)는 그의 서예 작품 활동을 밝혔지만 그것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활동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미처 언급하지 못한 그의 작품 중에 주요한 것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서울 세검동에 있는 스카이파크 호텔 로비엔 가로 4미터 20센티에 세로 1미터 70센티나 되는 크기로 초서체의 <적벽부>를 쓴 그의 큰 글씨가 걸려 있다.



연세대학교에는 讀書有感이란 글씨가 전지 두 장의 크기에 씌어 걸려 있다.



대한의학협회의 대강당에는 주자의 秋日偶成의 시가 전지 석 장 크기의 지면에 씌어 걸려 있으며



속리산 관광호텔 로비에는 제갈공명의 出師表가 가로 4미터 20센티에 세로 1미터 70센티나 되는 크기의 글씨로 씌어 걸려 있다.



그리고 청주대학 도서관에는 敎學中庸이란 글씨가 전지 크기로 씌어 걸려 있으며



충북도지사실에는 그가 즐겨 썼던 소동파의 <적벽부>가 초서로 씌어진 대형 팔곡병풍이 펼쳐져 있다.



이 밖에도 그는 여러 사람에게 액자, 족자 혹은 병풍 등을 많이 써주었는데, 그런 것은 일일이 들어 말하기 어려울 만큼 수백 점에 달하고 있다.



또한 그는 비문과 현판 글씨도 많이 써서 남겨 놓았는데, 미처 언급하지 못한 것 중 주요한 것으로는

의사 청은공 유적비

강릉김씨 오효비

성암 어녕우 선생 유허비

운경 백순기 선생 묘비

육종관공 묘비 (육인수 의원의 선친 묘비)

백남욱공 묘비

진천에 있는 길상사 현판

경북 의성군에 있는 東華亭과 自餘堂의 현판

경북 안동김씨 문중의 念修齋 현판

대한의학협회와 서울간호전문대학의 간판

청주 상당산성의 각 문루의 현판과 상당공원의 표석 글씨

고향 괴산에 있는 읍취루와 사호정의 현판 등 100여 점의 비문과 현판 글씨를 남기고 있다.



그는 이중 어떤 것은 서화문집에 수록했으나 또 어떤 것은 탁본이나 사진이 없어 그 안에 담지 못해 안타까워 했다. 서화문집의 편집이 완료되자 김 박사는 부인을 시켜 그 원고를 경화오피스 인쇄소에 넘겼다.



<생략>







"내가 간 뒤라도 내가 쓰던 물건, 내가 가지고 있던 책 등을 묵적비 옆에 기념관을 하나 지어서 영구 보존하도록 해주오."

언젠가 김 박사는 이렇게 말했는데, 이것이 그의 유일한 유언이요 당부였다. 그러나 그의 이 유일한 유언은 그대로 지켜질 수는 없었다. 그의 뜻이 아무리 그러했더라도 그의 유물이 가치있게 활용되기 위해서는 대학 도서관에 기증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사후 그의 서적 2,500여 권은 청주대학교에 기증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연히 서봉 김사달 박사의 일대기 <영광은 햇빛처럼>을 구해서 너무나 감명 깊게 읽었고, 내용 중에 서예 관련 내용만 타이핑하여 소개하여 보았습니다. 앞으로 시간나는 데로 전국에 산재된 김사달 박사의 필적을 찾아 보고 촬영하여 모아서 별도의 자료집으로 만들어 내면 훌륭한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

▣ 김재원 -

▣ 태영/문 - 애쓰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감동적이엇습니다.

▣ 郡/김태영 -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수고 많으셨습니다.

▣ 김발용 - 소개덕에 귀한책 한권을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김항용 -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