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흔 장군 연기대첩사적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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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2-10-18 20:57 조회1,575회 댓글0건본문
<김흔 장군 연기대첩사적비 소개>
저의 서가에 있던 김흔장군비 제막식 유인물을 옮겨 적어 보았습니다. 비문 내용을 2001. 7. 25. 김주회님께서 본 홈 게시판에 올려 주시기도 했던 것입니다.
<연기대첩 사적비>(충남 연기군 서면 국촌리)
1) 사적비 제막식 일시 : 1997. 6. 28 2) 장소 : 충남 연기군(조치원) 서면 국촌리 3) 주최 :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4) 후원 : 연기군청, 조치원 문화원 5) 撰者 : 공주대학교 이해준 교수 6) 書者 : 충렬공 二十三대손 재산
7) 비문내용 기록 출전 : <김흔 장군 연기대첩 사적비 제막식>(1997. 6. 28) 행사 유인물
*비문 내용
1. 상부 : 金小斤將軍燕岐大捷事蹟碑
2. 하부 :
이곳 대박산 앞 정화산은 고려 충렬왕때 연기대첩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연기대첩은 고려 충렬왕때의 원나라의 반란군이었던 합단적이 고려로 쳐들어와 온 강토를 유린하다가 一二九一년(충렬왕一七) 五월 一일 이곳 연기 정화산에 침입한 것을 격퇴시킨 연기지역에는 역사상 그 유례가 없었던 대승첩이었다. 적의 침입에 고려와 원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五월 二일 동이 틀 무렵 정화산을 공격하였으나 적이 너무 강력하게 저항하여 우리 군사들이 두려워하고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에 김흔 장군은 "후퇴하는 자는 엄히 참하리라" 하고 앞장서 적의 에봉을 꺾고 진격하여 적을 크게 격퇴시켰다. 정화산 전투에서 패주한 합단적은 남북으로 도주하였다가 오월 팔일 전열을 재정비하여 연주산으로 다시 침략해 왔다. 연주산 전투에서는 한희유장군이 앞장서 적을 공격하여 격퇴하므로써 전후 二년여에 결친 합단의 침입은 종식을 고하였다. 이처럼 연기대첩은 합단적의 유린을 종식시킨 결정적 승전이었음에도 후대에 이 대첩을 기념할 어떤 유적도 남겨 놓지 못하였음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 연기대첩에 참여했던 김흔장군은 안동김문의 중시조인 충렬공 김방경의 둘째 아들로 비록 장군의 직계 후손들이 연기지역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연기대첩지의 역사성을 기리고 아울러 방계의 조상을 기리는 깊은 뜻으로 이 비를 새겨 멀리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一九九七년 五월 일. 공주대학교 교수 이해준 지음. 충열공 二十三대손 재산 씀. 안동김씨 연기 종친회 세움.
충렬공 휘 방경의 차자. 고려때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를 역임하였으며, 음보(蔭補)로 책정도판관(冊定都判官) 을 거쳐 장군이 되었다. 1272년 아버지 방경(方慶)을 따라 제주도에 가서 삼별초(三別抄) 를 토벌하고, 대장군(大將軍)에서 사재경(司宰卿)으로 전직했다.
1290년 합단(哈丹)이 쳐들어오자 이를 연기(燕岐)에서 격파하고, 죽전(竹田)에 이르러 나머지 적들을 소탕, 그 공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고 원(元)나라로부터 포상을 받았으며,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다. 뒤에 찬성사자의도첨의사사(贊成事咨議都僉議司事)에 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 김재원 -
▣ 김태서 - 사진 안보입니다.
▣ 솔내영환 -
▣ 김항용 - 죄송합니다. 다시 올렸습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감사합니다.잘 보았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우리나라 역사상 대첩이란 용어를 쓴 전투가 몇 안되는데. 연기대첩... 자랑스럽습니다.
▣ 김주회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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