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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관광 내년초 가능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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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1-05 17:26 조회1,7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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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관광 내년초 가능할 듯







(조선일보/정치)

현대아산 "北개성 관광 내년초 가능할듯" (2002.11.03)



개성관광이 빠르면 내년초부터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3일 “현재 북한측과 개성관광 시기와 절차 문제를 협의하고있다”면서 “경의선 철도와 도로가 연결되면 곧바로 개성관광을 시작하기로 양측 의견을 모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조만간 발표될 개성공업지구법에 개성 관광에 관한 조항이포함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와 북측의 계획이 차질없이 추진되고,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공사가 예정대로만 진행되면, 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이용한 개성관광은 내년초부터 가능할 것으로예상된다. 이 경우 개성관광은 금강산에 이어 북한관광 제2호가 된다.



남북은 현재 경의선 철도는 올해 안에, 도로는 내년 봄까지 완공한다는 목표로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개성관광 코스에는 개성의 옛 왕궁터 만월대, 선죽교, 성균관, 고려왕릉 등 유적지와 개성의 명물 송악산,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인 박연폭포 등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연합뉴스 심인성기자)













개성에는 우리 선조님들의 유허지가 많이 있습니다.





1. ★경순왕이 사셨던 만월대 옆 라왕소거인 유화궁 : 대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의 정승원),

宮東(궁동)의 甲第(갑제 ; 으뜸가는 집) 一區(일구)



2. 대안군 ★김은열의 묘가 있는 개성에서 북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종암 밑 오룡산 남쪽 기슭 임좌



3. 충렬공 ★김방경의 본댁이 있던 앵계리와 앞산 용수산, 그리고 오백나한당을 지은 보제사



4. 1942년(임오)에 문영공 ★김순의 묘지가 발견된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마산의 동쪽 기슭, 영돈의 문중에서 이미 장지를 德水縣 馬山 위에 잡아놓고---



5. ★김승용의 사저가 있던 고류동(孤柳洞)과 장례를 지낸 묵동(墨洞)의 북쪽 산 기슭



6. 양간공 ★김승택의 유택이 있던 개성부 선흥사 북서동



7. 문온공 ★김구용의 주거지 서재동과 초혼장을 지낸 개성부 禪興寺(선흥사) 北西洞(북서동) 佛堂峴(불당현), 이색과 함께 중흥시킨 개성 성균관



8. 두문동 72현의 한분인 안렴사공 ★김사렴의 은신처 두문동









삼국사기 권 제11(신라본기 제11) 경순왕.

--태조는 (특히) 교외에 출영하여 라왕을 위로하고 (그에게) 宮東(궁동)의 甲第 (갑제 ; 으뜸가는 집) 一區(일구)를 내리고 장녀 낙랑공주로써 그의 아내를 삼았다.



삼국유사 권 제2 김부대왕.

--태조는 신라의 국서를 받자 太相(태상) 왕철을 보내서 맞게 했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로 돌아가니 香車寶馬(향차보마)가 삼십여리에 뻗치고 길은 사람으로 꽉 막히고, 구경꾼들이 담과 같이 늘어 섰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하여 위로하고 대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의 정승원)을 주고, 장녀 낙랑공주를 그의 아내로 삼았다. 왕이 자기 나라를 작별하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다 해서 이를 鸞鳥(난조)에 비유하여 공주의 칭호를 神鸞公主(신란공주)라고 고쳤으며, 諡號(시호)를 孝穆(효목)이라 했다.



그가 백료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차와 보마가 30여리에 뻗쳤다 하며, 항복 후 왕 건에 의해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 받았으며 녹 1천석과 함께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사심관으로 임명되었고 왕 건 태조의 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 하였다. 경순왕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지 43년 후인 고려 경종 4년에 돌아 갔으며 경순이란 시호를 받았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신라경순왕릉

그리고 나서 왕(王)은 신하(新下)를 거느리고 서울(慶州)을 떠나 고려태조(高麗太祖)에게 귀부(歸附)하였다. 태조(太祖)는 궁동(宮東)의 갑제일구(甲第一區)를 주고 장녀(長女) 낙랑공주(樂浪公主)로서 그 아내를 삼게 하고 정승공(政丞公)을 봉하여 선일천석(線一千石)을 내리고 시종원장(侍從員將)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新羅)를 경주(慶州)라 고쳐 공(公)의 식읍(食邑)으로 하고 또 경주(慶州)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하였다.









▣ 안동김씨 익원공파보

29. 대안군 휘은열

은열공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이시며 벼슬은 공부시랑 평장사를 지내셨고 대안군에 봉해졌다.

고려 현종 19년 서기 1028년 3월 4일 己丑에 졸하니 묘는 개성에서 북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종암 밑 오룡산 남쪽 기슭 임좌에 모셨으나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이조영조 8년 서기 1784년 갑진에 황가 사람의 투장으로 인하여 誌石이 노출되고 많은 부장품이 현출되어 다시 치분하고 헌종 15년 기유 서기 1849년에 후손인 유수 金鼎集이 비문을 지어 비를 세우고 안동김씨와 경주김씨 두 종중에서 매년 기일에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국토가 분단되어 성묘의 길이 없고 수백만의 후손들이 오직 마음으로 추모할 따름이다.

자는 태화, 계령, 숙승, 렴, 갈이다.



<대안군 할아버지 묘소 위치 확인>

대안군 할아버지 묘소 위치는 郡/태영 아저씨의 도움으로 확인이 가능했습니다.

고암(鼓巖):용암산 오룡봉(五龍峯) 위에 있는데, 그 모양이 북[鼓]과 같으므로 고암이

라 하였다. 동림사(東林寺):용암산 오룡봉 아래에 있다.

---이상 郡/태영 현종 제공 자료



이는 곧 <용암산> 내에 <오룡봉(오룡산)>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송경지>와 <중

경지>에 <고암>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중경지>를 다시 살펴보니 <고암>에 대한 기록 바로 위에 <용암산>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또, <송경지>에는 지도가 실려 있지 않은데, <중경지>에는 개성 인근 지도가 실려 있습니

다. 그 지도를 다시 살펴보니 <용암산(湧巖山)>이 <오관산(五冠山)> 바로 동쪽에 붙어 있

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안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무렵인 고려 초기에 <종암(鍾巖)>으로 불리던 명칭이 세월

이 흐르면서 <고암(鼓巖)>으로 바뀐 듯합니다. 이 때문에 대안군 할아버지 묘소 위치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다음 소개하는 시를 살펴보면 이규보가 살던 앵계리 주변 지세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앵계 ★초당(鶯溪草堂) 앞에는 ★용수산(龍首山) ★곡령(鵠嶺)이 있고, 남쪽에 늙은 전나무가 많아 ★회동(檜洞)이라 일컬었고, 창문으로는★보제사(普濟寺)가 보이는 그런 곳입니다.



이곳은 충렬공 할아버지의 본댁이 있던 마을이고, 큰 아버지 김창의 절친한 친구였던 이규보가 살던 마을이므로 김창 선조께서도 이곳에 사셨거나 거주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친구를 찾아 자주 들렸을 것입니다.

또한 충렬공의 본댁이 있던 곳이므로 아버지 김효인께서도 사신 곳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해주의 신광사에 있었다고 하는 김방경찬 초당일기의 "초당"도 이곳 앵계리 초당을 뜻하는 것일 수 있고,

늙은 전나무가 많아 ★회동(檜洞)이라 불렀다 하는데, 현재 안동 풍산의 ★회곡동(檜谷洞)과 연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앵계(鶯溪) : 지안방(智安坊)이 있다. 두근원이 있으니 하나는 오공산(蜈蚣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용수산(龍首山)에서 나와 대천교(大川橋)에 이르러 합류하여 동쪽으로 개성부(開城府)앞을 지나 앵계(鶯溪)가 되고 서쪽으로 흘러 예성강이 된다.





충렬공과 보제사(普濟寺)

방경(方慶)은 왕(王),공주(公主)를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사용(使用)하는 그릇은 모두 새로만든 은(銀)그릇으로 하고, 잔치가 끝나자 그것을 모두 내탕(內帑)에 바쳤다. 또 오백나한당(五百羅漢堂)을 보제사(普濟寺)에다 지어 대단히 장려(壯麗)한 모습을 드러냈고 크게 법회(法會)를 열어 그 낙성식(落成式)을 거행 하였다.

달로화적(達魯花赤)과 양부(兩府)가 모두 모이고 도성(都城)의 사녀(士女)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 木+差 錄) 에서





<고려사 열전>

김방경이 일찍이 왕과 공주를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여 대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 사용한 은그릇들은 모두 새로 주조하여 만든 것이었는데 연회가 끝난 다음에 그것들을 내탕(內帑-국왕의 창고)에다 바치었으며, 또 보제사(普濟寺)에다 5백 나한당(五百羅漢堂)을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낙성식 때에 큰 술잔치 모임을 열었는데 달로화적과 양부(兩府-첨의부와 밀직사의 대신들)가 모두 여기에 참가하였으며 서울 안의 인사들과 부녀자들이 일시에 모두 모였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를 조소하였다.











김순 묘지명

대원 지치원년 신유 10월 14일 閔漬 찬

김순의 묘지는 1942년(임오)에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마산의 동쪽 기슭에서 발견되었다. 명문은 몇 군데 결락된 곳이 있으나 대부분은 훌륭하게 판독되어 있다.

영돈의 문중에서 이미 장지를 德水縣 馬山 위에 잡아놓고 장차 장례를 지내려고 하는데 나(=민지閔漬)는 그(=휘영돈)의 선친(=휘순)의 친구인지라 공의 行狀을 가지고 와서 銘을 지어달라고 간청함으로 내가 비록 병들었으나 굳이 사양치 못하고 받아서 명을 쓰노라.











김승용묘지명(金承用墓誌銘)

(--- 마 멸 ---) 천력<天曆, 원나라 문종(文宗)의 연호> 二 년 기사(一三二九)년 三월 갑술(甲戌)에 선수선무장군(宣授宣武將軍) 관고려국만호(管高麗國萬戶)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密直使)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상호군(上護軍) 김공이 표(表)를 받들고 원나라에 하례(賀禮)하고 돌아오다가 압록강을 건너면서 병에 걸려 신안(新安)의 여관에서 죽었다.

이달 경진(庚辰)일에 영구(靈柩)가 역마(驛馬)로 운송되어 서울에 들어와서 고류동(孤柳洞)에 있는 사저(私邸)에 빈청(殯廳)이 마련되었다. 다음 달인 四월 병신(丙申)일에 묵동(墨洞)의 북쪽 산 기슭에 장사 지냈다. 아아! 공의 휘(諱)는 승용(承用)으로 영가<永嘉, 안동(安東)의 고호>가 본관이다.











18,良簡公 諱 承澤 設壇墓碑文

부군의 관은 안동이요,호는 大菴, 諱는 承澤이니,고려국 직량동덕좌리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도첨의정승 永昌君 致仕하고 諡는 良簡이시다.

원래 유택이 개성부 선흥사 북서동이었으나 창상이 이변하고 병난이 중첩되어 후손이 선조의 체혼을 실전한지 오래였었다.









--충렬공(방경) 할아버지 주거지 앵계리, 문온공(구용) 할아버지 주거지 서재동이 금번 우여곡절 끝에 밝혀졌듯이 기왕에 개성, 개경, 송악, 황도 지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1. 문온공(구용) 할아버지의 초혼장을 지낸 개성부 禪興寺(선흥사) 北西洞(북서동) 佛堂峴(불당현),











6.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주변 출토 墓誌銘에 관심을



아래 열거하는 자료들을 보면 고려시대 墓誌들은 대부분 개성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다. 개성주변 연천에 능이 있는 경순왕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인 김은열, 김황 등의 묘지가 개성에서 발견된 바 있고, 충렬공 휘방경의 아들이신 문영공 휘순의 묘도 1942년(임오)에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마산의 동쪽 기슭에서 발견된 바도 있습니다.



따라서 경순왕에서 안동으로 이주하기전까지의 선조들(시조 휘숙승과 누락된 대수의 선조 등)의 묘와 충렬공이후 실전된 선조들(김선, 김흔, 김영후 등등등) 의 묘도 개성 주변에 있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충렬공의 부친때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고려가 망하는 충렬공의 현손대까지 중앙무대인 개성에서 활동하시고 묻히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경순왕에서 충렬공까지의 代數문제나 墓위치 문제를 해결할 마지막 남은 방법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주변에서 출토되는 墓地銘을 발견해서 기록을 얻어내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안타깝게도 북한에서 개성주변의 墓 등 고려유적이 도굴꾼들에 의해 초토화되고 있다는 일간지 기사를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 허흥식의 [한국금석학의 연구현황과 방향]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탁본보다 墓誌의 실물이 현존하고 있다. 墓誌는 일제시에 개성 부근의 고려고분에서 청자가 도굴당하는 과정에서 수습되었으며, 조사과정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본래 장서각에 誌石이 보존되었으니 誌石은 국립박물관으로 서책과 고문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분리하여 이전되었다. 장서각에 誌石이 보존되었을 시기에 학예관으로 있던 이난영 선생을 중심으로 이를 탁본하여 판독하고 그 결과가 한국금석문추보 (이난영, 한국금석문추보, 중앙대출판부, 1968) 로 간행되었다. 판독을 위하여 제작된 두 질의 탁본에서 한 질은 서울대도서관으로, 다른 한 질은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수장하였다.











▣ KBS 역사스페셜

○ 마의태자 편

"고려의 귀족들은 대부분 개성을 중심으로 살고 또 죽은 다음에도 예외없이 개성 주변에 묻힌다..경순왕 고려 건국당시라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후대에 볼대 경순왕도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생활하다 묻혀 그래서 무덤도 연천에 묻힌 걸로 생각한다."



○ [고려부인, 염경애] (방송 1999. 6. 19.)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고려시대 묘지석 대부분이 개성과 경기지방에서 출토됐다는 점이다. 무덤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는, 무신정권기 이전의 묘지석 100여개를 조사한 결과, 이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묘지석이 수도인 개경 근처에서 발견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려의 지배계층은 중앙에 거주함으로써 귀족적 특권을 누릴수 있었다. 중앙을 떠나 지방으로 가는 것은 고려시대 형벌로써 간주되었다 이런 사회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고려 귀족들은 살아서도 개성에 살았고, 죽어서도 개경주변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고 있습니다.











▣ 도굴꾼‘우굴’개성(開城)유적 초토화 (2002.01.22, 조선일보)



인구 15만의 도시 개성은 고려의 500년 역사가 숨쉬는 고도이자 북한에서 유물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개성은 곳곳이 벌집 쑤시듯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해야 했다.

식량난이 심화되자 전문 도굴꾼은 물론 일반 주민들까지 무덤파기에 나섰다고 한다. 주인 없는 오래된 묘는 물론 개성주변의 묘가 있을 만한 곳은 대부분 파헤쳐지게 된 것이다. 일반인들이 무덤에서 파낸 물건들은 현장에서 100∼500달러를 받고 넘길 수가 있었다.



전문 골동품 장사를 했던 이숙희(38·가명)씨에 따르면 도굴꾼들은 상당한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다. 옛날 사대부의 묘는 관을 묻을 때 흙을 채에 걸러 보드라운 흙만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관은 석비레(암석이 풍화돼 생긴 흙)와 생석회를 반죽해 콘크리트 치듯 밀봉하게 된다.



시멘트는 100년 정도 지나면 강도가 약해지지만 석비레는 100년이 지나도 더 굳어지는 특성이 있어 묘지에 안치된 물건들은 거의 원상 그대로 보존돼 있다. 도굴꾼들은 긴 쇠꼬챙이로 땅을 찍어 부드럽게 들어가면 일단 좋은 묘로 판정하며 갑자기 굳은 곳에 쇠꼬챙이가 부딪히면 관이 있는 곳으로 짐작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무덤이 파헤쳐지는데 주로 수집되는 골동품 가운데는 「고려청자」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백자」는 이에 비하면 값이 떨어진다. 청자 외에도 노리개·부채·병풍·그림 등 옛날 것이라면 모두 거간꾼의 표적이 된다.



이렇게 수집된 골동품들은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일부는 평양의 고려호텔 등에서 비밀리에 외국인에게 넘겨진다고 한다. 이렇게 밀반출된 유물들은 주로 일본인들이 수거해 갔다고 한다.







▣ 김윤만 - 과연 통제되지 않고 자유스럽게 관광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관심있는 부분이 다른 것 못지 않게 중요한데 말입니다.

▣ 김항용 - 잘 정리된 자료에 감사드립니다.

▣ 김재원 - 잘 보았습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빨리 통일이 되어 개성일대를 답사할 날을 고대해봅니다.

▣ 郡/김태영 - 많은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의 소원입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개성 전역이 훤해지네요.

▣ 김영윤 -

▣ 솔내영환 - 개성답사회원모집. 주관 안사연. 일시 2003년 0월 0일 숙식 제공. 이런 기사 날 날이 어서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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