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 김부와 태조왕건 (왕위 등극과 출생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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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8-30 06:42 조회2,528회 댓글0건본문
경순왕 김부와 태조왕건 (왕위 등극과 출생시기)
삼국사기에 의하면
경애왕이 죽자 견훤은 문성왕의 6세손인 金傅를 세워 나랏일을 대리하도록 하니, 이가 곧 신라 56대 경순왕이었다. 박씨왕 3년만에 다시 김씨가 왕으로 복귀한 것이었다. 김부는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 후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문1>
우선 떠오르는 궁금증은 견훤에 의하여 왕에 옹립되었다면 김부 및 그의 아버지인 김효종과 견훤과는 개인적으로 어떠한 관계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올 봄에 방영된 KBS1TV 태조왕건을 보면 김부의 아버지인 김효종이 902년(효공왕6) 대아찬으로서 집사성 시중이 되었고, 견훤의 첫 번째 대야성 공격때 이를 물리친 대야성주로 되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김부 부자와 견훤간의 친밀관계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신라 하대에 들어오면 왕위쟁탈전이 극심하게 전개되는데 김부가 왕으로 등극하기 전 왕들인 경명왕, 경애왕등은 박씨로서 왕건의 편에 섰다고 하는데, 신라의 왕위를 독차지해오던 (56왕중 38왕이 김씨임) 김씨 세력은 박씨의 반대세력으로서 후백제의 견훤편에 서게 되어,
견훤이 친왕건 세력인 박씨 세력을 제거하고 반대편인 김씨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김씨 중 한 사람인 김부를 왕으로 옹립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고,
또한 김부의 아버지인 김효종이 927년 11월 아들 부(경순왕)가 즉위함에 이르러 신흥대왕이라 추봉되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경순왕이 즉위하는 927년에는 아버지도 없고 나이어린 (힘이 없는) 김부를 왕위로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의문2>
경순왕의 출생경위나 출생시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추론해 볼 수 있는 자료로는
마의태자 유적지비 (소재지 : 인제군 남면 신풍리, 건립 : 1987년 10월 31일)에 보면 성이 김(金), 휘가 일(鎰), 자가 겸용(謙用)인 태자는 신라56대 경순왕과 죽방왕후(竹房王后) 朴氏사이에서 왕의 9남 3녀중 첫째 왕자로 917년에 태어났다. 라는 기록과
첫째아들 金鎰(김일)은 昭元王后 박씨 소생으로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자 이를 통분히 여겨 금강산에 들어가서 움막을 짓고 산 마의태자를 가리키는데, 기록에 보면 그에게는 입산 전에 낳은 金較(김교)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라는 기록으로 볼 때
장남인 마의태자가 917년에 태어났다면 이보다 20년전인 897년 전후에 경순왕이 태어났고 927년 왕위에 등극할 때는 30세 전후의 나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왕건에게 넘겨주고
장인인 1대 태조 왕건 877-943, 재위 918.6-943.5 (25년) 부인 29명 자녀 25남9녀
2대 혜종 왕무 912-945, 재위 943.5-945.9 (2년4월) 부인 4명, 자녀 2남3녀
처남인 3대 정종 왕요 923-949, 재위 945.9-949.3 (3년6월) 부인 3명, 자녀 1남1녀
처남인 4대 광종 왕소 925-975 재위 949.3-975.5 (26년2월) 부인 2명, 자녀 2남3녀
사위인 5대 경종 왕주 955-981, 재위 975.5-981.7, (6년2월) 부인 5명, 자녀 1남
기간 등 43년을 더 살다가 사위 경종이 왕으로 있던 경종3년, 서기로는 978년 4월 4일 고려 송도 신만궁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897년 전후에 태어나고 978년에 서거하였다면 80세가량 사신 것으로 계산해 볼 수 있습니다.
경순왕의 왕위등극 과정과 관련해서는 KBS1TV에서 방영되고 있는 역사스페셜
(http://www.kbs.co.kr/history)중 [2001.3.31 포석정은 놀이터가 아니었다.], [2000.4.15 신라최후의 미스테리, 마의태자]를 보면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고,
경순왕의 큰아버지인 김억렴과 아버지인 김효종 관련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백부 金億廉>
생몰년 미상. 신라 경순왕의 큰 아버지. 고려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의 아버지. 관등는 잡간이었고, 지대야군사를 지냈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대단히 기뻐하며 신라의 종실과 혼인하기를 원했다. 이에 경순왕은 그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을 천거해 왕건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욱으로 뒷날 그의 아들이 현종이 되어 신성왕태후로 추시하였고 욱을 안종으로 추봉하였다.
그런데 고려때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에는 "신성왕후 이씨는 본래 경주대위 이정언이 합주수로 있을 때에 태조가 이주에 거둥하여 비로 삼았으므로 혹은 합주군이라고도 하였다" 고 하여 신성왕후가 이정언의 딸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협주란 지명은 현종이 즉위한 뒤에 개칭된 것으로 이전에는 대량주군 또는 대야주군으로 불리었다는 점과 왕비를 군으로 책봉한 예가 고려시대에는 없었다는 것, 또한 왕대종록에는 태조의 후비가 25인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 29인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왕대종록의 기록은 따르기가 어려운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시대의 역사승계의식 (하현강, 이화사학연구8, 1975) <金東洙>
<아버지 金孝宗>
생몰년 미상. 신라말기의 화랑 대신. 아명은 化達 문성왕의 후손으로 서발한(이벌찬의 별칭) 仁慶의 아들이며 경순왕의 아버지이다. 그냥 孝宗郞이라고도 불린다.
화랑으로 있을 때 낭도로부터 분황사 東里에 사는 知恩이 그 부모를 극진히 섬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효성에 감복, 부모에게 청하여 조 100석과 의복을 보내어 지은의 살림을 돕게 하였다. 이에 그의 무리들 또한 곡식 1천석을 거두어 지은을 도와주었다.
이리하여 지은은 자신을 종으로 산 주인에게 곡식을 변상하여 줌으로써 양민이 되었다고 한다. 이 미담이 진성여왕에게 알려지자 왕은 지은에게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려주었으며, 병사를 보내어 그의 집을 지켜 주었다. 또한 뒤에 지은이 사는 동네에 旌門을 세워 孝養里라고 하였다 한다.
효종은 이 일이 인연이 되어 진성여왕의 조카, 즉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뒤 902년(효공왕6) 대아찬으로서 집사성 시중이 되었고
927년 11월 아들 부(경순왕)가 즉위함에 이르러 신흥대왕이라 추봉되었다.
한편 그의 이야기는 화랑동의 의협심을 나타내는 좋은 시례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李基東>
요새 방영되고 있는 태조왕건은 서기 925년을 지나고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927년 경순왕 등극과정 및 왕위과정, 태조왕건과의 관계등이 방영되겠죠.
경순왕과 관련된 기록은 복잡하고 수수께끼가 많습니다. 경순왕과 관련된 자료를 알고 계신 종친께서는 본 게시판에 알려서 서로 토론하고 검토하는 자리가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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