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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 김부와 태조왕건 ③ (신라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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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8-31 16:58 조회2,1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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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 김부와 태조왕건 ③ (신라의 멸망)



경순왕은 힘없이 나라를 유지하다가 이미 나라가 기울어 고려태조 왕건에게 신라를 넘겨주게 됩니다. 이 과정을 [삼국사기]와 [김씨의 뿌리] 등에서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 삼국사기>



9년(935)

▶ 왕은 땅을 들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9년(935) 겨울 10월에 왕은 사방의 토지가 모두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는 외롭게 되어 스스로 힘으로 안정시킬 수 없다고 여겨,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도모하여 땅을 들어 태조에게 항복하려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하고 어떤 이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왕자가 말하였다. “나라가 존속하고 망함에는 반드시 하늘의 명(命)이 있습니다. 단지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선비들과 더불어 합심하여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아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 한 이후에 그만둘 일이지, 어찌 1천 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외롭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형세를 보전할 수가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것도 없으니 죄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간(肝)과 뇌(腦)를 땅에 바르도록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서신을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왕자는 울면서 왕에게 하직하고 떠나 곧바로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11월에 태조가 왕의 글을 받고 대상(大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왕은 백관을 이끌고 서울에서 출발하여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아름다운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들이 30여 리에 이어져 뻗쳐 길을 꽉 메웠으며 구경하는 사람들은 담을 두른 듯하였다.



태조가 교외에 나가 맞이하여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가장 좋은 집 한 채를 내려 주었으며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12월에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으로 봉하고 지위를 태자(太子)보다 위에 있게 했으며, 봉록(俸祿) 1천 섬을 주었다. 시종(侍從)한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등용해 썼고 신라(新羅)를 경주(慶州)로 고쳐 공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처음에 신라가 항복하자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두터운 예로써 대우하고 사람을 시켜 고하였다. “지금 왕께서 나라를 나에게 주었으니 이는 큰 것을 주신 것입니다. 바라건대 [왕의] 종실과 혼인을 맺어 장인과 사위의 우호를 영원히 누렸으면 합니다.”



[경순왕이] 대답하였다. “나의 큰아버지 잡간(干) 억렴(億廉)은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인데, 그 딸자식은 덕과 용모 모두 뛰어났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집안 살림을 갖출 수가 없을 것입니다.”



태조가 마침내 그를 아내로 삼아 아들을 낳으니 이가 현종(顯宗)의 아버지로, [후에] 안종(安宗)으로 추봉되었다. 경종(景宗) 헌화대왕(獻和大王) 때 이르러 정승공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고 정승공을 상보령(尙父令)으로 봉하였다.



공은 송(宋)나라 흥국(興國) 4년 무인에 이르러 죽었는데, 시호를 경순(敬順)<또는 효애(孝哀)라고도 하였다.>이라 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시조로부터 이 때까지를 삼대(三代)로 나누었는데, 처음부터 진덕왕(眞德王)까지 28명의 왕을 상대(上代)라 하고 무열왕(武烈王)부터 혜공왕(惠恭王)까지 8명의 왕을 중대(中代)라 하였으며 선덕왕(宣德王)부터 경순왕(敬順王)까지 20명의 왕을 하대(下代)라 일컬었다.







사론(史論): 신라의 박씨와 석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고 김씨는 금 궤짝 속에 들어 하늘에서 내려왔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금수레를 타고 왔다고도 한다. 이것은 매우 괴상하여 믿을 수 없으나, 세간(世間)에서는 서로 전하여 그것을 사실로 여긴다.



정화(政和) 연간에 우리 조정에서 상서(尙書) 이자량(李資諒)을 송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는데, 신(臣) 부식(富軾)이 문한(文翰)의 임무를 띠고 보좌하여 따라갔다가 우신관(佑神館)에 나아가 한 집에 선녀상을 모셔둔 것을 본 적이 있다. 관반학사(伴學士) 왕보(王)가 말하기를 “이는 그대들 나라의 신(神)인데 공들은 그것을 아는가?” 하고는 마침내 일러주었다.



“옛날에 황실의 딸이 남편 없이 임신하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다 건너 진한(辰韓)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해동(海東)의 첫 임금이 되었고 황제의 딸은 지선(地仙)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仙桃山) 있었으니 이것이 그의 상(像)입니다.”



나는 또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의 동신성모(東神聖母) 제문(祭文)을 보았는데, 『어진 이를 낳아 나라를 처음 열었다.』는 구절이 있었으므로 동신(東神)은 곧 선도산의 신성(神聖)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 아들이 어느 때 왕노릇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지금 다만 그 시초를 추구해 보면, 위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하고 남을 위해서는 관대하였으며, 관직을 설치함에는 간략하게 하고 일을 행함에는 간소하게 하였다. 지극한 정성으로 중국을 섬겨 산 넘고 바다 건너 조회하는 사신이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았으며, 항상 자제들을 보내 [중국] 조정에 나아가 숙위하고 국학(國學)에 들어가 배우고 익혔다. 이에 성현의 풍습과 교화를 입어 거친 습속을 변화시켜 예의가 있는 나라가 되었다. 또 황제 군사의 신령스러운 위엄에 기대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차지하여 군현으로 삼았으니 융성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불교의 법을 신봉하여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다. 마을마다 탑과 절이 즐비하게 되도록 하고 백성들은 도망하여 승려가 되어, 병사와 농민은 점차 적어져 나라가 날로 쇠퇴해 갔으니, 어지럽게 되어 망하지 않기를 어찌 바라겠는가? 이러한 때 경애왕은 더욱이 노는 데만 빠져 궁녀와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놀며 주연을 베풀고 즐기다가 견훤이 이르는지도 알지 못했으니, 무릇 문 밖의 한금호(韓擒虎)와 다락 위의 장려화(張麗華)와 다름이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마지 못해서 한 것이지만 역시 칭찬할 만하다. 그때 만약 결사적으로 지키려고 힘써 싸워 왕의 군사에게 대항하였다가 힘은 꺾이고 세력이 다 되었다면, 반드시 그 종실(宗室)은 엎어지고 해(害)가 죄없는 백성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왕실의 창고를 봉(封)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귀순하였으니, 그것은 [고려] 조정에 공로가 있고 백성에게 덕이 있음이 매우 컸다. 옛날에 전씨(錢氏)가 오월(吳越)의 땅을 송(宋)에 바친 것을 소자첨(蘇子瞻)이 그를 충신이라 일컬었는데,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씬 넘는다. 우리 태조의 비(妃)와 빈(嬪)이 많아 그 자손 또한 번성한데, 현종은 신라의 외손에서 나와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에 왕통을 이은 사람은 모두 그 자손이니 어찌 음덕(陰德)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삼국사기 권 제12





九年 冬十月 王以四方土地 盡爲他有 國弱勢孤 不能自安 乃與下謀 擧土降太祖 臣之議 或以爲可 或以爲不可 王子曰 “國之存亡 必有天命 只合與忠臣義士 收合民心 自固力盡而後已 豈宜以一千年社稷 一旦輕以與人” 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乃使侍郞金封休 書請降於太祖 王子哭泣辭王 徑歸皆骨山 倚巖爲屋 麻衣草食 以終其身 十一月 太祖受王書 送大相王鐵等 迎之 王率百寮 發自王都 歸于太祖 香車寶馬 連亘三十餘里 道路塡咽 觀者如堵 太祖出郊迎勞 賜宮東甲第一區 以長女樂浪公主妻之 十二月 封爲正丞7)公 位在太子之上 給祿一千石 侍從員將 皆錄用之 改新羅爲慶州 以爲公之食邑 初 新羅之降也 太祖甚8)喜 旣待之以厚禮 使告曰 “今王以國與寡人 其爲賜大矣 願結昏於宗室 以永甥舅之好” 答曰 “我伯父億廉干 知大耶郡事 其女子德容雙美 非是無以備內政” 太祖遂取之生子 是顯宗之考 追封爲安宗 至景宗獻和大王 聘正承公女納爲王妃 仍封正承公爲尙父令 公至大宋興國四年戊寅 薨 諡曰敬順 一云孝哀 國人自始祖至此 分爲三代 自初至眞德二十八王 謂之上代 自武烈至惠恭八王 謂之中代 自宣德至敬順二十王 謂之下代云



論曰 新羅朴氏·昔氏 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而降 或云乘金車 此尤詭怪不可信 然世俗相傳 爲之實事 政和中 我朝遣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以文翰之任輔行 詣佑神 見一堂設女仙像 伴學士王曰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抵辰韓生子 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 今但原厥初 在上者 其爲己也儉 其爲人也寬 其設官也略 其行事也簡 以至誠事中國 梯航朝聘之使 相續不絶 常遣子弟 造朝而宿衛 入學而講習 于以襲聖賢之風化 革鴻荒之俗 爲禮義之邦 又憑王師之威靈 平百濟·高句麗 取其地 郡縣之 可謂盛矣 而奉浮屠之法 不知其弊 至使閭里 比其塔廟 齊民逃於緇褐 兵農浸9)小 而國家日衰 則幾何其不



亂且亡也哉 於是時也 景哀加之以荒樂 與宮人左右 出遊鮑石亭 置酒燕 不知甄萱之至 與夫門外韓擒虎 樓頭張麗華 無以異矣 若敬順之歸命太祖 雖非獲已 亦可嘉矣 向若力戰守死 以抗王師 至於力屈勢窮 則必覆其宗族 害及于無辜之民 而乃不待告命 封府庫籍郡縣 以歸之 其有功於朝廷 有德於生民 甚大 昔錢氏 以吳越入宋 蘇子瞻謂之忠臣 今新羅功德 過於彼 遠矣 我太祖 妃嬪衆多 其子孫亦繁衍 而顯宗自新羅外孫 卽寶位 此後繼統者 皆其子孫 豈非陰德之報者歟





三國史記 卷 第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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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原本 「承」, 三國史節要·高麗史에 의거 수정. 「承」과 「丞」은 同字.

▶ 8) 原本 「其」. 鑄字本에 의거 수정.

▶ 9) 鑄字本 「侵」. 朝·北·烈·浩 「侵」.











<▣ 김씨의 뿌리>



경순왕은 민심을 얻은 왕건에게 나라를 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국토의 태반을 잃은 상태라 나라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다. 더 이상 나라를 꾸려갈 만한 힘이 없었다. 경순왕은 신하들 앞에서 이같은 사정을 밝히고 나라를 고려에 바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신라의 국세를 바로잡기에는 때가 늦었다는 판단이 우세했으나, 신하들 가운데는 불가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태자 金鎰(김일)은 격분한 어조로 항의했다. "천년 사직을 어찌 남에게 내줄 수 있겠습니까? 민심을 수습하여 힘이 다할 때까지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경순왕의 생각은 단호했다. "아니다. 힘도 없이 나라를 지킬 수 있겠는가? 오히려 무고한 백성만 죽일 뿐이다. 나는 그런 참혹한 짓은 하지 못하겠다."



사실 힘이 기운 신라가 싸운다고 해도 나라를 보전할 가망은 없었다. 오히려 무고한 백성만 희생될 것이고, 까딱하면 종족의 멸망을 초래하게 될지도 몰랐다. 경순왕은 임금의 자리보다 백성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내 경순왕은 시랑 김봉휴를 불렀다. "그대는 국서를 가지고 고려 태조에게 가서 귀순하겠다는 뜻을 전하라." "네, 국서를 전하고 오겠습니다." 김봉휴가 고려로 떠났다.



이를 목격한 태자 김일은 울면서 아버지와 하직하고 곧바로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산속의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살며 초식으로 일생을 마쳤는데, 이 태자가 입고 있던 옷이 마의(麻衣, 삼베옷) 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마의태자 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라의 항복 서한을 받은 왕건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대상 왕철 등을 보내 경순왕 일행의 길안내를 맡게 했다. 뭇 신하를 끌고 신라를 떠난 경순왕의 행렬은 수레와 말이 30여리나 뻗칠만큼 굉장했다. 연도엔 호위병들이 주욱 늘어서고 행렬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왕건은 교외까지 친히 마중 나가 경순왕을 맞아들였다.



그는 경순왕에게 柳花宮 1區를 내어준 뒤 "지금 왕이 내게 주신 것이 심히 큽니다. 원컨대 왕의 종실과 혼인하여 장인과 사위의 의를 길이 맺고 싶습니다." 하고 자기의 장녀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경순왕은 그 뜻을 수락하고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나의 백부 김억렴 잡간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성품이 어질고 용모가 심히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는 궁실의 내정을 다스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왕건이 경순왕의 사촌 여동생에게 장가를 드니, 이가 신성왕후 김씨였다.



왕건은 경순왕을 고려의 正丞公에 봉했는데, 이것은 태자보다 서열이 한 등급 높은 것이었다. 또 그는 경순왕에게 녹 1천석을 주고, 기타 시종 원장도 다 채용하고 신라를 경주로 고쳐 이 땅을 경순왕의 식읍으로 주었다.



왕건은 신성왕후 김씨에게서 아들을 낳으니 이가 곧 顯宗의 아버지로 후에 安宗이라 추봉된 이다.



경순왕은 자신의 딸을 景宗에게 시집 보냈다.



이렇듯 고려의 왕실과 안팎으로 연을 맺어 울타리를 튼튼히 한 경순왕은 경종3년, 서기로는 978년 4월 4일 고려 송도 신만궁에서 숨을 거두었다.



경순왕의 장지를 신라 고도로 해야 한다는 조야의 여론이 일어 영구 행렬은 남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밑으로 내려갈수록 영구를 뒤따르는 신라 유민의 수가 불어났다. 인파에 놀란 고려 왕실에서는 더 이상 영구를 남하하지 못하도록 조처했다. 그래서 경순왕의 시신은 경기도 파주군 장단면 남팔리 성거산에 묻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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