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천 도원리 노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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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1-08 21:24 조회1,597회 댓글0건본문
병천 도원리 노은정
병천 도원리 출신 홍식, 성회, 태희 종친님 등 여러분께서 1997년에 노은정을 문화재로 지정추진하면서 1996년에 발간한 <노은정-우리고장 문화기행>에 도원리와 노은정에 관한 자료가 총 집대성되어 있습니다.
일요일 행사때 책자를 배부해 드릴 예정이며, 그중에서 도원리 입향조 및 김상기 공 관련 기록만 우선 소개해 봅니다.
■ 김상기 공의 병천 先系
산 높고 물 맑은 목천(지금의 병천)은 선인들의 얼과 숨결이 살아 숨쉬는 역사와 충절의 고장으로 충신과 명현을 많이 배출했다. 이 고장에 안동김씨 안렴사공의 후손들이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은 참봉 ★公彦공 으로부터이다.
공은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문무겸전의 찬란한 발자취를 남긴 忠烈 ★金方慶 장군을 중시조로 하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킨 안렴사 梧隱 ★金士廉의 6대손이다.
기개가 당당하고 문사가 풍부한 안렴사 梧隱은 공민왕 초에 급제했으며,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바른말 잘 하기로 유명했다. 조선이 선 뒤 이태조가 수차례 左司諫(좌사간)에 임명하려 했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청주에 은거했다.
임종하면서 자손에게 유언하기를 고려에서 벼슬한 사람은 조선에 나가지 말라하니 아들(=金 ★김약) 손자(=金遇周★김우주) 3대가 벼슬을 하지 않아 세상에서는 절의대가라 칭송하였다.
★金公彦 공은 조선 성종조에 문의현령이던 아버지 金 (★김지)와 어머니 진주유씨 사이에서 4남1녀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릇이 크고 총명하고 생각이 깊었으며, 모재 ★김안국과 함께 학문을 닦으며 벼슬이 동부참봉에 올랐다.
그러나 중종14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어진 선비들이 숨고 핍박을 당하자 조정의 어지러움을 한탄하며 출생지인 청주를 떠나 병천으로 옮겼다.
김공언 공은 병천에서 선산유씨를 부인으로 맞아 憙(희), 燾(도), 勳(훈), 煦(후)를 낳았다. 장남 ★희와 3남 군자감정 ★훈은 이곳 병천에, 차남 ★도는 부사직으로 삼척에, 4남 ★후는 영동에 삶의 터전을 닦아 지금까지 후손들이 그 곳에 살고 있다.
3남인 ★훈의 아들 ★孝吉은 1553년 예빈시 첨정에 올랐으며, (★옥)과 (삼수변+(★색) 두 아들을 낳았다.
★옥은 1618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도총부 도사로 훈련원정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에 큰 공을 세웠다. ★색은 학자로서 성품이 곧고 어질며 효심 또한 지극하였다. 호는 柯亭이다.
★옥의 아들 ★世厚는 벼슬이 우승지에 올랐고, 손자 鼎和, 鼎弼, 鼎佐는 당대의 문장가였다.
★정화는 과거를 일삼지 않고 경서에 힘써 행의를 닦고 자제에겨 孝友름 먼저 가르쳤다. 손자 ★命淵과 ★命涵은 예학에 밝았으며, (사람인변)★英의 아들 ★芝秀는 문장에 뛰어나 군수 ★조국인과 함께 대록지를 편찬했다.
★정필은 어릴적부터 학문에 부지런하여 문장과 글씨가 특출했으며, 손자 ★명집도 문사가 풍부했다.
★정좌는 종형 정화와 함께 한수재 ★권상하에게 성리학의 가르침을 받았고,판서 권상유가 벼슬할 것을 권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시인 ★이병연(=추사 김정희와 교유)과 함께 금강산에 올랐는데 정좌가 "金剛山夕陽影裡僧歸寺流水聲中馬渡橋"라고 시를 읊으니 이병연이 "나는 자네의 시를 도저히 따를 수 없다" 고 했다고 한다.
★색의 아들 ★志奭은 봉직랑이며,
그 아들 ★相器는 호를 老隱이라 하고 글로써 세상을 울렸다. 그는 일찍이 경한재 ★곽시징, 군수 ★김광수 (=석농 김광국과 교유)와 벗하며 지냈다.
숙종의 사액서원인 도동서원의 상량문을 쓰기도 하고, 말년에는 노은정을 지었으며, 또한 후진양성에 힘을 바쳤다.
공의 손자 ★錫泰, ★錫範, ★錫謙과 증손 ★宗洙도 글씨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5대손 ★達成의 부인 광산김씨는 남편이 병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나오는 피를 남편에게 먹여 3일이나 더 살게 했으며,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따라가니 세상 사람들이 열녀로 추증했다.
(이 내용은 대록지에 수록되어 있음)
*(사진) 노은 김상기 공이 터를 잡은 후 후손들이 350여년간을 살아오고 있는 가정(논정)마을
■ 노은정 기념비 비문
老隱亭은 1689년(숙종15)에 金相器 공이 지은신 도원8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이다.
공의 자는 鼎甫(정보), 호는 老隱, 본관은 안동으로 1639년(인조17 기묘)에 충청북도 청주에서 아버지 ★志亮과 어머니 행주기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숙부이신 ★志奭에게 입양하였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거족이니 고려명장 諡號 忠烈公인 諱 ★方慶의 15대 손이고, 이태조가 조선을 세우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고려의 충절을 끝까지 지킨 안렴사 梧隱 ★士廉의 11대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여 신동이라 불렸고 숙종때는 대학자로 명성을 떨치니 세상사람들은 공을 詩將軍이라 불렀다.
공은 이같은 학식과 인품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조정에서도 정5품의 통덕랑을 내렸으나, 공은 이를 사양하고 오직 시문학에만 전념하시니 선비들로부터 더욱 추앙을 받으셨다.
특히 영조대왕의 스승이신 ★郭始徵 선생과 목천군수인 ★金光遂 선생과는 친교가 두터웠다.
공은 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시며 후진양성에 힘을 아끼지 않으셨다.
50세 되던 해 정자를 짓고 현판과 바위 위에 老隱亭이란 이름을 친필로 새기시고 스스로 老隱居士라 하셨다.
1708년 (숙종34) 9월 18일 70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니 배위는 현감 홍우민의 따님인 恭人 남양홍씨로 슬하에 3남5녀를 두셨다.
공의 높은 학문과 선비로서의 고결한 인품을 사모하여 정조때의 명 문장가로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을 지낸 ★南公轍은 노은정 현판에 공의 행적을 기린 글을 남기셨고, 공의 손자 ★錫範은 老隱亭記를 지었다.
노은정은 북쪽으로 우뚝 솟은 작성산의 푸른 정기와 동성산의 줄기찬 기상을 이어받고 앞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금강상류 광기천의 맑은 물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이 뛰어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철마다 학생들의 자연학습도장이 되고 있다.
공과 노은정에 대한 이야기는 300년전에 발행한 大麓誌(대록지)와 근세에 발행된 팔도유람기, 지명총람, 이것이 한국이다. 천원군지 등에 소개되고 있다.
이에 후손들은 공의 얼이 담긴 자랑스런 유산을 잊을 길이 없어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자손만대에 전하여 가문의 영광과 긍지로 삼으려 한다.
1990년 3월 일
9대손 金聖會 글을 짓고 씀
후손일동 세움
뜻을 모아 주신 분
홍식 완회 영식 용훈 수회 성회
원묵 인회 용갑 성묵 태용 재호
주회 종식 용선 정묵 명식 재홍
외 19명
*김성회 (1947- ) 본관은 안동, 호는 柯川, 서예 명저
■ 전 설
노은정의 창건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정자의 터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유명한 지관을 불렀다. 처음에 명당으로 정한 곳은 銅城山 지맥의 정상이었다. 이곳에 定礎立柱하고 上樑까지 했는데 무슨 일인지 밤 사이에 모든 재목을 남김없이 뜯어서 이곳 검계변(현 위치)으로 옮겨 놓기 수 차례가 거듭되었다.
"이는 神靈의 소행이지 사람의 행위는 아니라" 하고, 지금의 위치에 터를 정하였다. 그러나 이 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 편의 건축도 할 수 없는 협소한 곳이었다. 후면에는 가파른 산줄기가 솟아있고, 그 기슭에는 한 덩이의 화강석 바위가 돌출되어 광기천에 뿌리를 박고 있으니 柱礎 한 개 놓고 기둥 하나 세울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괴이한 현실에 주저하여 役事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화강석 바위에 천수를 상징하는 거북의 像을 조각하고 길일을 택하여 山神과 龍神께 告由를 드리고 名工으로 하여금 설계를 하고 정자 짓는 일을 추진하였다. 이후 무사히 역사를 마치니 당시의 정자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솔내영환 -
▣ 김윤만 - 중학 2학년 역사시간. 선생님께서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를 비판하셨습니다. 그 때 짝궁 긍식이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에 너무 그러지 마세요"라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제 그 친구와 통화했는데 병천 노은정이 고향이랍니다. 안렴사공파라나요. 성회 님이 자기 누나 동창이라나 뭐라나 아믛튼 무지무지 반갑더라구요.
▣ 김윤만 - 탈자 : 성회 님 - 성회 형님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정중 - 이렇듯 좋은 기회에 다른 일과 겹쳐서 부득이 함께 하지 못 함을 심히 아쉽게 생각하옵니다 좋은 일정으로 마무리 되시길 빕니다 죄송합니다 ^^
▣ 김재원 -
▣ 김재이 - 잘읽었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흥미롭게 잘 보았습니다.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 郡/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 gwang10 -
병천 도원리 출신 홍식, 성회, 태희 종친님 등 여러분께서 1997년에 노은정을 문화재로 지정추진하면서 1996년에 발간한 <노은정-우리고장 문화기행>에 도원리와 노은정에 관한 자료가 총 집대성되어 있습니다.
일요일 행사때 책자를 배부해 드릴 예정이며, 그중에서 도원리 입향조 및 김상기 공 관련 기록만 우선 소개해 봅니다.
■ 김상기 공의 병천 先系
산 높고 물 맑은 목천(지금의 병천)은 선인들의 얼과 숨결이 살아 숨쉬는 역사와 충절의 고장으로 충신과 명현을 많이 배출했다. 이 고장에 안동김씨 안렴사공의 후손들이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은 참봉 ★公彦공 으로부터이다.
공은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문무겸전의 찬란한 발자취를 남긴 忠烈 ★金方慶 장군을 중시조로 하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킨 안렴사 梧隱 ★金士廉의 6대손이다.
기개가 당당하고 문사가 풍부한 안렴사 梧隱은 공민왕 초에 급제했으며,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바른말 잘 하기로 유명했다. 조선이 선 뒤 이태조가 수차례 左司諫(좌사간)에 임명하려 했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청주에 은거했다.
임종하면서 자손에게 유언하기를 고려에서 벼슬한 사람은 조선에 나가지 말라하니 아들(=金 ★김약) 손자(=金遇周★김우주) 3대가 벼슬을 하지 않아 세상에서는 절의대가라 칭송하였다.
★金公彦 공은 조선 성종조에 문의현령이던 아버지 金 (★김지)와 어머니 진주유씨 사이에서 4남1녀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릇이 크고 총명하고 생각이 깊었으며, 모재 ★김안국과 함께 학문을 닦으며 벼슬이 동부참봉에 올랐다.
그러나 중종14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어진 선비들이 숨고 핍박을 당하자 조정의 어지러움을 한탄하며 출생지인 청주를 떠나 병천으로 옮겼다.
김공언 공은 병천에서 선산유씨를 부인으로 맞아 憙(희), 燾(도), 勳(훈), 煦(후)를 낳았다. 장남 ★희와 3남 군자감정 ★훈은 이곳 병천에, 차남 ★도는 부사직으로 삼척에, 4남 ★후는 영동에 삶의 터전을 닦아 지금까지 후손들이 그 곳에 살고 있다.
3남인 ★훈의 아들 ★孝吉은 1553년 예빈시 첨정에 올랐으며, (★옥)과 (삼수변+(★색) 두 아들을 낳았다.
★옥은 1618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도총부 도사로 훈련원정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에 큰 공을 세웠다. ★색은 학자로서 성품이 곧고 어질며 효심 또한 지극하였다. 호는 柯亭이다.
★옥의 아들 ★世厚는 벼슬이 우승지에 올랐고, 손자 鼎和, 鼎弼, 鼎佐는 당대의 문장가였다.
★정화는 과거를 일삼지 않고 경서에 힘써 행의를 닦고 자제에겨 孝友름 먼저 가르쳤다. 손자 ★命淵과 ★命涵은 예학에 밝았으며, (사람인변)★英의 아들 ★芝秀는 문장에 뛰어나 군수 ★조국인과 함께 대록지를 편찬했다.
★정필은 어릴적부터 학문에 부지런하여 문장과 글씨가 특출했으며, 손자 ★명집도 문사가 풍부했다.
★정좌는 종형 정화와 함께 한수재 ★권상하에게 성리학의 가르침을 받았고,판서 권상유가 벼슬할 것을 권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시인 ★이병연(=추사 김정희와 교유)과 함께 금강산에 올랐는데 정좌가 "金剛山夕陽影裡僧歸寺流水聲中馬渡橋"라고 시를 읊으니 이병연이 "나는 자네의 시를 도저히 따를 수 없다" 고 했다고 한다.
★색의 아들 ★志奭은 봉직랑이며,
그 아들 ★相器는 호를 老隱이라 하고 글로써 세상을 울렸다. 그는 일찍이 경한재 ★곽시징, 군수 ★김광수 (=석농 김광국과 교유)와 벗하며 지냈다.
숙종의 사액서원인 도동서원의 상량문을 쓰기도 하고, 말년에는 노은정을 지었으며, 또한 후진양성에 힘을 바쳤다.
공의 손자 ★錫泰, ★錫範, ★錫謙과 증손 ★宗洙도 글씨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5대손 ★達成의 부인 광산김씨는 남편이 병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나오는 피를 남편에게 먹여 3일이나 더 살게 했으며,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따라가니 세상 사람들이 열녀로 추증했다.
(이 내용은 대록지에 수록되어 있음)
*(사진) 노은 김상기 공이 터를 잡은 후 후손들이 350여년간을 살아오고 있는 가정(논정)마을
■ 노은정 기념비 비문
老隱亭은 1689년(숙종15)에 金相器 공이 지은신 도원8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이다.
공의 자는 鼎甫(정보), 호는 老隱, 본관은 안동으로 1639년(인조17 기묘)에 충청북도 청주에서 아버지 ★志亮과 어머니 행주기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숙부이신 ★志奭에게 입양하였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거족이니 고려명장 諡號 忠烈公인 諱 ★方慶의 15대 손이고, 이태조가 조선을 세우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고려의 충절을 끝까지 지킨 안렴사 梧隱 ★士廉의 11대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여 신동이라 불렸고 숙종때는 대학자로 명성을 떨치니 세상사람들은 공을 詩將軍이라 불렀다.
공은 이같은 학식과 인품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조정에서도 정5품의 통덕랑을 내렸으나, 공은 이를 사양하고 오직 시문학에만 전념하시니 선비들로부터 더욱 추앙을 받으셨다.
특히 영조대왕의 스승이신 ★郭始徵 선생과 목천군수인 ★金光遂 선생과는 친교가 두터웠다.
공은 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시며 후진양성에 힘을 아끼지 않으셨다.
50세 되던 해 정자를 짓고 현판과 바위 위에 老隱亭이란 이름을 친필로 새기시고 스스로 老隱居士라 하셨다.
1708년 (숙종34) 9월 18일 70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니 배위는 현감 홍우민의 따님인 恭人 남양홍씨로 슬하에 3남5녀를 두셨다.
공의 높은 학문과 선비로서의 고결한 인품을 사모하여 정조때의 명 문장가로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을 지낸 ★南公轍은 노은정 현판에 공의 행적을 기린 글을 남기셨고, 공의 손자 ★錫範은 老隱亭記를 지었다.
노은정은 북쪽으로 우뚝 솟은 작성산의 푸른 정기와 동성산의 줄기찬 기상을 이어받고 앞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금강상류 광기천의 맑은 물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이 뛰어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철마다 학생들의 자연학습도장이 되고 있다.
공과 노은정에 대한 이야기는 300년전에 발행한 大麓誌(대록지)와 근세에 발행된 팔도유람기, 지명총람, 이것이 한국이다. 천원군지 등에 소개되고 있다.
이에 후손들은 공의 얼이 담긴 자랑스런 유산을 잊을 길이 없어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자손만대에 전하여 가문의 영광과 긍지로 삼으려 한다.
1990년 3월 일
9대손 金聖會 글을 짓고 씀
후손일동 세움
뜻을 모아 주신 분
홍식 완회 영식 용훈 수회 성회
원묵 인회 용갑 성묵 태용 재호
주회 종식 용선 정묵 명식 재홍
외 19명
*김성회 (1947- ) 본관은 안동, 호는 柯川, 서예 명저
■ 전 설
노은정의 창건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정자의 터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유명한 지관을 불렀다. 처음에 명당으로 정한 곳은 銅城山 지맥의 정상이었다. 이곳에 定礎立柱하고 上樑까지 했는데 무슨 일인지 밤 사이에 모든 재목을 남김없이 뜯어서 이곳 검계변(현 위치)으로 옮겨 놓기 수 차례가 거듭되었다.
"이는 神靈의 소행이지 사람의 행위는 아니라" 하고, 지금의 위치에 터를 정하였다. 그러나 이 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 편의 건축도 할 수 없는 협소한 곳이었다. 후면에는 가파른 산줄기가 솟아있고, 그 기슭에는 한 덩이의 화강석 바위가 돌출되어 광기천에 뿌리를 박고 있으니 柱礎 한 개 놓고 기둥 하나 세울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괴이한 현실에 주저하여 役事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화강석 바위에 천수를 상징하는 거북의 像을 조각하고 길일을 택하여 山神과 龍神께 告由를 드리고 名工으로 하여금 설계를 하고 정자 짓는 일을 추진하였다. 이후 무사히 역사를 마치니 당시의 정자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솔내영환 -
▣ 김윤만 - 중학 2학년 역사시간. 선생님께서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를 비판하셨습니다. 그 때 짝궁 긍식이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에 너무 그러지 마세요"라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제 그 친구와 통화했는데 병천 노은정이 고향이랍니다. 안렴사공파라나요. 성회 님이 자기 누나 동창이라나 뭐라나 아믛튼 무지무지 반갑더라구요.
▣ 김윤만 - 탈자 : 성회 님 - 성회 형님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정중 - 이렇듯 좋은 기회에 다른 일과 겹쳐서 부득이 함께 하지 못 함을 심히 아쉽게 생각하옵니다 좋은 일정으로 마무리 되시길 빕니다 죄송합니다 ^^
▣ 김재원 -
▣ 김재이 - 잘읽었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흥미롭게 잘 보았습니다.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 郡/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 gwang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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