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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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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1-15 07:04 조회1,6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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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부터 경기도 용인에 있는 한 연수원에서 2박3일간의 합숙훈련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일과를 모두 끝내고 자료실에 들어와 우리 홈에 들렸습니다. 별도 준비된 자료도 없고 해서 용인과 관련된 우리가문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끌어모아 보았습니다.





---경기도 용인에는 1985년도 통계로 393가구/1,702명의 우리 선안동김씨가 살고 계시고 (정보미님 제공자료)

---경기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는 우리 가문 집성촌이고 (김태서 종친님 제공자료)

---몽촌공 김수 공께서 임진왜란 당시 경기도 용인에서 패한 기록이 보이고 (디지털한국학)

---익원공파 김효건의 아들 김환 공이 경기도 용인에서 거주한 기록이 보이고 (조선 사마방목)

---유연재 김희수 공이 書한 대사간 이예견의 묘비가 용인군 기흥읍 지곡리 부아산 서쪽 계곡에 아들인 음애 이자묘역에 있고 (문화재청 홈, 용인시청 홈)

---유연재 아들이신 동고 김로가 書한 도정 윤진의 묘갈이 용인에 있다는 내용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안동김씨 게시판>

▣ 정보미 - 이 자료는 통계청 (http://www.nso.go.kr/)의 자료입니다. 통계청 홈페이지에서 "본관"으로 검색하시면 "성씨,본관별 가구 및 인구"수가 나와 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는 선.후 안동김씨 모두의 통계가 따로 나와 있지만, 선안동의 통계(95,736 가구/398,245 명)가 순수(1985년 조사.통계시 선.후를 확실히 나누어서) 한 선안동만의 통계인지는 알수없습니다

(선)안동김씨 행정구역별 가구 및 인구수(1985년통계)

용인군393 /1,702





<디지털한국학 홈>

김수(金#수51){4}

1547(명종 2)∼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홍도(弘度), 어머니는 ★이계백(李繼伯)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전라감사 ★이광(李洸)과 충청감사 ★윤국형(尹國馨)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켰을 때 겨우 1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가하였으나, 근왕병이 용인(龍仁)에서 왜군에게 패하자 경상우도로 되돌아가던 중 영남초유사(嶺南招諭使) ★김성일(金誠一)로부터 패전에 대한 질책을 받았다.

당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郭再祐)와 불화가 심하여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기는 하였지만,





<조선 사마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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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원) 김환(金) / 肅宗 15 增廣 進士

【시험년도】 숙종(肅宗) 15 (1689) 증광(增廣) 진사(進士)

【합격등위】 2등 0025

【본인성명】 김환(金)

【본인 자】 자중(子重)

【본인생년】 경인(庚寅) 1650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거주】 용인(龍仁)

【본인구존】 자시하(慈侍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김효건(金孝建)

【부친품계】 가선대부(嘉善大夫)

【부친관직】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

【안항(형)】 김호(金鎬), 김횡(金鐄), 김전(金鐫)

【안항(서형)】 김추(金錘), 김표(金)









김희수(金希壽){1}

1475(성종 6)∼1527(중종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몽정(夢禎), 호는 유연재(悠然齋). 할아버지는 감사 ★자행(自行)이며, 아버지는 ★숙연(叔演)이다.

(10-12)용인의 대사간 李禮堅(★이예견)의 비



東皐 金魯 1498(연산군 4)∼1548(명종 3)

1498(연산군 4)∼1548(명종 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참(景參), 호는 동고(東皐)이다. 대사헌 유연재(悠然齋) ★김희수(金希壽)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 · 서예가이다.

(11-6)용인의 도정 尹珍(★윤진)의 묘갈





<문화재청 홈>

종 목 시도기념물 172호

명 칭 음애이자묘역 (陰崖李자墓域)

분 류 묘

수 량 일원

지정일 2000.06.12

소재지 경기 용인시 ★기흥읍 지곡리 산11-17번지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한산이씨종중

관리자 한산이씨종중

조선 전기의 문신인 음애(陰崖) ★이자(1480∼1533)의 묘소이다.

연산군 7년(1501)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한 뒤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으나, 연산군의 어지러운 정치로 사직했다. 중종반정 이후 다시 관직에 기용되어 대사헌을 지냈으나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된 뒤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여 학문을 닦으며 남은생을 보냈다. 저서로는『음애집』,『음애일록』이 있다.



묘는 원형의 쌍분이고 봉분 앞에 묘비·상석(제사지낼 때 음식을 차려 놓도록 무덤 앞에 마련해 놓은 돌)·향로석·문인석 등이 있다. 주변 산줄기에 부친과 형제·자녀의 묘 등 상당히 많은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데 봉분과 석물(石物)이 잘 갖추어져 있고 외형상 비슷하다. 봉분 아래쪽에는 화강암질인 4매의 장대석이 있는데, 혼백이 드나드는 문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문화재명 음애이자묘역(陰崖李자墓域)

이자(李자)선생은 1480년(성종 11)~1533(중종 28)인물로 본관은 한산(韓山), 문신이고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이다. 1501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감찰(監察)을 지내고,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곧 이조좌랑에 올랐으나 연산군의 난정(亂政)으로 사직했다. 그후 1518년 종계변무주청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판윤겸 경연관에 올랐다.

기묘사화를 당하여 파직되자 용인, 음성, 충주 등지에 퇴거하여 학문을 닦으며 여생을 보냈다. 사후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문의(文懿)란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음애집(陰崖集)", "음애일록(陰崖日錄)"이 있다.



이자(李자)의 묘역(墓域)은 ★부아산(負兒山)의 서쪽 기슭에 위치하며 원형의 쌍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같은 산줄기에는 ★이자(李자) 묘(墓)를 비롯하여 ★이예견(李禮堅)(父), ★이운(李耘)(兄), ★이추(李秋)(子) 묘(墓) 등 상당히 많은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봉분과 석물(石物)이 잘 갖추어져 있는데 외형적으로는 차이가 나지 않고 거의 비슷하다. 묘역(墓域)에는 봉분을 비롯하여 묘비(墓碑)·상석·향로석·혼유석·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은 쌍분으로 높이가 약 200㎝쯤 되며 초취(初娶)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의영남씨(宜寧南氏)와 후취(後娶)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인천(仁川) 채씨(蔡氏)가 부장(葬)되어 있다. 다른 묘역과 함께 보존·관리도 잘되고 있다.



한편 봉분의 아래쪽에는 화강암질인 4매의 장대석이 설치되어 있다. 긴 방향으로 2매의 장대석 길이는 320㎝이고 양쪽 옆에는 1매이며 70㎝이다. 이것은 문비석(文扉石)으로 여겨지며 혼백이 드나드는 묘문(墓門)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 같다. 이러한 것은 조선(朝鮮)의 묘제(墓制)에서 찾아보기 드문 매우 희귀한 설치물이며 ★이예견(李禮堅)·★이운(李耘) 묘(墓)에도 설치되어 있다. 묘비(墓碑)는 묘역(墓域) 앞의 오른쪽에 위치하며 팔작지붕의 옥개와 장방형의 비신(碑身), 대좌(臺座)로 이루어져 있다. 화강암을 재질로 이용한 비신(碑身)은 그 크기가 140×60×20㎝이며 앞면의 비문은 「조선자헌대부의정부석참(朝鮮資憲大夫議政府石參) 찬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贊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 성시문의이공자지묘배증(成諡文懿李公자之墓配贈) 정경부인의영남씨후배증(貞敬夫人宜寧南氏後配贈) 정경부인인천채0씨부(貞敬夫人仁川蔡氏)」이다. 비신(碑身)과 같은 암질인 대좌(臺座)는 90×60×35㎝ 크기이다. 상석(上石)은 대리석을 재질로 이용하였고 115×80×55㎝ 크기이다. 문인석은 묘역 앞에 양쪽으로 1기(基)씩 있는데 크기는 높이는 180㎝, 너비가 55㎝쯤 된다. 두 손으로 홀(笏)을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다.





<용인시청 홈>

지정번호 : 기념물 제172호

지정년월일 : 2000. 6. 12

시대 : 조선 초기

소재지 : 기흥읍 지곡리 산 11-17

소유 : 사유

1480년(성종11년) - 1533년(중종28). 본관은 한산, 문신, 호는 음애이며 1501년 사마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뒤 감찰을 지내고 천추사의 서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곧 이조좌랑에 올랐으나 연산군의 난정으로 사직했다.

그후 1518년 종계변무주청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우참찬에 올랐다.

기묘사화를 당하여 파직되자 용인, 음성, 충주등지에 퇴거하여 학문을 닦으며 여생을 보냈다. 사후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문의란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음애집, 음애일록이 있다.

이자의 묘역은 부아산의 서쪽기슭에 위치하며 원형의 쌍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같은 산줄기에는 이자묘를 비롯하여 李體聖(부)묘등 많은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묘비. 상석. 향로석. 혼유석.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 인근에 이자의 사당과 고택이 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있다.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문화재자료) 제10호

지정년월 : 1999(1997.12)

시대 : 조선후기

소재지 : 용인시 기흥읍 지곡리 297-2

소유자 : 한산이씨 음애공파 종중

조선 종종 때의 명현(名賢) 이자(1480~1533)선생이 살던 곳이라 전해지는 고택이다. 원래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된 "ㄷ" 자형 본채 앞쪽으로 "ㅡ"자형의 행랑채가 있어 튼 "ㅁ"자 형식의 배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나 행랑채는 소실되었고 현재 본채만 남아 있다.

큰 사대부가에서는 별도로 사당이 있지만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은 이집에는 사당이 따로 지어지지 않고 본채 북서쪽에 청방이 있어 제사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다른 곳에는 아무 칠이 없는데 비해 이곳에만 단색으로 간단히 채색된 가칠단청이 베풀어져 있다.

본채는 서까래를 받치는 부재의 단면이 사가형으로 되어 있는 민도리 집인데 사랑채는 팔작 지붕이고 맞은 편 나뭇간은 맞배지붕으로 좌우 날개채의 지붕형태가 다르다.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의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내외가 사용하는 공간이 구분 되어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경기지역의 중류주택이다.





<디지털한국학 홈>

이예견(李禮堅)

1436(세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불린(不#인15). 색(穡)의 현손이다.

1471년(성종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475년 예문관의 대교로서 청악음주죄(聽樂飮酒罪)를 범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고신이등(告身二等)을 박탈당하였다.

그뒤 복직되어 1483년 사촌동서인 조익정(趙益貞)의 천거로 헌납이 되었다. 이어 소격서(昭格署)의 영(令)을 거쳐 이듬해에 지평이 되었다.

1490년 장령에 올라 영안도(永安道)의 안접종사관(安接從事官)으로 나갔고, 이듬해 수사헌부집의(守司憲府執義)를 거쳐 1493년 삼척부사로 나갔다. 강원도관찰사 이집(李#집10)이 공(公)을 먼저 하고 백성을 구휼함에 뜻을 둔 인물이라 상계하여 마침내 대사간으로 승진되었다.

연산군 때에는 홍귀달(洪貴達) 등과 함께 선조의 구신(舊臣)으로 관직에 있으면서 연산군의 난정을 좌시할 수 없다 하여 수차 상소하였으나, 결국 1504년(연산군 10) 유순(柳洵) 등의 탄핵으로 장 100대를 당하고 용궁(龍宮:경상북도 예천)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귀향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金春男〉





▣ 태영/문 - 대부님 교육 잘 끝내시고 무사히 귀가하시기 바랍니다.

▣ 김영윤 - 어디에 있으나 항상 안.사.연.홈을 생각하는 주회씨의 열의에 감동을 느끼며 찬사를 보냅니다

▣ 김윤만 -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 솔내영환 - 늘 옆에 있는 듯 하신 당신, 고맙습니다.

▣ 김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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