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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선생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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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2-11-23 18:15 조회1,6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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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선생 생가



독립기념관에서 동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동리의 뒷산에는 해마다 2월 중순경이 되면 7백여마리의



백로들이 찾아와 여름 한 철을 보내고 떠난다. 선생의 생가는 이 뒷산을 배경으로 마을 가운데에



있으며, 서향으로 독립기념관이 있는 흑성산 줄기를 바라보고 있다.



대지 800여평에 집 주위를 둘러싼 돌담이 있고, 북쪽 마당의 모퉁이에는 은행나무 고목이 있으며,



대나무와 아카시아 숲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일자형의 대문간채와 ㄷ자형의 안채가 조금



떨어져 ㅁ자형의 평면배치를 하고 있다.



안채는 각주를 사용한 납도리 홑처마 5량가구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깔았고



양측으로 각각 한 칸씩의 방이 있는데, 안채 동서로 3칸씩을 달아내어 방과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문간채는 3량가구 맞배집 5칸으로, 가운데 2칸은 약간 치우친 한 칸에 판장으로 된 대문이 있다.



그러나, 현재 건물의 벽채 및 창호 부분에 많은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원형으로 보기에는



힘들다. 이 집은 이동녕선생이 만주로 떠난 뒤 주인이 5번이나 바뀌었다고 한다.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호는 석오이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만주의 용정촌으로 망명하였고,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 · 김구 등과 비밀결사대인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10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 이회영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고, 1918년에는 상해 임시정부의정원 의장 ·



내무총장 등을 지냈다.



1924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군무총장을 겸임하였으며, 1927년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1928년 한국독립당을 만들어 이사장이 되었으나, 1940년 꿈에도 그리던 조국산천과 8 ·15광복의



감격을 맞이하지 못한 채 이국 땅 중국의 사천성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그의 묘소는 서울 효창공원에 안치되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영윤 - 발용.주회씨와 낮에 효창공원에 다녀왔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효창공원에서 이동녕 선생 묘소를 보았습니다. 백범 선생보다 몇살 연상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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