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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金時敏 장군 01 (출생과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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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1-30 02:11 조회1,8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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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金時敏 장군 01 (출생과 가계)





김시민 장군의 인간상

김준기 (아우내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1. 김시민의 출생과 가계



김시민의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勉吾(면오)이고 시호는 忠武이다. 서기 1554년(명종9년) 8월 27일 木川현 栢田동, 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잣밭마을에서 金忠甲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李成春의 따님이다.



서기 1592년 12월 26일 (註: 일부 기록에는 10월 18일) 진주성대첩의 영광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이때의 나이 겨우 39세였다. 비록 짧은 일생이었으나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일념으로 충의를 다한 장군이었다. 현재 진주의 彰烈사와 괴산의 忠愍사에서 제향이 봉행되고 있다.



김시민은 명문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고려의 충신 忠烈공 金方慶의 13세손이다.

부친인 金忠甲은 서기 1515년 서울의 終南산 하의 鑄字동에서 태어났다. 명가임을 알게 하는 김충갑 형제들에 얽힌 고사가 있어서 다음에 소개하고자 한다.



金忠甲은 생원 진사의 문과이고, 아우 孝甲도 생원 진사의 문과이며, 아우 友甲도 진사이고, 아우 悌甲도 문과이며, 아우 仁甲도 진사이다. 세상사람들이 일컫기를 "5甲이 紅牌 白牌로 9첩의 병품을 만들어 이름을 紅白屛(홍백병)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한번은 忠甲이 安岳(=?)군수로 있을 때 괴산에서 경사스러운 일로 조상의 묘소에 제향을 드리게 되었다. 그의 아우는 아산의 현감인 孝甲과 執義인 悌甲이 나와서 모였으나 그의 아들인 천안군수(=?)가 자리에 미치지 못하였다. 忠甲이 죄를 주려 하니 悌甲이 杖을 잡고 꿇어 앉아 이르기를 "군수 아버지가 군수 아들을 치죄하고자 하니 집의인 제가 감히 장을 잡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忠甲이 웃으면서 중지하였다. (국역 대록지 p91). 아름다운 일화로 전하여 오며 명가임을 알게 한다.



김시민은 후사가 없어서 장형인 時晦(시회)의 넷째아들 緻(치)를 양자로 하였으며, 손자인 得臣은 어릴 적부터 詩才가 뛰어 나더니 후일 문명을 날리는 시인이 되었다.



김시민의 외조부인 李成春은 참봉이었다. 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동에서 살았으며 재산이 심히 부유하였다. 정자와 연못과 歌童과 舞妓가 그 번화함을 다 하였다고 하며 백전동 지역의 한 언덕과 한 골이 그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었다. 金忠甲이 西原(=?청주목)으로 유배되어 이곳을 지날 때 마침 喪配(상배)하였었기 때문에 李成春이 여서(=사위)를 삼게 되었다.



김씨의 세거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국역 대록지 p87) 명가의 김충갑은 불우했던 시절에 재산가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김시민은 이곳에서 나서 자라면서 父(=김충갑), 祖(=김석)의 고향인 괴산을 왕래하면서 장성하였다.



후일 김시민의 논공에 대하여 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논쟁하여 오다가 110년만인 숙종조에 이르러 영의정 李濡(이유)의 장계에 의하여 김시민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상락부원군에 봉하게 되었으며 충무의 시호를 내리었다.



이러한 예우에 따라서 그의 조부와 부, 그리고 그 자손들에게도 모두 증직의 영예가 내려졌다. 또한 특별 사면권을 주는 鐵券(철권)을 내려 후손을 더욱 예우하였다. 국가에서 공신에게 이렇게 예우한 사례는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충무공 김시민 이후로부터 金緻(김치)와 金時讓(김시양)과 金徽(김휘)와 金素(김소)가 모두 都元帥(도원수)가 되었으니 한 堂內에서 5元帥가 나기는 옛적부터 드물게 있는 일이었다고 하였다. 충의로써 국가에 봉공하는 가문이 아닐 수 없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堂內라 함은 10촌 이내를 말하는 것 아닌가요?

▣ 김주회 - 윤만 형님! 감사합니다. 10촌 이내를 堂內라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생각없이 당내 당내 했었는데 이제는 제대로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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