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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2-10 04:55 조회1,572회 댓글0건본문
김성일 金誠一 [1538~1593]
조선 중기의 정치가 ·학자.
본관 : 의성
호 : 학봉
별칭 : 자 사순
활동분야 : 정치, 학문
출생지 : 경북 안동
주요저서 : 《해사록》 《상례고증》
본관 의성(義城). 자 사순(士純). 호 학봉(鶴峯). 안동 임하(臨河) 출생. 1556년(명종 11) 도산서원으로 가서 이황(李滉)을 만나 그 문하생이 되었다.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正字) ·대교(待敎) ·봉교(奉敎)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 ·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종계변무를 청하는 사행(使行)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사행 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1579년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해 함경도순무어사가 되어 영흥 ·함흥 ·삼수 ·길주 ·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나주목사가 되어 도내의 민폐를 해결하였다.
당시 김여물(金汝杖)이 순무어사로 나주에 파견되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9년 의정부사인(舍人)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현소(玄蘇) ·평의지(平義智) 등과 일본과의 통호문제를 의논하였고, 그해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사행에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1년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 발언 때문에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매도되었고, 왜란 초에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이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실제 황윤길의 발언이 있은 직후 조정은 각지에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는 등 급작스런 대비책을 강구하였는데, 이는 당시 민심을 상당히 동요시켰다. 이에 상소를 올려 오늘날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내치(內治)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왜란 초 경상도 일대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사태수습을 목적으로 다시 경상도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었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의병장으로 삼아 서로 협동하게 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뿌리고 군량으로 쓸 양곡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金谿)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고 조정에서 곽재우를 처벌하려는 기색이 있자, 양자를 화해시켜 이를 원만히 수습하기도 하였다.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며, 저서로는 《해사록(海錄)》 《상례고증(喪禮考證)》 《조선연혁풍속고이(朝鮮沿革風俗考異)》 등을 남겼고, 1527년 후손들에 의하여 문집 《학봉집》이 간행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곽재우 郭再祐 [1552~1617]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 : 현풍
호 : 망우당
별칭 : 자 계수, 시호 충익
활동분야 : 군사, 시
출생지 : 경남 의령
주요저서 : 《망우집》
본관 현풍(玄風). 자 계수(季綏). 호 망우당(忘憂堂). 시호 충익(忠翼). 의령(宜寧) 출생. 1585년(선조 18)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파방(罷榜)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義州)로 피난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592년 5월 함안군을 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솥바위나루)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홍의(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왜적을 피해 달아났던 감찰사 김수(金磎)와의 불화로 누명을 쓰고 구금되었다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장계(狀啓)로 석방된 후,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조방장(助防將)·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 임명되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하였고, 경상우도조방장(慶尙右道助防將)이 되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는데, 그 후 부총관(副摠管)·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함경도관찰사를 지내다가 당쟁으로 나라의 형편이 날로 어지러워질 뿐만 아니라,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죄없이 잡혀 올라오고 또 절친한 사이인 광주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휘말려 죽은 일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창암(蒼巖)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둔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필체가 활달하고 시문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망우집》이 있다. 일괄유물은 보물 제671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심대승 沈大承 [155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 청송(靑松)
호 : 이안(伊安)
별칭 : 자 덕보(德甫)
활동분야 : 군사
본관 청송(靑松). 자 덕보(德甫). 호 이안(伊安).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 ·군자감정(軍資監正) 등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의병을 일으켜 선봉장으로 왜병을 격퇴하고, 진주싸움 때도 구원군의 선봉장으로 참가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최강 崔堈 [?~?]
조선시대의 무신.
본관 : 전주
호 : 소계
별칭 : 자 여견, 시호 의숙
활동분야 : 군사
본관 전주(全州). 자 여견(汝堅). 호 소계(蘇溪). 시호 의숙(義肅).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균(均)과 함께 고성(固城)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워 오위도총부 경력(經歷)이 되고, 가리포 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에 승진, 화공법(火攻法)으로 왜적을 무찔러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었다.
광해군 때 충청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정치의 혼란으로 사퇴하였고, 그 후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또 사퇴하였다. 병조판서가 추증, 고성의 도천사(道川祠)에 배향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이달 李達 [1561~1618]
삼당파(三唐派) 시인으로 불리는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 : 신평
호 : 동리(東里)·서담(西潭)·손곡(蓀谷)
본명 :
별칭 :
국적 :
활동분야 : 한시
출생지 : 충청남도 홍주(현 홍성군)
주요수상 :
주요저서 : 《손곡시집(蓀谷詩集)》
주요작품 : 《습수요(拾穗謠)》《산사(山寺)》
주요업적 :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한시인(漢詩人)이다. 본관은 신평(新平)이고,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이며, 동리(東里)·서담(西潭)이라고도 한다. 충청남도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이첨(李詹)의 후손인 이수함(李秀咸)과 홍주 관기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시의 대가로 문장과 시에 능하고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신분적 한계로 벼슬은 한리학관(漢吏學官)에 그치는 등 타고난 재능에 비해 불우한 삶을 살았다. 어려서부터 책읽기에 힘써 이백(李白)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의 작품들을 모두 외울 정도였다. 시문에 뛰어난 정사룡(鄭士龍)과 박순(朴淳) 등의 문인(門人)으로, 특히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잘 지어 선조 때의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함께 삼당파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사화(士禍)와 당쟁, 임진왜란 등의 전란으로 어수선한 시대적 상황과 신분적 불만까지 겹쳐 젊은 시절의 시세계는 주로 방랑과 이별, 슬픔 등 인간 감정의 자연스런 발로를 중시하는 당풍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시적으로 승화시켜 초월의 경지를 보여주는 《산사(山寺)》《강행(江行)》과 같은 명시를 남겼으며, 당시 서민들의 누추한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습수요(拾穗謠)》 등의 정감어린 시를 지어 오늘날에도 공감을 얻고 있다. 서얼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벼슬길이 막힌 울분을 시문(詩文)으로 달래며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蓀谷里)에 은거해 호를 손곡이라 하고 제자교육으로 여생을 보냈다. 말년에는 허균(許筠)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을 가르쳤는데, 특히 허균에게는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허균은 스승의 전기로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집필했으며, 소설 《홍길동전》은 스승의 신분적 한계에 대한 불만을 대신 표현한 것이라고 전한다. 저서에 문집 《손곡시집(蓀谷詩集)》이 전한다. 이 문집은 제자 허균이 저본(底本)을 수집하고, 아들 이재영(李再榮)이 편차해 1618년경 간행한 초간본으로 한시(漢詩) 330여 수가 실려 있다. 1983년 11월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그의 시정신을 기리는 손곡시비(蓀谷詩碑)를 세웠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김주회 - 곽재우는 의성사촌의 김사원의 동생이신 김사정 김사형과 함께 화왕산성에서 의병활동을 하신바 있고, 이달 이라는 분은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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