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영통사 (靈通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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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2-11 17:20 조회1,762회 댓글0건본문
⊙ 영통사 (靈通寺 )
영통사지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오관산 기슭의 영통동(靈通洞)에 있었던 절. 1027년(현종 18)에 창건하였으며, 1036년(정종 2)에 왕이 자식 넷이 있을 경우에는 한 자식의 출가를 허락한다는 법을 제정한 뒤 이 절에 계단(戒壇)을 설치하고 경률(經律)을 익히는 한편 시험을 치르는 장소로 만들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1065년에 이 절에서 출가하였고, 그의 입적 후인 1125년(인조 3)에는 비를 이 절에 건립하였다. 고려 왕실에서는 다른 어떤 사찰보다 이 절에서 많은 참배를 갖게 되었다.
인종을 비롯하여 영종·신종·충렬왕·충선왕·공민왕 등은 자주 이 절에 행차하여 분향하였을 뿐 아니라 이 절과 인연이 깊은 왕들의 진영(眞影)을 모신 진영각을 두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절에서는 왕실에서 주관하여 재(齋)나 기신도량(忌晨道場)이 많이 개설되었다.
특히 인종은 이 절을 크게 사모하여 그 어느 왕보다 자주 행향(行香)하였는데, 1146년 정월에는 화엄회(華嚴會)를 열게 하고 친히 지은 불소(佛疏)를 신하들 앞에서 설하였다. 그러나 폐사시기에 관해서는 전혀 전래되지 않고 있다.
문화재로는 대각국사비명(大覺國師碑銘)을 비롯하여 서삼층석탑(西三層石塔)과 동삼층석탑 등이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절에는 고려 문종의 화상과 홍자번(洪自藩)의 화상이 있었다고 하며, 서루(西樓)의 경치는 송도에서 제일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 절을 대상으로 읊은 이규보(李奎報)·★김구용(金九容)·변계량(卞季良)·석월창(釋月窓)·권근(權近)·이원(李原)·성임(成任)·이승소(李承召) 등의 시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新增東國輿地勝覽, 韓國寺刹全書(權相老 編, 東國大學校出版部, 1979).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영통사 관련 시 한수 소개합니다.
▣ 김영윤 -
▣ 郡/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영통사지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오관산 기슭의 영통동(靈通洞)에 있었던 절. 1027년(현종 18)에 창건하였으며, 1036년(정종 2)에 왕이 자식 넷이 있을 경우에는 한 자식의 출가를 허락한다는 법을 제정한 뒤 이 절에 계단(戒壇)을 설치하고 경률(經律)을 익히는 한편 시험을 치르는 장소로 만들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1065년에 이 절에서 출가하였고, 그의 입적 후인 1125년(인조 3)에는 비를 이 절에 건립하였다. 고려 왕실에서는 다른 어떤 사찰보다 이 절에서 많은 참배를 갖게 되었다.
인종을 비롯하여 영종·신종·충렬왕·충선왕·공민왕 등은 자주 이 절에 행차하여 분향하였을 뿐 아니라 이 절과 인연이 깊은 왕들의 진영(眞影)을 모신 진영각을 두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절에서는 왕실에서 주관하여 재(齋)나 기신도량(忌晨道場)이 많이 개설되었다.
특히 인종은 이 절을 크게 사모하여 그 어느 왕보다 자주 행향(行香)하였는데, 1146년 정월에는 화엄회(華嚴會)를 열게 하고 친히 지은 불소(佛疏)를 신하들 앞에서 설하였다. 그러나 폐사시기에 관해서는 전혀 전래되지 않고 있다.
문화재로는 대각국사비명(大覺國師碑銘)을 비롯하여 서삼층석탑(西三層石塔)과 동삼층석탑 등이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절에는 고려 문종의 화상과 홍자번(洪自藩)의 화상이 있었다고 하며, 서루(西樓)의 경치는 송도에서 제일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 절을 대상으로 읊은 이규보(李奎報)·★김구용(金九容)·변계량(卞季良)·석월창(釋月窓)·권근(權近)·이원(李原)·성임(成任)·이승소(李承召) 등의 시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新增東國輿地勝覽, 韓國寺刹全書(權相老 編, 東國大學校出版部, 1979).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영통사 관련 시 한수 소개합니다.
▣ 김영윤 -
▣ 郡/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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