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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Re:동주(철원)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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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2-12-13 00:04 조회1,8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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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崔氏)의 유래와 본관





최씨는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이다. 최씨는 특유의 기개·신념·절조 등으로 ‘최고집’혹은 ‘최씨 앉은 자리에는 풀도 안난다’등 많은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최씨의 원조는 사로국 육촌(六村) 중의 하나인 돌산고허촌의 촌장이었던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최씨는 387본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시조가 분명하게 확인된 것은 43본이다.

《경주최씨상계세보(慶州崔氏上系世譜)》에는 소벌도리의 24세손인 최치원의 윗대에서 분파된 본관으로 개성, 삭녕, 동주, 전주가 있고, 최치원의 후대에서는 함양, 청주, 영흥, 충주,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 화순, 통천, 양천, 원주, 해주, 진주, 탐진, 전주 등으로 분파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를 원조로 하는 후예임이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동주최씨(철원최씨)



[유래]



시조 최준옹(崔俊邕)은 소벌도리의 25세손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공신 삼중대광 태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증손자 최석이 고려 문종 때 감수국사 삼수국 상서이부사를 지내고 동주(현 철원)에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동주로 하였다. 철원 최씨라고도 한다.



역사적주요인물



최석(崔奭)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본관은 동주(東州). 초명은 석(錫). 태조 때의 공신 준옹(俊邕)의 후손으로, 평장사(平章事) 유청(惟淸)의 아버지이다.

1051년(문종 5)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좌습유(左拾遺)를 지내고, 1075년 형부시랑으로 요나라에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한 뒤 귀국하여 전중감 지어사대사(殿中監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077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거쳐 1080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병마사가 되어 정주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였다.

1082년 이부시랑으로 지공거(知貢擧)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를 거쳐 1086년(선종 3)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이듬해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수국사(修國史)를 역임하였다.

1088년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로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 최사추(崔思諏)와 함께 을과 김부필(金富弼) 등을 시취(試取)하였다. 이어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예부사(守太保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禮部事)에 이르렀다. 최유선(崔惟善)·이정공(李靖恭) 등과 함께 당대의 문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시호는 예숙(譽肅)이다.



최선(崔詵)

?∼1209(희종 5). 고려의 문신. 본관은 동주(東州:鐵原). 태조 때의 공신 준옹(俊邕)의 후손이며, 평장사(平章事) 유청(惟淸)의 아들이다.

1178년(명종 8) 공부낭중으로 흥화도찰방사(興化道察訪使)를 겸임하였다.

1180년 우사간으로 명종의 아우인 원경국사(元敬國師) 충희(#충01曦)가 궁중에서 궁녀들과 음란한 행위를 한다고 탄핵하였다가 파면되었다.

1186년 판장작감(判將作監)이 되어 대사성 황보 탁(皇甫倬),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지명(李知命)과 함께 양공준(梁公俊) 등 22인과 명경(明經) 5인을 시취(試取)하였다.

1192년 판비서성사(判#비58書省事)로서 이부상서 정국검(鄭國儉) 등과 함께 《속자치통감 續資治通鑑》을 교정하고 이어 《태평어람 太平御覽》을 교정하여 간행하였다.

1194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지공거인 추밀원사 최유가(崔瑜賈)와 함께 진사(進士)를 취하고 김군수(金君綬) 등 31인에게 급제를 사(賜)하게 하였다.

1197년(신종 즉위년) 지추밀원사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였다.

1200년 수태부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守太傅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에 특진되고 이듬해 개부의동삼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上柱國)이 되었다.

1202년 식목도감사(式目都監事)로 활동하였으며, 1204년 당시의 집정자였던 최충헌(崔忠獻)과 함께 신종의 선위(禪位)를 의논하였다.

1209년 문하시랑평장사로 죽었다. 희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최증(崔#증11)

?∼1200(신종 3).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주(東州).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유청(惟淸)의 아들이다.

의종 때에 과거에 합격, 사경원판관(寫經院判官)을 거쳐 1172년(명종 2) 추밀원당후관(樞密院堂後官), 이어 권지각문지후(權知閣門祗候)·상의봉어(尙衣奉御)·예부낭중(禮部郎中)·기거사인(起居舍人) 등을 지냈다.

1186년 벼슬이 예부상서 동궁시학사(禮部尙書東宮侍學士)에 이르렀으며, 1188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만년에 불교에 심취하였으며, 동생들과 함께 유(儒)·문(文)에 뛰어나 함께 유종(儒宗)의 칭을 들었다.



최당(崔#당40)

1135(인종 13)∼1211(희종7). 고려의 문신. 본관은 동주(東州). 태조 때의 공신 준옹(俊邕)의 후손으로 평장사(平章事) 유청(惟淸)의 아들이다.

1171년(명종 1) 우정언으로 승선 이준의(李俊儀)와 문극겸(文克謙)의 대성(臺省)겸관을 사면(辭免)하게 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좌천되었다. 이어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郎)을 거쳐 1183년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여 오몽림(吳夢霖)·김우(金瑀) 등을 시취(試取)하였다.

1197년 참지정사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인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민공규(閔公珪)와 함께 진사 방연보(房衍寶) 등 30인을 뽑았다. 신종 때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가 되고, 1199년(신종 2)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太尉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쌍명재(雙明齋)를 설치하였고, 최선(崔詵)·장자목(張自牧)·고영중(高瑩中)·백광신(白光臣)·이준창(李俊昌)·현덕수(玄德守)·이세장(李世長)·조통(趙通) 등과 함께 기로회(耆老會)를 조직하여 시주(詩酒)로써 소일하니 당시에 지상선(地上仙)으로 불렸다. 시호는 정안(靖安)이다.



최린(崔璘)

?∼1256(고종 43). 고려의 관인. 본관은 창원(昌原). 평장사(平章事) 당(#당40)의 손자이다.

성격이 호탕하여 술과 놀이를 좋아하다가 30세에 이르러 과거에 급제, 대간을 거쳐 고종 때 나주부사로 나갔다.

이때 원율(原栗)의 이연년(李延年)이 자칭 백적도원수(百賊都元帥)라 일컫고 주군(州郡)을 침구하므로 지휘사 김경손(金慶孫)과 이를 쳐서 격파하고 그 공으로 우부승선에 특진되었다.

뒤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고종 때 몽고의 침입이 격화되자 고려에서는 왕자인 안경공 창(安慶公#창18)을 원나라에 보내어 군대철수를 청하자고 하였는데 고종은 윤허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끝까지 주장하여 설득시키고 원나라에 수행하였다. 앞서 왕족인 준(#준17)을 영녕공(永寧公)에 봉하여 애자(愛子)라고 속여 원나라에 보낸 일이 있었는데, 연경(燕京)에 있던 민칭(閔#칭01)이라는 자가 준은 친왕자가 아니라고 하여 문제가 생겼다.

이때 그는 애자란 아들과 같이 사랑한다는 뜻이고 아들이 아님을 변명하여 양국간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금의(琴儀)의 문생으로 동문 중에 현달한 사람이 많았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최평(崔坪)

1202(신종 5)∼1256(고종 43). 고려 고종 때의 문신. 본관은 동주(東州).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선(詵)의 손자이며, 좌복야(左僕射) 종재(宗梓)의 아들이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시어사(侍御史)에 올랐으나, 권신들이 싫어하여 정원부사(定遠副使)로 좌천되었다.

그뒤 형부낭중을 지내고 1254년(고종 41) 추밀원부사에 올랐으며, 이듬해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로서 기근구제에 힘썼다.







최온(崔溫)

?∼1268(원종 9). 고려의 문신. 본관은 동주(東州). 평장사(平章事) 유청(惟淸)의 증손으로, 좌복야(左僕射) 종재(宗梓)의 아들이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 1258년(고종 45) 추밀원사로 당시의 집정자인 최의(崔#의26)를 제거하려는 김준(金俊) 등의 모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아들인 견룡행수(牽龍行首) 문본(文本)이 중랑장(中郎將) 이주(李柱) 등과 함께 이 모의를 최의에게 밀고하였다. 최의가 제거된 뒤에 앞서의 밀고가 발각되어 김준과 유경(柳璥)이 문본을 죽이려 하였으나 왕이 이를 반대하고 귀양보냈다. 이에 대하여 원망하자 김준 등이 탄핵하여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그뒤 장군 이주인(李柱仁)의 청으로 풀려나와 1260년 추밀원사에 복직되고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를 역임하였다.

1262년 판공부사(判工部事), 이듬해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시호는 문신(文信)이다.



최문본(崔文本)

1233(고종 20)∼1276(충렬왕 2). 고려의 문관. 본관은 동주(東州).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郎平章事) 온(溫)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 되고, 견룡행수(牽龍行首)에 임명되었다.

1258년(고종 45) 김준(金俊) 등이 권신 최의(崔#의26)를 제거할 때 그 계획을 최의에게 누설하여 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아버지 온이 김준과 함께 거사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고 섬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 친종장군(親從將軍)을 역임하였고, 1271년(원종 12) 관노(官奴)인 숭겸(崇謙)과 공덕(功德) 등이 무리를 모아 다루가치(達魯花赤)와 국내의 관직에 있는 원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진도(珍島)로 도망가려고 하자 이들을 잡아 국문하였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승선이 되어 응방(鷹坊)의 횡포를 간하였으며, 1276년 밀직부사 판도판서(密直副使版圖判書)에 올랐으나, 이해에 죽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대신의 체모가 있었으므로 몽고의 사신이 “너의 나라에 이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있느냐?”라고 하였다 한다.





최옹(崔雍)

?∼1292(충렬왕 1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주(東州:鐵原). 초명은 기(夔), 자는 대화(大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유청(惟淸)의 증손이며, 영(瑩)의 할아버지이다.

집안이 대대로 문학으로 알려진 명문출신으로 성품이 근후하고 말이 적었다. 젊어서 학문을 즐기어 동지 10인과 함께 10년간 독서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몇 년이 못 되어 다른 사람은 모두 포기하고 갔으나 그는 홀로 힘써 배워서 읽지 않은 책이 없어, 당시 박학으로 일컬어졌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대관승(大官丞)을 거쳐 전리좌랑(典理佐郎)이 되었으며, 충렬왕은 태손(太孫) 때부터 맞이하여 사부(師傅)로 삼았는데 즉위함에 따라 국자사업(國子司業)을 지내며 《통감 通鑑》을 강론하였다.

이어 국학전주(國學典酒)·세자궁령(世子宮令)을 거쳐 1292년(충렬왕 18) 부지밀직사사 문한학사(副知密直司事文翰學士)에 올라 치사(致仕)하였다.





최운(崔雲)

1275(충렬왕 1)∼1325(충숙왕 12).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동주(東州:鐵原). 자는 몽수(蒙#수04).

아버지는 봉익대부(奉翊大夫) 문립(文立)이며, 어머니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홍진(洪縉)의 딸이다.

1289년(충렬왕 15) 15세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1296년에 도재고판관(都齋庫判官)에 보직되어 적(籍)이 내시에 속하였고, 1299년에 신호위별장(神虎衛別將)으로 견룡행수(牽龍行首)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에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에 임명되고, 1302년에 문관으로 회복되어 조현대부 군부총랑(朝顯大夫軍簿摠郎)이 되었다. 뒤이어 전리총랑 판사영서사(典理摠郎判司盈署事)로 옮기게 되었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에 또 무관직으로 바뀌어 좌우위대호군(左右衛大護軍)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나주목사가 되었다.

1312년에 철원부사를 거쳐 1314년에 공주목사로 옮겼고, 다시 철원부사를 지내다가 면직되었다.

1316년(충숙왕 3) 관직에 회복되어 정윤(正尹)에 임명되고 원윤(元尹)에 승직되었다.

1325년 통헌대부 지밀직사사 우상시 상호군(通憲大夫知密直司事右常侍上護軍)에 임명되었는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천성이 정직하고 진실하였으며, 평생 불교를 독실히 믿었다. 그는 첨의(僉議)였던 송빈(宋#분23)의 딸에게 장가갔으나 부인이 일찍 죽자 다시 임수(任綬)의 딸에게 장가갔다.





영비(寧妃)

생몰년 미상. 고려 제32대 우왕의 제2비. 본관은 동주(東州). 철원사람이며, 문하시중 최영(崔瑩)의 딸이다.

우왕이 최영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 시기는 1388년(우왕 14) 3월이었는데, 이때는 최영이 우왕을 옹립한 이인임(李仁任)과 그 일파를 점차적으로 정계에서 축출하고 명실상부한 일인집권체제를 구축하여 문하시중직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우왕은 최영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최영은 그 딸이 정실소생이 아니어서 왕비의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으나 우왕의 간곡한 설득에 못이겨 왕비로 들여보냈다.

이후 우왕은 최영의 집에 자주 내왕하게 되었는데, 이는 우왕이 최영과의 소원하였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영비의 혼인생활은 오래 가지못하였다.

3개월 후인 같은해 6월에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축출하고 최영을 감금, 처형하였기 때문이다.

우왕이 강화도로 유배될 때 영비는 같이 따라갔고, 이듬해 공양왕이 즉위한 뒤 우왕은 폐서인이 되고 곧이어 처형됨으로써 영비의 위치 또한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우왕과 창왕은 신돈(辛旽)의 후손이라 하여 위조(僞朝)로 폄하됨에 따라 우왕은 반역열전에 수록되고 왕비들은 《고려사》 후비전에 입전되지 못하였다.





최영(崔瑩 ) 고려말 유명한 충신 -- 생략







최남선(崔南善)

시대 항일기, 대한민국

생몰년 1890-1957(고종27-?)

본관 동주(東州)

자 공륙(公六)

호 육당(六堂)/한샘, 남악주인(南嶽主人)/곡교인(曲橋人)/육당학인(六堂學人)/축한생(逐閑生)/대몽(大夢)/백운향도(白雲香徒)

시호

활동분야 문화운동가, 작가, 사학자

다른 이름 창흥(昌興)







최두선(崔斗善) 근세인물. 전 국무총리











▣ 김항용 -

▣ 郡/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 태영/문 -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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