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Re:Re:Re:철원(동주)최씨 최종준과 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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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2-13 01:40 조회1,633회 댓글0건본문
철원(동주)최씨 최종준과 김방경
▣ 김방경 행장 (1350, 안진 발)
나이 16세가 되어 삼한공신 태사대광을 지낸 선조 日兢의 蔭補로 양온사 同正에 선임되었다가 다시 隊正이 된지 얼마 안되어 태자부 牽龍을 거쳐서 散員에 배명되고 식목綠事를 겸하게 되니 軍國의 중한 임무를 동료들이 다 양보하게 되었다.
그때 문하시중 ★최종준이 공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모든 일을 예로써 대우하고 중대한 일이 있으면 모두 公에게 맡기니 이때부터 그 명예가 세상에 뛰어나 외직으로 나가서는 서북면 병마綠事가 되고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別將이 되었다가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고종(高宗) 때에 나이 16세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되었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김방경에게 맡겼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09/25 19:06 (from:61.74.117.165) 조회 : 63
충렬공이 경순왕의 15세손이라는 자료 (3)
출처: 陽村(權近)先生文集 第 35卷
東賢史略
金中贊方慶
公字本然安東人祖敏成直史館父孝仁兵部尙書翰林學士
贈中書令新羅王金傅十五世孫也初仕爲式目錄事....
이하 생략(양촌집 35권 참조)
中贊 ★김방경(金方慶)
공은 자(字)는 본연(本然)이요, 본관은 안동(安東)이시다. 할아버지 민성(敏成)은 직사관(直史館)을 지냈고, 아버지 효인(孝仁)은 병부상서와 한림학사를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신라왕(新羅王)김부(金傅)의 15세손이다.
처음 벼슬은 식목록사(式目錄事)였는데,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埈)이 그의 충직함을 아껴서 요직을 맡겼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10/25 19:35 (from:211.219.48.20) 조회 : 45
충렬공 자료(10)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동국여지승람
안동대도호부
1229년(고종 16)에 음서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에 보임됨으로써 관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당시 시중 ★최종준(崔宗峻)은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사랑하여 예우하였으며, 큰일이 있으면 모두 맡겼다. 여러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검(監檢)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하였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은회 작성일 : 2002/08/11 22:37 (from:218.50.247.143) 조회 : 60
양촌 권근 선생 문집 중에서 동현사략(東賢事略)
중찬 ★김방경(金方慶) 공은 자(字)는 본연(本然)이요,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할아버지 민성(敏成)은 직사관(直史館)을 지냈고, 아버지 효인(孝印)은 병부 상서와 한림학사를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의 15대 손이다.
처음 벼슬은 식목 녹사(式目錄事)였는데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아껴서 요직을 맡겼다. 그 뒤로 내직(內職)ㆍ외직(外職)을 역임하면서 훌륭한 치적(治績)을 이루었다.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류선영, 1993, 전남대)
★김방경은 1227년(고종14) 16세의 나이로 삼한공신 태사대광 상서우복야였던 日兢의 음보로 吏屬 同正직인 양온사 同正으로 관계에 처음 나아갔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충렬공행장, 散員으로 처음 입사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가 처음 받은 실직이 종9품 대정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맨 처음 양온사 동정직으로 진출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어 그는 무반 실직인 隊正을 받았고 나아가 태자부 牽龍, 散員 겸 식목綠事에 임명되었다. 그는 무관직으로 출발하였으나 문하시중 ★최종준이 그를 예우할 정도로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는 선대의 후광아래 거듭 승진되었다.
이어 그는 서북면 병마綠事, 別將, 郎將 監察御使가 되었다.
1247년(고종34) 36세에 그는 서북면 병마判官으로 승진되었고,
이어 견룡행수, 유섭장군 겸 給事中 御使中丞, 大將軍, 지합문형부사, 金吾衛大將軍 등을 역임하였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충렬공행장>
이와 같이 최씨집권기에 그는 백부와 부, 그리고 철원최씨로 재추의 자리를 지켰던 ★최종준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0-101> 등의 비호아래 급속히 성장하였던 것이다.
1. 최씨무인정권과의 관련
★김방경이 최초로 관직을 받은 때는 1227년 (고종14) 인데, 이때 그의 나이 16세였고 최씨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는 대외적으로 고려와 몽고 간에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는 때였다.
1219년 (고종6년) 몽고의 공격에 쫓긴 거란인들이 고려의 강동성에 집결하였을 때 고려는 몽고와 연합하여 거란인들을 격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려와 몽고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으나 몽고는 고려에 막대한 양의 조공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한 고려측의 반감이 거세어지는 가운데 1225년 (고종12) 공물을 걷어 가던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변에서 살해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몽고가 외교를 단절함에 따라 고려는 몽고의 침입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처럼 전쟁이 준비되는 분위기 속에서 그는 음서로서 동정직을 받았고 이어 무반으로 진출하였다.
그가 관직을 받은 지 5년째인 1231년 (고종18) 마침내 고려와 몽고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몽고의 1차 침입을 맞은 고려는 1232년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고 장기항전을 준비하였다. <민현구, 몽고군 ·김방경·삼별초>
이로써 고려는 1259년 (고종46) 강화가 성립될 때까지 약 30년동안 6차에 걸쳐 몽고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최씨정권의 주도아래 항몽전쟁이 수행되는 이 시기에 ★김방경은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살펴 보자. 다음 사료를 보자
고종(高宗) 때에 나이 16세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되었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김방경에게 맡겼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 서북면 병마판관이 되었으며, ----- 중앙으로 돌아와 견룡행수가 되었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김방경은 시중 ★최종준의 사랑을 받아 감찰어사, 서북면 병마판관, 견룡 행수 등으로 주요 무반직에 빠르게 승진하였던 것이다.
★최종준은 철원최씨 가문으로 이 가문은 최씨 집권기에 6명의 宰樞를 배출하였으며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0-101> 최우는 바로 ★최종준의 조카 사위였다. 또한 ★최종준은 강화천도를 주도하는 등 최씨정권에서 절대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고려사 열전 권12 최종준전>
이러한 ★최종준이 그를 돌봐 주고 있을 정도로 그는 백부, 부친에 이어 최씨정권과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활동 중에서 최씨 정권과 결탁된 차원의 활동으로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다음의 사료는 그것을 말해 준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어떠한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재상이 권신(權臣-권이)에게 고소하여 이르기를 “이번 어사는 먼저 번 어사처럼 공무를 돌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김방경이 왔으므로 권신이 꾸짖으니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먼저 번 어사처럼 일하려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나 나는 국가 창고의 저축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고소한 자가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며 권신 역시 얼굴 색이 변하였다. <중략> ★김방경이 서울에 들어와서 견룡 행수(牽龍行首-의장병의 지휘관)로 되었는데 당시에 금위(禁衛-왕궁을 지키는 관원들)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권세 있는 집안에 가서 붙어 지내기 때문에 왕궁 수비는 아주 해이되어 있었다. ★김방경은 이러한 일을 대단히 분하게 생각하고 앓는 때에도 휴가를 달라고 요청하지를 아니 하였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및 고려사절요 권16 고종 35년 3월>
★김방경은 감찰어사로 있으면서 재상의 청탁을 거절하고 국고를 비축하려 하였고, 또 금위대로서 왕실 숙위에 적극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가 비록 최씨정권과 밀착되었지만, 그는 국가재정의 확보와 왕실의 보호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는 왕실을 정점으로 한 국가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생 략---
최씨정권 아래에서 최씨정권의 핵심인 ★최종준 등의 비호를 받는 ★김방경이 최씨정권의 정책에 호응하여 항몽에 노력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김방경은 국가재정과 왕실보호,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안정에도 적극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무인정권에 비판적인 왕실과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 최종준 崔宗峻 [?~1246]
고려 후기의 문신 ·의인(醫人).
본관 : 동주(東州)
별칭 : 시호 선숙(宣肅)
활동분야 : 정치, 의학
주요저서 :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
본관 동주(東州). 시호 선숙(宣肅). 1201년(신종 4) 문과에 장원, 고종 초 좌승선(左承宣)을 지냈다. 이어 추밀원지사(樞密院知事)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거쳐 1228년(고종 15) 문하성지사(門下省知事)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1242년 궤장(섟杖)을 하사받았다. 의학에 관심이 많아 그때까지의 의술을 연구, 한국 최초의 체계적인 의서를 펴냈다. 그 내용 일부는 조선시대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 남아 있다. 저서에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 2권이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郡/김태영 - 잘 읽었습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 김방경 행장 (1350, 안진 발)
나이 16세가 되어 삼한공신 태사대광을 지낸 선조 日兢의 蔭補로 양온사 同正에 선임되었다가 다시 隊正이 된지 얼마 안되어 태자부 牽龍을 거쳐서 散員에 배명되고 식목綠事를 겸하게 되니 軍國의 중한 임무를 동료들이 다 양보하게 되었다.
그때 문하시중 ★최종준이 공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모든 일을 예로써 대우하고 중대한 일이 있으면 모두 公에게 맡기니 이때부터 그 명예가 세상에 뛰어나 외직으로 나가서는 서북면 병마綠事가 되고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別將이 되었다가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고종(高宗) 때에 나이 16세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되었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김방경에게 맡겼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09/25 19:06 (from:61.74.117.165) 조회 : 63
충렬공이 경순왕의 15세손이라는 자료 (3)
출처: 陽村(權近)先生文集 第 35卷
東賢史略
金中贊方慶
公字本然安東人祖敏成直史館父孝仁兵部尙書翰林學士
贈中書令新羅王金傅十五世孫也初仕爲式目錄事....
이하 생략(양촌집 35권 참조)
中贊 ★김방경(金方慶)
공은 자(字)는 본연(本然)이요, 본관은 안동(安東)이시다. 할아버지 민성(敏成)은 직사관(直史館)을 지냈고, 아버지 효인(孝仁)은 병부상서와 한림학사를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신라왕(新羅王)김부(金傅)의 15세손이다.
처음 벼슬은 식목록사(式目錄事)였는데,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埈)이 그의 충직함을 아껴서 요직을 맡겼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10/25 19:35 (from:211.219.48.20) 조회 : 45
충렬공 자료(10)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동국여지승람
안동대도호부
1229년(고종 16)에 음서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에 보임됨으로써 관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당시 시중 ★최종준(崔宗峻)은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사랑하여 예우하였으며, 큰일이 있으면 모두 맡겼다. 여러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검(監檢)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하였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은회 작성일 : 2002/08/11 22:37 (from:218.50.247.143) 조회 : 60
양촌 권근 선생 문집 중에서 동현사략(東賢事略)
중찬 ★김방경(金方慶) 공은 자(字)는 본연(本然)이요,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할아버지 민성(敏成)은 직사관(直史館)을 지냈고, 아버지 효인(孝印)은 병부 상서와 한림학사를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의 15대 손이다.
처음 벼슬은 식목 녹사(式目錄事)였는데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아껴서 요직을 맡겼다. 그 뒤로 내직(內職)ㆍ외직(外職)을 역임하면서 훌륭한 치적(治績)을 이루었다.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류선영, 1993, 전남대)
★김방경은 1227년(고종14) 16세의 나이로 삼한공신 태사대광 상서우복야였던 日兢의 음보로 吏屬 同正직인 양온사 同正으로 관계에 처음 나아갔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충렬공행장, 散員으로 처음 입사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가 처음 받은 실직이 종9품 대정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맨 처음 양온사 동정직으로 진출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어 그는 무반 실직인 隊正을 받았고 나아가 태자부 牽龍, 散員 겸 식목綠事에 임명되었다. 그는 무관직으로 출발하였으나 문하시중 ★최종준이 그를 예우할 정도로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는 선대의 후광아래 거듭 승진되었다.
이어 그는 서북면 병마綠事, 別將, 郎將 監察御使가 되었다.
1247년(고종34) 36세에 그는 서북면 병마判官으로 승진되었고,
이어 견룡행수, 유섭장군 겸 給事中 御使中丞, 大將軍, 지합문형부사, 金吾衛大將軍 등을 역임하였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충렬공행장>
이와 같이 최씨집권기에 그는 백부와 부, 그리고 철원최씨로 재추의 자리를 지켰던 ★최종준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0-101> 등의 비호아래 급속히 성장하였던 것이다.
1. 최씨무인정권과의 관련
★김방경이 최초로 관직을 받은 때는 1227년 (고종14) 인데, 이때 그의 나이 16세였고 최씨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는 대외적으로 고려와 몽고 간에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는 때였다.
1219년 (고종6년) 몽고의 공격에 쫓긴 거란인들이 고려의 강동성에 집결하였을 때 고려는 몽고와 연합하여 거란인들을 격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려와 몽고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으나 몽고는 고려에 막대한 양의 조공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한 고려측의 반감이 거세어지는 가운데 1225년 (고종12) 공물을 걷어 가던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변에서 살해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몽고가 외교를 단절함에 따라 고려는 몽고의 침입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처럼 전쟁이 준비되는 분위기 속에서 그는 음서로서 동정직을 받았고 이어 무반으로 진출하였다.
그가 관직을 받은 지 5년째인 1231년 (고종18) 마침내 고려와 몽고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몽고의 1차 침입을 맞은 고려는 1232년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고 장기항전을 준비하였다. <민현구, 몽고군 ·김방경·삼별초>
이로써 고려는 1259년 (고종46) 강화가 성립될 때까지 약 30년동안 6차에 걸쳐 몽고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최씨정권의 주도아래 항몽전쟁이 수행되는 이 시기에 ★김방경은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살펴 보자. 다음 사료를 보자
고종(高宗) 때에 나이 16세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되었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김방경에게 맡겼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 서북면 병마판관이 되었으며, ----- 중앙으로 돌아와 견룡행수가 되었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김방경은 시중 ★최종준의 사랑을 받아 감찰어사, 서북면 병마판관, 견룡 행수 등으로 주요 무반직에 빠르게 승진하였던 것이다.
★최종준은 철원최씨 가문으로 이 가문은 최씨 집권기에 6명의 宰樞를 배출하였으며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0-101> 최우는 바로 ★최종준의 조카 사위였다. 또한 ★최종준은 강화천도를 주도하는 등 최씨정권에서 절대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고려사 열전 권12 최종준전>
이러한 ★최종준이 그를 돌봐 주고 있을 정도로 그는 백부, 부친에 이어 최씨정권과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활동 중에서 최씨 정권과 결탁된 차원의 활동으로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다음의 사료는 그것을 말해 준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어떠한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재상이 권신(權臣-권이)에게 고소하여 이르기를 “이번 어사는 먼저 번 어사처럼 공무를 돌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김방경이 왔으므로 권신이 꾸짖으니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먼저 번 어사처럼 일하려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나 나는 국가 창고의 저축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고소한 자가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며 권신 역시 얼굴 색이 변하였다. <중략> ★김방경이 서울에 들어와서 견룡 행수(牽龍行首-의장병의 지휘관)로 되었는데 당시에 금위(禁衛-왕궁을 지키는 관원들)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권세 있는 집안에 가서 붙어 지내기 때문에 왕궁 수비는 아주 해이되어 있었다. ★김방경은 이러한 일을 대단히 분하게 생각하고 앓는 때에도 휴가를 달라고 요청하지를 아니 하였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및 고려사절요 권16 고종 35년 3월>
★김방경은 감찰어사로 있으면서 재상의 청탁을 거절하고 국고를 비축하려 하였고, 또 금위대로서 왕실 숙위에 적극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가 비록 최씨정권과 밀착되었지만, 그는 국가재정의 확보와 왕실의 보호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는 왕실을 정점으로 한 국가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생 략---
최씨정권 아래에서 최씨정권의 핵심인 ★최종준 등의 비호를 받는 ★김방경이 최씨정권의 정책에 호응하여 항몽에 노력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김방경은 국가재정과 왕실보호,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안정에도 적극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무인정권에 비판적인 왕실과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 최종준 崔宗峻 [?~1246]
고려 후기의 문신 ·의인(醫人).
본관 : 동주(東州)
별칭 : 시호 선숙(宣肅)
활동분야 : 정치, 의학
주요저서 :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
본관 동주(東州). 시호 선숙(宣肅). 1201년(신종 4) 문과에 장원, 고종 초 좌승선(左承宣)을 지냈다. 이어 추밀원지사(樞密院知事)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거쳐 1228년(고종 15) 문하성지사(門下省知事)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1242년 궤장(섟杖)을 하사받았다. 의학에 관심이 많아 그때까지의 의술을 연구, 한국 최초의 체계적인 의서를 펴냈다. 그 내용 일부는 조선시대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 남아 있다. 저서에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 2권이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郡/김태영 - 잘 읽었습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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