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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김시민 장군 (문화재청 홈페이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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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2-24 07:11 조회1,8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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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홈>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1호

명 칭 ★김시민장군전공비 (金時敏將軍戰功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72.02.12

소재지 경남 진주시 본성동 499-1

소유자 국유

관리자 진주시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기록해 놓은 비로, 일명 ‘진주전성각적비(晉州全成却敵碑)’라고도 불리우며, 현재 진주성내에 비각을 마련하여 모시고 있다.



★김시민(1554∼1592)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비문에는 1천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10만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하나, 다른 기록에는 3,800여명의 병력이 왜군 2만여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물리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되어 있다.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길목이 되던 이곳을 지킴으로써 왜적의 호남진출을 막아내어, 불리했던 당시의 상황을 뒤집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비는 받침대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로, 조선시대 석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광해군 11년(1619) 7월에 비를 세웠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1987년에는 당시 전투에서 숨진 이들의 혼을 위로해주기 위해, 비의 뒷편에 ‘계사순의단(癸巳殉義檀)’을 건립해 놓았다.



문화재명 ★김시민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이 비는 임진왜란(壬辰倭亂) 3대첩(三大捷)의 하나인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장(主將)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새긴 것이다. 당시 ★김시민장군은 진주목사(晋州牧使)로서 판관(判官) 성수경(成守慶),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등과 함께 주도면밀한 작전을 펼쳐 왜적을 격퇴하였다. 비문에는 1천명도 되지 않은 병력으로 10만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나타난다. ★김시민장군은 적은 군사로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몰려오던 왜적의 예기(銳氣)를 꺾고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이곳 진주성을 사수(死守)함으로써 왜병의 호남진출을 봉쇄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우리측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고 전열을 가다듬은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광해군(光海君) 11년(1619) 7월에 세워졌는데, 성균관 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종 목 시도기념물 12호

명 칭 ★김시민장군충민사 (金時敏將軍忠愍祠)

분 류 사묘,제단

수 량 1동

지정일 1976.12.21

소재지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57

소유자 사유

관리자 김팽응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충무공 ★김시민(1544∼1592)과 충숙공 김제갑(1525∼1592)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김시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가 되어 사천, 고성, 김해 등지에서 적군을 대파하고, 진주성 싸움에서 3800여명의 병력으로 2만 대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김제갑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원주로 쳐들어오자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영원산성에 들어가 항쟁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그의 부인 이씨, 아들 김시백과 함께 순절하였다.



선조 때 이분들의 절개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





문화재명 ★김시민장군충민사(金時敏將軍忠愍祠)

이곳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을 세운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과 충숙공(忠肅公) 김제갑(金悌甲)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사당으로 조선(朝鮮) 선조(宣祖)때 건립하였다. ★김시민(1554∼1592) 장군의 자(字)는 면오(勉吾),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으로 선조 11년(1578)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 24년(1591)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사천(泗川), 고성(固城), 진해(鎭海)에서 적을 격파하고 영남우도(嶺南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올라 금산(錦山)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후 진주성 싸움에서 적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였다.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宣武功臣)의 호를 받고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김제갑(1525∼1592) 선생의 자(字)는 순초(順初), 호(號)는 의재(毅齋),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으로 명종(明宗) 8년(155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명종 10년(1555)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가 되고 병조좌랑(兵曹佐郎)을 거쳐 선조(宣祖) 14년(1581) 충청도(忠淸道) 관찰사(觀察使)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原州牧使)로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아들과 부인도 순절(殉節)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종 목 보물 952호

명 칭 광남군이광악선무공신교서 (廣南君李光岳宣武功臣敎書)

분 류 교서

수 량 1책

지정일 1988.06.16

소재지 충남 천안시 목천면 남화리 230 독립기념관

시 대 조선 선조

소유자 독립기념관

관리자 독립기념관



선조 37년(1604) 임진왜란 때 진주성 방어에 많은 공을 세운 이광악(1557∼1608)에게 상과 훈장을 내린 교서이다. 총 10면이며 각 면에 7행씩 총 62행으로, 재질은 명주이고 표지는 붉은색의 비단천이다.



이광악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지방에서 선봉에 나서서 왜군과 싸웠고, 적이 진주를 포위하자 진주성에 들어가 목사 ★김시민을 도와 적의 침공을 막아냈으며, 진주대첩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여기에는 이광악의 자질과 품성, 경력, 진주성을 방어하는데 그가 세운 무공과 공신에게 내리는 특전 등이 실려있다. 이 교서는 원래 한 장의 두루마리형태로 만들어져 있던 것을 후손들이 잘라서 앞뒤로 표지를 붙인 것이다. 크기는 가로 22.3㎝, 세로 41㎝이고, 교서지문면의 크기는 가로 22.3㎝, 세로 34㎝이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의 상황을 밝히고 공을 세운 사람에 대한 포상정도를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문화재명 광남군이광악선무공신교서(廣南君李光岳宣武功臣敎書)

이 공신교서(功臣敎書)의 형태(形態)를 보면 원래 한 장의 두루마리로 작성(作成)되어 있던 것을 후손들이 잘라서 첩장(帖裝)한 것이다. 총 10 면이며 매면(每面)에 7행(行)씩으로 안배하였는데 총 62 행(行)이다. 전곽(全郭)이 적사란(赤絲欄)으로 그어졌는데, 상(上) ·하(下)는 34 ㎝ 이고 매간(每間)은 2.5㎝ 이니, 폭은 총 175㎝ 정도로 추산된다. 총 62 행(行)에 걸쳐 해서(楷書)로 묵서(墨書)되었고, 말미(末尾) 연월일(年月日) 위에 정방형(正方形)의「시명지보(施命之寶)」란 어보(御寶)가 찍혀있다. 재질(材質)은 명주이고 표박(表박)은 적색(赤色)비단천으로 싸였다.



이 문서(文書)는 수급자(受給者) 이광악(李光岳) 이후 충북(忠北) 괴산군(槐山郡) 불정면(佛頂面) 삼방리(三訪里) 64 이주백(李柱白)(이종수(李鍾壽))씨 등 광남군(廣南君) 이광악(李光岳)의 후손가(後孫家)에 소장되어 오다가 1987년 2월 9일 독립기념관(獨立紀念館)에 제유물(諸遺物)과 함께 기증되어 현재 동관(同館)에 보관되어 있다.



이 문서의 내용은 만력(萬曆) 32년 즉 선조(宣祖)37년(1604) 10월에 국왕(國王)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특히 진주성방어(晋州城防禦)에 혁혁(赫赫)한 무공(武功)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인 광남군(廣南君) 이광악(李光岳)에게 내린 상훈교서(賞勳敎書)이다.



이광악(李光岳)(1557∼1608)은 자(字)는 진지(鎭之), 본관(本貫)은 광주(廣州), 교리(校理) 연경(延慶)의 손자, 군수(郡守) 호약(好約)의 아들이다. 선조(宣祖) 17년(1584) 무과(武科)에 급제(及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선조 25년(1592)에 곤양군수(昆陽郡守)가 되었다.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지방(嶺南地方)에서 선봉에 나서서 왜군과 격전하였고, 적이 진주(晋州)를 포위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으로 진주성(晋州城)에 들어가 목사(牧師) ★김시민(金時敏)을 도와 적의 침공을 방어하였고, 주장(主將)인 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전사한 뒤에는 제장(諸將)을 독려하는 한편, 모든 조처를 적의하게 처리하여 진주대첩에 큰 공훈을 세웠다. 선조 27년(1594)에는 곽재우(郭再祐)의 부장(副將)으로 동래(東萊)전투에 종군(從軍)하였고 이후 1백여 회의 싸움에서 선봉으로 적의 예봉을 꺾었으며 선조(宣祖)31년(1598)에는 전라병사(全羅兵使)로서 명군(明軍)과 합세(合勢)하여 금산(錦山) ·함양(咸陽) 등지에서 왜적(倭賊)을 무찌르고 포로된 우리 동포 1백여 명과 우마(牛馬) 등을 탈환하였다. 그 뒤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을 거쳐 선조 37년(1604)에 경기방어사(京畿防禦使)가 되고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等)으로 광남군(廣南君)에 봉해졌다. 선조 40년(1607) 함경남도병사(咸鏡南道兵使)를 지냈고 숙종(肅宗)14년(1715)에 충장(忠壯)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영정(影幀)이 전한다.



이 상훈교서(賞勳敎書)는 ‘교(敎)/ 효충장의선무공신가의대부광남군(效忠仗義宣武功臣嘉義大夫廣南君) 이광악서(李光岳書)’란 제하(題下)에 대개 5개 문단(文段)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공신(功臣)의 공적사례(功績事例)로 이광악(李光岳)의 자품(資稟), 역관(歷官)을 서술하고 이어서 이광악(李光岳)이 임란(壬亂) 때 진주성수어(晋州城守禦)에 진력(盡力)한 무공(武功)을 찬양하고 있다. 둘째, 공신(功臣)의 특전(特典)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等)인 이광악(李光岳)에게 내려지는 특전(特典) 및 상사(賞賜)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는데, 이광악(李光岳)은 초일계작(超一階爵)하고 부모(父母) ·처자(妻子)도 초일계(超一階)하며 적장세습(嫡長世襲), 유급영세(宥及永世)하는 이외에 반당 4인(人), 노비(奴婢) 7구(口), 구사(丘史) 2명(名), 전(田) 60결(結), 은자(銀子) 5량(兩), 표리(表裏) 1단(段),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상사(賞賜)하고 있다.



세째, 공신(功臣)과의 서맹(誓盟)으로 태상시(太常寺)에서 기적(紀績)하고 철권(鐵券)을 내리니, 충정(忠貞)을 독실히 하여 총명(寵命)을 보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네째, 선무공신(宣武功臣)의 명단으로 1등에 이순신(李舜臣) 등 3인(人), 2등에 신점(申點) 등 5인(人), 3등에 정기원(鄭期遠) 등 10인(人)을 적고 있는데 이광악(李光岳)은 3등 5번째에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 사실증명(事實證明)으로 ‘만력삼십년(萬曆三十年) 십월 일(十月) 일(日)’이라 하여 공신교서 (功臣敎書) 반급년월일(頒給年月日)을 적고 그 위에 새보(璽寶)를 찍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평정(平正)에 큰 공훈을 세운 이들에게 내려진 훈호(勳號)는 선무(宣武) ·호성(扈聖)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당시 훈호심정시(勳號審定時) 정왜제장(征倭諸將) 및 원병(援兵)과 양곡(糧穀) 요청을 위해 명(明)에 왕래(往來)한 사신(使臣)으로서 유공(有功)한 자에게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서울에서 의주(義州)까지 왕(王)을 시종 수종(隨從)하며 유공(有功)한 자에게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책록(策錄)하였다.



조선개국 이래 태조(太祖)1 년(1392)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을 비롯하여 공신책봉(功臣冊封)의 마지막인 영조(英祖)4년(1728) 분식공신(奮武功臣)에 이르기까지 약340 년간에 총 28회의 공신이 책록(策錄)되었는데, 그중에 선무(宣武) · 호성(扈聖) 양공신(兩功臣)은 외(外)(왜(倭))적(敵)을 물리치고 실토(失土)를 회복(恢復)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특히 중요시되고 있다. 현재 역대의 공신록권(功臣錄券)(원종공신(原從功臣)) 또는 공신교서(功臣敎書) 등 공신에 관한 문서(文書)(적(籍))으로 국가지정문화재(國家指定文化財)로 지정(指定)된 것으로는 국보2건, 보물약 10건 정도에 불과한데, 임란(壬亂)의 것으로 호성공신교서(扈聖功臣敎書)는 유성룡(柳成龍), 고희(高曦), 이충원(李忠元)에게 내려진 것이 보물460호 739호, 874호로 각각 지정된 바 있고, 선무공신교서(宣武功臣敎書)는 선무(宣武) 2등 권응수(權應銖)에게 내려진 것이 보물668호(일괄(一括))로 이미 지정되었으며, 원균(元均) ·이운용(李雲龍)에게 내려진 것도 원씨(元氏), 이씨(李氏)의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한다.



이 공신교서(功臣敎書)는 조선조 공신연구(功臣硏究) 및 임란사연구(壬亂史硏究)에 매우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이광악(李光岳)의 전기자료(傳記資料)이기도 한데, 이광악(李光岳) 관계 유물(遺物)로서 이 공신교서(功臣敎書) 이외에도 강희(康熙)54년(숙종(肅宗)41년 ,1715)에 발급(發給)된 이광악(李光岳)의 증시교지(贈諡敎旨), 광남군(廣南君) 이광악(李光岳)의 시상(諡狀)(강현(姜현) 찬(撰)), 보검(寶劍)1점 이광악(李光岳)의 영정(影幀)도 함께 독립기념관(獨立紀念館)에 기증(寄贈)되어 같이 보관되고 있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2호

명 칭 촉석정충단비 (矗石旌忠檀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72.02.12

소재지 경남 진주시 본성동 499-7

소유자 국유

관리자 진주시



촉석광장 안의 정충단에 서 있는 비로,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충절을 다한 이들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과 비몸을 하나의 돌로 조각하였으며, 그 위로 머릿돌을 얹어 마무리하였는데, 머릿돌이 유난히 커서 전체가 사다리꼴로 보인다. 머릿돌은 두 마리의 용이 구름속에서 여의주를 놓고 서로 다투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고, 그 밑면에 꽃을 조각하여 이채롭게 장식하였다.



비문은 아래쪽이 닳아서 그 부분만 판독하기가 힘들 뿐 대체로 양호하며, 『조선금석총람』에 그 기록이 실려있다. 주로 진주성에서 싸우다 숨진 이들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그들의 뜻을 기리고 있으며, 특히 3장사(三壯士)라 일컫는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을 그 대표적인 인물들로 꼽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정충단은 이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숙종 12년(1686)에 마련한 제단으로, 비도 이때 함께 건립되었다. 비문은 이민서가 글을 짓고, 신익상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만중이 썼다. 비의 옆에는 제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장군전공비(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호)가 함께 서 있다.



문화재명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

이 비는 조선(朝鮮) 선조(宣祖) 26년(1593) 6월 19일∼29일 사이에 있었던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三將士)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 및 군·관·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정충단의 비석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戰列)을 정비하지 못한 우리는 한동안 육지의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우리 군대가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왜적을 제압하자, 수세에 몰린 적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아군의 10배에 가까운 병력으로 일대 반격을 펼쳤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싸움(1592년 10월 5일∼10일)이다. 그들은 이에 대한 보복전을 시도, 토요토미(豊臣) 히데요시(秀吉)의 특명(特命)에 의해 가토오(加藤) 키요마사(淸正), 코니시(小西) 유키나가(行長) 등이 이끄는 왜군 최정예(最精銳)의 대군을 편성하여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이때 삼장사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관·민은 압도적인 적세에 두려움 없이 맞서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숙종(肅宗) 12년(1686)에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해 촉석루 동쪽에 정충단을 세운 것이다.









종 목 문화재자료 5호

명 칭 창열사 (彰烈祠)

분 류 사묘재실

수 량 7동

지정일 1983.07.20

소재지 경남 진주시 남성동 212-8

소유자 진주시

관리자 진주시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분들을 모시기 위한 사당이다.



정사호가 세웠으며 조선 선조 40년(1607)에 사당의 이름을 임금이 지어(사액) 내렸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김시민 장군(1554∼1592)을 모신 충민사가 없어지자 창열사에 모셨다. 이밖에도 창의사 김천일(1537∼1593), 충청병사 황진(1542∼1606), 경상우병사 최경회(1532∼1593) 등 39분을 모시고 있다.



★김시민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선조 11년(1578)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성 싸움에서 적을 격파하고 빼앗겼던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김천일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의병장이다. 선조 6년(1573)에 학문이 뛰어나 발탁되었으며 선조 26년(1593)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하고 개성으로 진격할 때 도왔다. 1차 진주성 싸움의 패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성은 함락되고 김천일은 남강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황진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선조 5년(1572)에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최경회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으며 진주성 싸움에서 황진, 김천일과 함께 전사하였다.



문화재명 창열사(彰烈祠)

이 사당(祠堂)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하여 선조(宣祖) 40년(1607)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그후 제1차 진주성싸움에서 대승리를 거둔 ★김시민장군(金時敏將軍)을 모신 충민사가 고종(高宗) 5년(1868)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되자 장군의 신위를 이곳으로 함께 모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지금 충무공(忠武公) ★김시민장군의 신위를 맨 위자리에 모시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 등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참 대단하십니다. 이 많은 자료를 찾아내시려면 그 노고가 얼마나 큰지 상상이 갑니다.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 김윤만 - 무슨 방법이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암튼 대단합니다.

▣ 솔내영환 -

▣ 김은회 - 上洛 大字典 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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