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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Re:김돈(3) 이순지와 양성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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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2-12-28 21:08 조회1,5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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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이씨의 조선 세종조의 공소공 이사검공은 문온공의 장손자이신 직제학공(휘 맹헌)의 장인이



되시는 분입니다. 공소공의 묘소는 직제학공의 묘소 근처(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가양리)에



우리 안동김문에서 500여년 수호하여 왔습니다.



양성이씨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양성이씨는 시조 秀匡(수광)이 서기 1,040년대 송나라에서 特進金吾衛大將軍 上柱國(특진금오위대



장군 상주국)의 爵位(작위)를 받으시고 고려에서 三重大匡輔國(삼중대광보국) 陽城君에



봉해짐으로써 득성(得姓)하였다.



秀匡은 송나라 태생으로 고려에와 文宗朝(1,047~1,083)에 벼슬하여 屢次 契丹(거란)에 使臣으로



派遺되여 出衆한 인품과 剛柔兼全(강유겸전)한 外交術로 상호 이해를 잘 타일러 슬기롭게 설득무마하여



그들의 東侵野慾(동침야욕)을 封鎖(봉쇄) 善隣友好關係(선린우호관계)를 맺으므로써 우리나라를



晏然(안연)케한 공을 세워 定難功臣제일로 策勳(책훈)되었다. 또한 出將入相하고 덕망이 높아 당시



사람들이 당나라 郭子儀(곽자의)에 比하였다.



송나라에 변란이있어 고려에 救援을 청해오자 왕명으로 원정, 한달에 세 번 勝捷(승첩)을 거두매,



송나라 황제가 연회를 베풀고 친필로 "고려대신 이수광은 功冠天下요 名揚後世하리라"고 써주고



위의 벼슬을 내리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榮貴公子(영귀공자)라 칭송 하였다.



本貫地 陽城을 本貫으로 삼게된 것은 秀匡(수광)이 定難功臣(정난공신)으로 策勳(책훈)되고 陽城을



采邑(채읍)으로 下賜받은 賜牌之地(사패지지)에서 연유된다.





陽城李氏는 시조 李秀匡(수광)이래로 900여년 30餘世를 내려오는 동안 고려때는 將相에 줄을 이어



世人에 羨望(선망)의 초점이 되기도 했다. 秀匡의 아들 臣靖(신정)은 吏部尙書에 오르고 손자 元儀(원의)



는 密直司承旨同正, 증손 英柱(영주)는 判密直司事上將軍을 역임하는 등 陽城李氏는 첫출발부터



華麗 했다.駙馬公 英柱는 또 忠烈王의 딸 順正公主를 아내로 맞아 왕실과 姻戚(인척)관계를 맺으며



가문의 기반을 튼튼히 다졌다.



玄孫인 천 또한 三重大匡 金吾衛大將軍僉議評理 陽城君에 封해졌으며 슬하에 다섯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六世 石灘公 守邦(一名 那海)은 都僉議評理 判密直司事 陽城君으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때



인품과 재능이 영종의 눈에 띄어 총애를받아 直省舍人의 벼슬과 함께 那海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



石灘公(석탄공)께서는 春富,仁富,光富,元富의 네 아들이 있어 위로 세아들은 모두 侍中에 올랐고 막내



元富도 尙書벼슬를 해 모두 大顯하니 세상의 부러움을 샀다.사람들은 那海같이 됐으면 하는뜻에서



"似那海(사나해)"라고 한 것이 "사나이 大丈夫(대장부)"란 말의 기원이 됐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石灘公의 큰아들 七世 侍中公(시중공) 春富는 당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만회하려는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배원자립,토지제도 개혁등 일련의 개혁정치를 펴 위기에 처한 국난과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출코자 진력한바 있었다.그러나 親元守舊勢力(친원수구세력)의 완강한 저항과 奸惡(간악)한 무리들의



터무니없는 中傷(중상)으로 1371년 공민왕 20년 7월 雄志(웅지)를 펴지 못한채 禍(화)를 입어 이로



인하여 沃(옥) 등 아들과 光富,元富 등 아우들까지도 혹은 隸編(예편),혹은 流配(유배)를 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그러나 때마침 江陵府에 編隸(편예)돼있던 큰아들 八世 靖節公(정절공) 沃이 東海岸 江陵道



一帶의 州郡을 焚蕩(분탕)하던 倭寇(왜구)를 名弓手로서 출전,奇計(기계)와 勇力(용력)으로 力戰擊退



(역전격퇴)한 殊勳(수훈)으로 父寃(부원)을 펴 다시 官路를 열어 百尺竿頭(백척간두)에선 一門의 위기를



극적으로 타개했다. 高麗朝에 문벌로 환로의 정상을 달렸던 양성이씨는 새왕조 조선이 들어서자,



高麗世臣으로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不事二君(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석탄공의 셋째아우 六世 判事公(판사공) 守仁은 조선이 들어서자 杜門洞(두문동)에 들어가 72賢중의



한분이 되었고, 장손 江陵道節制使(강릉도절제사) 沃(옥)도 조선조에서 資憲知中樞院事(자원지중추원



사),判漢城府事(판한성부사) 등의 벼슬을 내리며 懷柔(회유)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사후



공의절개를 기려 朝廷(조정)은 靖節公의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새시대에 참여



가문의 隆盛(융성)을 지켰다.특히 세종조에 이르러 德治(덕치)의 틀이 잡히고 새왕조가 문화의 꽃을



피우자 문무를 겸비한 많은 인재가 참여 가문의 융성과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石灘公의



넷째아우郡事公 守林(수림)의 아들 七世 推(추)는 漢城府左尹, 黃海道觀察使를 歷任 淸白吏에



入錄되고 二侍中公(이시중공) 仁富(인부)의 아들 八世 之實(지실)은 工曹判書(공조판서)에 올라



李從茂 柳濕과함께 右軍都節制使로 저 유명한 對馬島征伐에 공을 세웠다.또한 靖節公의 둘째아들



九世 思謹(사근)은 海州牧使(해주목사)로 치적이 빛났으며 셋째아들 恭昭公 思儉(사검)은 세종을



세자때부터 보필, 4회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中外(중외)에 명성을 떨쳐 左贊成 陽城府院君



에 오르고, 넷째아들 思任(사임)은 兵器製造에 힘써 判漢城府事에 올랐으니 모두 조선조초기의



국방외교강화에 공이커 조선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졌던 양성이씨의 빼놓을수 없는 인물들이다.







양성이씨는 조선조초기에 이렇게 환로를 터 判書 正二品 이상의 고관만해도 堂內(당내)간에 12명을



배출 했으며 이후 문과급제자는 태종때 大司諫公 九世 壅(옹)을 비롯 38명에 달했다. 世宗 때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발명가인 十世 靖平公 純之(순지)가 그첫손에 꼽히는 인물 석탄공의 현손인 靖平公은



兵曹判書를 지낸 孟常(맹상)의 막내아들로 判中樞院事에 까지 올랐는데, 형 3분과 함께 四子登科



한집안이다. 세종의 명을 받아 金淡(김담)등과 협조 曆法(역법)을 연구하고 仰釜日晷(앙부일귀)



自擊漏(자격루) 簡儀圭表(간의규표) 大平縣珠 등을 만들 때 장영실이 참여 했으며, 諸家曆象集



(제가역상집) 등 많은 천문학서적들을 編纂했다.공은 算學,天文,陰陽,풍수 등 자연과학의 대가였는데



그중에도 김담과 함께 쓴 七政算內外篇(칠정산낸외편)은 유명하다. 특히 공의 저서중 交食表에 실린



500여년 전의 서울의 위도가 오늘날의 서울의 위도와 일치하고 있음은 놀라운일이 아닐수 없다.



靖平公의 장조카로 문장가 의학자로 알려진 十一世 文質公 芮(예) 또한 刑曹判書까지 오른 인물,



공은 集賢殿 副校理로 있던 1445년 "醫方類聚(의방유취)"의 편찬에 참여 했으며 工曹判書로 있던



성종8년 婦女再嫁禁止의 여부를 놓고 조정의 의견이 분분할대 조건부개가론을 주장하여 채택토록



함으로써 조선왕조의 기본방침이 되게 했다. 이분들과 함께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 成宗때 4대문장가중



한분으로 斯文領袖(사문영수)로 숭앙받는 文簡公(문간공) 十一世 承召이다.靖節公의 증손이자 赤城君



온의 아들인 공은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 藝文館提學으로 있을때 "明皇誡鑑(명황계감)"을 우리말로



번역했고 신숙주 강희맹 등과 "國朝五禮儀"를 내는가하면 文集 "三灘集(삼탄집)"을 남겼다. 공은 당시



문장으로 이름높던 서거정과 어께를 나란히 한 대문장가 였는데 특히 용모와 態度가 端雅淸淨(단아청정)



해 "金玉君子"라고도 불렀다. 監司公 推(추)의 증손인 十世 大司憲公 世英도 文名이 높았고 淸簡(청간)



으로 選入되었으며 宰相(재상)材木으로 지목된 큰인물이었는데 아깝게도 早世하였다.



이와같이 많은 인재를 배출함으로써 門運의 중흥을 맞이 하였으나 七世 漢城府尹公(한성부윤공)



之澤(지택)의 사위인 황보인이 癸酉靖難(계유정난)때 김종서와 함께 被禍(피화)되고 수양대군이



어린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당시 工曹參議(공조참의)로 있던 恭昭公(공소공)의 아들



十世 徽(휘)는 이에 항거단종복위를 꾀하다 성삼문, 이개 등 사육신과 함께 순절 하였다.이후 양성이씨



는 벼슬을 멀리 하려는 은둔사상이 움트게 되어 혹은 강호에 자적하고 혹은 산림에 은거하여 학문과



후진양성에만 전렴하는 청빈낙도의 생활에 젖어 들어갔다. 參議公(참의공) 徽(휘)는 사육신중 목은



이색의 증손인 이개의 매부다.참의공이 순절하자 堂叔 判尹公(판윤공) 伯良(백량),縣監公 興秀(흥수),



사촌적성군 온, 縣監公 진, 三從인 麻田公(마전공) 攸直(유직) 堂姪(당질) 鹿村公(녹촌공) 承明 등이



벼슬을 버리고 숨어버려 세상에서는 이분들을 은육신이라 불렀다고 한다.



1592년 임란이터져 민족의 존망이 벼랑에 선위기에 직면하자 충절의 가문 양성이씨는 은둔주의를



폐리처럼 내던지고 분연히 일어서 구국의 전선에 앞다투어 나섰다.순국열사만도 10여명 그중에서도



충무공을 도와 왜적을 물리치다 노량해전에서 충무공과 함께 산화한 加里浦僉使(가리포첨사) 겸



助防將(조방장) 十三世 英男將軍은 陰竹縣監 季寶(계보)의 현손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公은



19세에 武科에 급제 宣傳官.訓練院僉正(훈련원첨정)을 거쳐 1592년 임란이 터질 당시에 慶尙右水使



元均 휘하의 율포만호로 있었다.원균이 첫싸움에서 패하자 全羅左水使로 있던 이순신을 5.6차례



찾아 원병을 청했다.이때부터 7년간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忠武公을 보좌했다. 公에대한 忠武公의



신임은 매우 두터워 "亂中日記"에는 李英男將軍의 이름이 69번이나 등장한다.



加里浦僉使 겸 助防將公은 漕舟(조주)에 익숙한 莞島장정들을 古今鎭에 소집 훈련시켜 수군을



정비해 1598년11월19일 7년전쟁을 마무리짓는 최후의 露梁海戰에 출전 대승을 거두고 忠武公과



함께 순국했다. 그때 나이 33세, 순국후 兵曹判書로 追贈(추증) 宣武原從功臣一等(선무원종공신일등)에



敍錄됐다. 全南 莞島의 古今島 忠武祠에 1959년에 位牌(위패)를,1985년4월에는 影幀(영정)을 忠武公과



함께 配享(배향)했다. 忠北 鎭川에도 顯忠碑와 史蹟碑가 세워져 있다. 羅大用과 함께 忠武公



휘하에서 거북선 제작에참여하고 역시 露梁海戰에서 순국한 正郞公(정랑공) 守義(수의)의 증손



萬戶(만호) 十四世 渫(설)도 宣武原從功臣一等 統制使(통제사)로 追贈(추증)됐다. 義兵의 원조인



愛日堂 13세 光翼은 宣祖가 義州로 播遷(파천)하자 甥姪 金千鎰과 종제 광주(光宙)를 불러 국난에



목숨을 바쳐 싸울것을 당부하고, 高敬命 등에게 倡義(창의) 檄文(격문)을 띄우고는 宣祖가 있는



行在所로 달려가다 73세의 老軀로 公州에서 숨을 거두었다. 義兵將으로 晋州 矗石樓(촉석루) 전투에서



憤死한 11世 宏(굉), 蔚山郡守로 분전하다 순국한 13世 언함 杆城郡守로 의병을 領率,申砬과 함께



忠州 達川에서 순국한 14世 忠信 露梁戰에서 左翼將으로 奮戰하다 순국한 愛日堂의 아들 14世 成燦,



丁酉再亂에 노량전에서 순국한 14世 振, 推兄弟, 포수로 활약한 4촌 大鳴, 平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丁酉再亂때는 昌寧의 火旺山城에서 密陽府使로 加 藤淸正의 왜군을 크게 격파하고 三道流制使를



지낸 14世 英 등도 빼놓을수 없는 인물 들이다.



이밖에도 자기 몸이 늙어 병상에 있으면서도 13世 筌(전)은 아들 3형제 元男, 儀男,智男과 함께



忠武公麾下에서 해전에 참전했고, 江界判官公 14世 敬信도 露梁戰에서 순국했으며, 助防將公의



三從인 13世 廷英도 鎭川에서 義兵將으로 申砬장군 휘하에서 참전, 宣武扈聖 淸難(선무호성청난) 등



三重原從功臣이 됐고, 栗谷文人인 14世 軫(진), 璧(벽)은 의병을 일으켜 扈駕(호가)하거나 참전하여



扈聖功臣(호성공신)으로 冊綠되기도 했으며, 江界判官 15世 德男도 선무원종 공신에 冊錄(책록)되어



사대부가로서의 진면목을 충분히 발휘했다.1627년 丁卯胡亂때도 統制使公 英의 넷째아들 15世 應立



(응립)이 참전 순국했다. 1636년 丙子胡亂에서도 訓練院奉事 15世 繼希(계희)는 素沙陣戰鬪에서



濟州判官 15世 大新은 南漢山城에서 순국했으며, 江界判官公 敬信의 아들 刑曹正郞 15世 秀林은



南漢山城戰鬪에서 크게 戰功을 세우는 충절을 지켰다. 學問과 文章으로 陽城李氏를 빛낸 인물중



두드러진이는 文簡公 承召,文質公 芮(예),大司憲公 世英 외에도 參奉公 文齡,司僕寺正公 夢吉 등이



있다. 參奉公 13世 文齡은 벼슬은 參奉에 그쳤으나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 當代의 巨儒(거유) 栗谷



李珥와 修契講論(수계강론)하였는데, 栗谷은 늘 公의 인품에 감탄하여 石村尊師라고 높이 불렀다.



性理學者 15世 夢吉은 문장이 뛰어나 月沙 李廷龜柳起門 등과 함께 洛中八賢으로 꼽혔다.



公의 아들 參議公 得坤(득곤)은 名利에 淡白해 光海君이 수차에 걸쳐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鎭川



斗建洞 산속에 묻혀 대추나무 기둥으로 정자를지어 마음의 물결을 가라앉힌다는 뜻으로 息波亭



(식파정)이라 이름짓고 優遊自適하였다. 息波亭에는 崔鳴吉과 宋時烈 등의 詩를새긴 懸板이 22 점이나



걸려있다. 同知中樞府事公 18세 寅錫은 12州牧을 지낸후 耆社(기사)에 들었고 北道出身으로 重用된



同知中樞府事公 17世 格은 致任 하던날 볏짚 3단 만을 남겼으며 進士公 20世 최賢(최현)은 학문 문장이



뛰어나 正祖로부터 才翁(재옹)이란 別號를 받기도 하여 남들이 博雅君子라 부르기도 했다. 1801년



純祖1년 天主敎人들에 대한 辛酉獄事때 예수肖像 3장을 그려 黃嗣永에게 보낸 혐의로 처형된 최초의



서양화가 秋餐(추찬) 21世 喜英, 1895년 閔妃가 시해되자, 羅州서 상소와 함께 倡義檄文(창의격문)을



띄웠던 謙山, 23世 炳壽는 松山精舍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謙山集과 錦城正義錄을 저술한 韓末碩儒였다.



韓末 義兵將公 24世 能權은 만국평화회의에 밀파되는 李儁, 李相卨을 국경까지 호송했던 義兵將,高宗의



密令을 받아 江華에 大東倡義陣을 설치하고 군자금과 군량미를 조달 海州 등지의 義兵들을 지원하고



왜적 200여명을 강화 船頭浦平野로 유인 섬멸했다.



1909년 同志들과 함께 漢陽에 잠입했다가 密告로 왜군에 잡혀 46세로 순국했다. 江華 永慕齋에 봉위



되었으며, 國家建國勳章國民章(575호)이 추서되고 大田國立墓地 순국선열 墓域에 모셔졌다.



乙巳保護條約締結後 羅州에서 竹峯 金泰元 義士와 함께 義兵을 모집 1909년8월 羅州 東幕洞戰鬪에서



순국한 24世 東衍(동연)義士도 있다. 이밖에도 광복때까지 日帝流治下에서 義兵활동 3.1운동 上海臨時



政府 등 국내외 항일독립지사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10여명에 달한다. 특히 3.1운동때는 가평에서 24世



圭鳳 圭鵬, 25世 胤錫, 萬錫,坡州에서는 24世 泳震,26世 文燮,華城에서는 26世 源行 등이 주도한 인물들이



다. 朝鮮朝를 통해 양성이씨 文科及第者는 38명, 君號를 받은이는 6명 諡號 5명 湖堂 1명 功臣 38명,王子



師傳 5명 廟祠(묘사) 및 書院에 配亭된이가 11명 孝子旌閭(정려) 20명이나 된다. 可히 文武를 兼全한 陽



城李氏家門의 眞面目을 窺知(규지)케 한다. 政府樹立後 요직을 지낸인사로는 外務部長官 國會議員 26世



東元,陸軍少將 24世 曉 農林部次官補 27世 星煥, 交通部企劃管理室長 27世 東喜, 6選國會議員으로 27世



忠煥,國會議員 26世 暾海, 國會議員 28世 龍鎬, 勞動部次官.國會議員 27世 龍俊, 陸軍 少將 25世 年新,



判事 27世 鎬元, 陸軍大將 27世 在寬,陸軍中將 28世 鎬昇, 木浦大總長 23세 泰根, 文化公音部次官



27世庚文 등이 있다.



陽城李氏는 總 9大派로 30余代를 내려오는 동안 3만8천여명에 이르는 수에 달했으며,麗朝에는 주로



정치외교무대에서 화려한 활동을 해 왔으나, 朝鮮朝에 와서는 忠節淸直한 士族의 矜持를 고수하여,



정치보다는 학문을 선호하고 부귀보다는 安分에 自足해온 氏族으로 오늘에 이르렀음을 엿볼 수 있다.









▣ 김윤만 - 맹자헌자 할아버지 장인 집안이라 하시니 더욱 가깝게 느껴 집니다. 6선 국회의원으로 27세 충환이란 분은 충북 진천 태생으로 음성.진천 국회의원을 지낸 분입니다.

▣ 김주회 - 윤만 종친님! 맞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직제학공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처음 알았습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 김은회 -

▣ 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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