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점할아버지 이야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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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12-29 15:50 조회1,794회 댓글0건본문
자점할아버지 이야기(6)
【자점(自點)의 보(洑)는 경기도 장호원 청미천, 황해도 사리원 재령강, 호남(위치 미상)
등지에 축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청미천 자점의 보에는 역모와 관련된
전설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정치적 승자인 집권세력(효종과 산당)이 민심을 조작하고
이용한 결과의 산물이라 생각합니다.
--즉 인조께서 청 태종에게 가시 거적에 앉으셨다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三拜九叩頭(삼배구고두)’의 항복 의식을 취하셨고, 그곳 삼전나루에 치욕의
‘대청황제공덕비’를 우리 손으로 세울 수 밖에 없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
그리고 그 가족과 척화론자들을 치욕속에 청의 수도 심양으로 끌고 갔으며, 정묘년·
병자년 양란를 겪으면서 입은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상 피해, 뿐만아니라 양란 이후
의 백성들의 궁핍과 계속되는 군역과 부역 등을 고려해 볼 때 ‘반청사상’은 집권세력
뿐아니라 당시 민초 사회의 일반 여론이었을 것이고 집권세력이 이를 이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자점의 보의 진실은 이천군지가 인정하고 있듯이 장호원 일대 평야지대의
농민들이 이 봇물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활용하므로써 흉작을 모르고 농사를 지었
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점할아버지께서 축조하신 보가 경기도, 황해도, 호남지방
등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길이 500m 이상, 폭 2m~6m, 높이 1m~1.5m의 湺(보)막이, 황무지인 저습지를 개간여
500정보의 논(1,500,000평. 7,500마지기. 당시 1마지기당 양석을 기준할 때 쌀 15,000
가마 수확)를 만들고, 장거리 수로와 방조제 그리고 수십리에 걸쳐 있는 보의 유적
등을 감안해 볼 때 이는 대규모 인력과 장비와 비용이 들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업입니다.
--따라서 自點(자점)의 洑(보), 於之屯 洑(어지둔 보), 慶祐宮 洑(경우궁 보) 등은 적
어도 풍수지리를 이용한 조상숭배 또는 역모관련 차원이 아닌 자점할아버지의 지시
와 책임하에 이루어진 국가적 치수사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一)
(출전 : 음성군지/음성군수/1963.12.31)
--장호원에 있는 백족산(白足山)은 산세가 서울로 향하지 않고 반대로 돌았다. 그리고
이산은 명산이기 때문에 여기에 산소를 쓰면 역모(逆謀)가 성공되어 천하를 얻는다
는 것이다. 그래서 김자점(金自點)은 자기 조상의 산소를 여기에 천장(遷葬)을 결정
하고 명지관(名地官)을 불러서 하관(下棺)의 좌향(坐向)을 정하라 했다. 지관은 가마
니 생각하여 보니 ‘역의(逆意)가 있는 자는 반드시 용심(用心)이 치밀하니 반대로 가
르키면 반드시 정(正)을 취할 것이요. 바른대로 가르키면 기어이 반대를 택할 것이
아니냐. 후자를 취하리라 그래야만 후환이 없지 만일에 아차 잘못하면 나도 후일 역
모에 걸려 귀신도 모르게 죽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이 들어 지관은 역모가 성공할
수 없는 좌향을 남(南)으로 지시했다. 그러면 자점은 반대로 북향을 택할 것이니 그
렇게 되면 역모는 영락없이 실패하리라 예견하였던 지관의 꾀였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르랴. 자점은 지관의 예견대로 좌향을 북으로 결정하고 시행하여 버리였다. 그러면
그동안 땅속의 시체는 용(龍)이되어 용머리를 들게 될터이니 이때에 물이 필요하므
로 그 앞 들에 물을 막은 것이 오늘에 자점보(自點洑)라고 전하여 온다.
--김자점의 역모가 발각되여 주(誅)에 복(伏)할 때 나라에서는 장호원 백족산 위의
산소를 파보니 땅속에 시체는 이미 용(龍)으로 변하여 꿈틀거리고 있었음을 따라 그
때의 지관을 불러다가 국문(鞠問)하니 사실대로 고백하였으므로 화(禍)를 면(免)하였
다 한다. 용이 물을 얻어 승천만 되는 날이면 김자점은 나라를 얻었을는지 모르나
묘소(墓所) 좌향(坐向)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는 전설(傳說)이 있다.
(二)
<출전 : 이천군지/이천군지편찬위원회/1984>
--장호원은 남쪽으로 해발 402m의 우뚝 솟은 백족산(白足山)이 있고 이 백족산 남
단(南端)을 휘돌아 경기도(이천시 율면 오남리)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淸
渼川)이 길게 흐르고 있다.
--이 백족산 남단에 청미천 상류를 막아 만들어진 보(洑)가 자점보(自點洑)인데 조선
인조때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功臣)으로 영의정까지 지내며 권세를 마음껏 휘두
르다 역모사건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김자점(金自點)이 쌓았다하여 그렇게 불리워
지며 거기엔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가 있다.
--백족산에는 금반형(金盤形)이라는 묘(墓)자리가 있는데 풍수지리에서는 금반형을
묘자리의 으뜸으로 쳤다. 이 금반형 자리를 김자점이 젊어서부터 눈독을 들이다가
임금의 외척(外戚)으로 득세하여 조정을 휘어잡게 되자 때를 놓치지 않고 부친의 묘
를 그 곳에다가 썼다.
--그런데 백족산의 금반형 자리에는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묘에서 내
려다 보이는 곳에 큰 물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청미천 만으로는 신통치가 않은 점
이 었다. 김자점은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청미천을 막음으로써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사시 사철 푸른 물이 고여있게 하여 부친의 묘를 명실상부한 금반형
의 명당(名堂)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 덕(德)으로 가뭄이 들 때에는 근처 농민들이 보의 물을 몰래 뽑아써서 인근 일
대가 흉작으로 모르는 고장이 되었고 자점보의 물로 농사를 지으면 밥맛이 좋고 그
쌀을 먹은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어 김자점이 그 쌀을 가져다 먹고는 임금
의 외척이 되어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는 말도 생겨났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보의 길이는 약 500m, 폭이 넓은 곳이 약 6m, 좁은 곳은 약 2m 가
량인데 자점보는 지금도 장호원 일대의 중요한 농용수 공급지로 긴요하게 쓰여지고
있다. 김자점도 우리 고장을 위해서는 한가지 좋은 일을 남김 셈이라 하겠다.
(三)
<출전 : 새천년을 여는 전북/전라북도(문경민, 새전북신문 정치부장)/2000년 봄호>
--인조 21년(1636년)에는 김자점(金自點)이 황해도 봉산군(재령평야)에 어지둔보(於
之屯洑)를 축조하여 약 500정보의 논을 관개하고, 경기 장호원에 김자점보를 축조했
다는 기록들이 전한다.<주회씨 제공>
<인터넷 검색. -간척지 사료작물 재배기술 및 문제점-(축산기술연구소 초지사료과
-------------연구관 임영철)>
--이조에 와서는 태종 14년(서기 1414년)에 경기 통진지구(현 김포)에 간척지 약
200여석 직이를 사축하였던 기록이 있고, 인조 21년(서기 1643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김자점에 의해 재령강 연변에 방조제를 축조하여 농지화하고 관.배수까지 갖춘 기록
이 있다.<주회씨 제공>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황해도 북서부를 북류하는 재령강 유역의 평야. 재령강은 수양산 설류봉에서 발원
하여 장수산 동쪽을 돌아 북류하면서 삼강에서 지류인 은파천 서흥강을, 하구 부근
에서 서강 직천 수함강을 합쳐 철도에서 대동강에 합류한다. 따라서 재령강 유역의
평야는 황해도의 황주 봉산 재령 신천 안악의 5개군에 걸친 우리나라 굴지의 평야이
다. 재령평야는 원래 구월산맥 멸악산맥 자모산맥 사이가 함몰하여 바다가 만입한
고재령만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육지의 융기와 재령강 및 그 지류의 토
사의 퇴적작용을 받아 육지로 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도 만조시에는 재령평야의 일
부가 수면 아래 3m나 되는 저습지가 되며, 사주에 막힌 석호였던 곳도 있어 평야의
대부분은 높이 20m 이하이다.
(중 략)
--저습지였던 재령평야의 개척은 조선시대 인조때 시작되었다. 인조반정의 공신이었
던 김자점(金自點)이 벽해정(碧海亭)이라 불리는 북률면 동남의 초원지대에 기러기떼
물오리떼가 수없이 많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저곳에 머지않아 인가가 날새무리처럼
모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무주공지를 개간하게 되었다.
--그는 청수면 전탄 부근에서부터 북률면에 이르는 제방을 쌓아 재령강 물을 관개하
는 장거리 수로를 만들어 큰 논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후에 경우궁(慶祐宮)에 속하
였기 때문에 논들을 ‘경우궁들’, 수로이름을 ‘경우궁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보는 최
근까지도 수십리에 걸쳐 남아 있다. 이 보를 개설하는 도중 몇 곳에서 거센 조수 때
문에 제방이 무너지기도 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저습한 초원지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뒤 1926년에 안녕수리조합 재신수리조합 등이 건설되어 재령평야는
수리시설을 갖춘 곡창지대로 발전하였다.
--재령평야를 일명 ‘나무리벌’이라고도 부르는데, ‘먹고 입고 쓰고도 남는다’고 해서
나온 이름이다. 재령 쌀은 예로부터 왕가의 진상미로 유명하였고 쌀알이 길고 커서
동양굴지의 최우수미로 취급되었다. 쌀 이외의 농산물로는 사과 채소 등이 유명하다.
(후 략)
<참고문헌> 택리지, 황해도지(황해도지편찬위원회,1982) -金蓮玉-<주회씨 제공>
<안동김씨 익원공파종회보. -재조명되는 선조의 역사->
--(전략) 특히 농업정책에 힘을 기울여 호남지방에 洑(보)를 막고 저수지를 축조하여
지금도 그 이름을 自點洑(자점보)로 통하는 곳이 있으며, 황해도 재령은 배수가 되지
않아 갈대가 우거진 황무지였으나 수로를 개척하고 풍부한 수원을 이용하게 됨으로
써 곡창지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곳 향지에 실려있고, 400여년에 가까운 지금까지
도 세인의 입에서 전설로 전해져 공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고 한다.(후략)
▣ 김태서 - 자점할아버지에 대한 전설은 참많기도합니다.한강을 막으면 왕이되다 하여
▣ 김태서 - 지금의 잠실일대에 둑을 막았다는 설 또는 황주에 정방산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로 보아 국가적인 사업을 많이 하신것 같습니다.
▣ 김항용 - 전설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자점 할아버지의 간척 수리사업이 총정리된 것 같습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내년엔 더좋은 한해 되십시오.
▣ 솔내 -
▣ 김영윤 -
【자점(自點)의 보(洑)는 경기도 장호원 청미천, 황해도 사리원 재령강, 호남(위치 미상)
등지에 축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청미천 자점의 보에는 역모와 관련된
전설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정치적 승자인 집권세력(효종과 산당)이 민심을 조작하고
이용한 결과의 산물이라 생각합니다.
--즉 인조께서 청 태종에게 가시 거적에 앉으셨다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三拜九叩頭(삼배구고두)’의 항복 의식을 취하셨고, 그곳 삼전나루에 치욕의
‘대청황제공덕비’를 우리 손으로 세울 수 밖에 없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
그리고 그 가족과 척화론자들을 치욕속에 청의 수도 심양으로 끌고 갔으며, 정묘년·
병자년 양란를 겪으면서 입은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상 피해, 뿐만아니라 양란 이후
의 백성들의 궁핍과 계속되는 군역과 부역 등을 고려해 볼 때 ‘반청사상’은 집권세력
뿐아니라 당시 민초 사회의 일반 여론이었을 것이고 집권세력이 이를 이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자점의 보의 진실은 이천군지가 인정하고 있듯이 장호원 일대 평야지대의
농민들이 이 봇물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로 활용하므로써 흉작을 모르고 농사를 지었
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점할아버지께서 축조하신 보가 경기도, 황해도, 호남지방
등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길이 500m 이상, 폭 2m~6m, 높이 1m~1.5m의 湺(보)막이, 황무지인 저습지를 개간여
500정보의 논(1,500,000평. 7,500마지기. 당시 1마지기당 양석을 기준할 때 쌀 15,000
가마 수확)를 만들고, 장거리 수로와 방조제 그리고 수십리에 걸쳐 있는 보의 유적
등을 감안해 볼 때 이는 대규모 인력과 장비와 비용이 들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업입니다.
--따라서 自點(자점)의 洑(보), 於之屯 洑(어지둔 보), 慶祐宮 洑(경우궁 보) 등은 적
어도 풍수지리를 이용한 조상숭배 또는 역모관련 차원이 아닌 자점할아버지의 지시
와 책임하에 이루어진 국가적 치수사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一)
(출전 : 음성군지/음성군수/1963.12.31)
--장호원에 있는 백족산(白足山)은 산세가 서울로 향하지 않고 반대로 돌았다. 그리고
이산은 명산이기 때문에 여기에 산소를 쓰면 역모(逆謀)가 성공되어 천하를 얻는다
는 것이다. 그래서 김자점(金自點)은 자기 조상의 산소를 여기에 천장(遷葬)을 결정
하고 명지관(名地官)을 불러서 하관(下棺)의 좌향(坐向)을 정하라 했다. 지관은 가마
니 생각하여 보니 ‘역의(逆意)가 있는 자는 반드시 용심(用心)이 치밀하니 반대로 가
르키면 반드시 정(正)을 취할 것이요. 바른대로 가르키면 기어이 반대를 택할 것이
아니냐. 후자를 취하리라 그래야만 후환이 없지 만일에 아차 잘못하면 나도 후일 역
모에 걸려 귀신도 모르게 죽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이 들어 지관은 역모가 성공할
수 없는 좌향을 남(南)으로 지시했다. 그러면 자점은 반대로 북향을 택할 것이니 그
렇게 되면 역모는 영락없이 실패하리라 예견하였던 지관의 꾀였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르랴. 자점은 지관의 예견대로 좌향을 북으로 결정하고 시행하여 버리였다. 그러면
그동안 땅속의 시체는 용(龍)이되어 용머리를 들게 될터이니 이때에 물이 필요하므
로 그 앞 들에 물을 막은 것이 오늘에 자점보(自點洑)라고 전하여 온다.
--김자점의 역모가 발각되여 주(誅)에 복(伏)할 때 나라에서는 장호원 백족산 위의
산소를 파보니 땅속에 시체는 이미 용(龍)으로 변하여 꿈틀거리고 있었음을 따라 그
때의 지관을 불러다가 국문(鞠問)하니 사실대로 고백하였으므로 화(禍)를 면(免)하였
다 한다. 용이 물을 얻어 승천만 되는 날이면 김자점은 나라를 얻었을는지 모르나
묘소(墓所) 좌향(坐向)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는 전설(傳說)이 있다.
(二)
<출전 : 이천군지/이천군지편찬위원회/1984>
--장호원은 남쪽으로 해발 402m의 우뚝 솟은 백족산(白足山)이 있고 이 백족산 남
단(南端)을 휘돌아 경기도(이천시 율면 오남리)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淸
渼川)이 길게 흐르고 있다.
--이 백족산 남단에 청미천 상류를 막아 만들어진 보(洑)가 자점보(自點洑)인데 조선
인조때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功臣)으로 영의정까지 지내며 권세를 마음껏 휘두
르다 역모사건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김자점(金自點)이 쌓았다하여 그렇게 불리워
지며 거기엔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가 있다.
--백족산에는 금반형(金盤形)이라는 묘(墓)자리가 있는데 풍수지리에서는 금반형을
묘자리의 으뜸으로 쳤다. 이 금반형 자리를 김자점이 젊어서부터 눈독을 들이다가
임금의 외척(外戚)으로 득세하여 조정을 휘어잡게 되자 때를 놓치지 않고 부친의 묘
를 그 곳에다가 썼다.
--그런데 백족산의 금반형 자리에는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묘에서 내
려다 보이는 곳에 큰 물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청미천 만으로는 신통치가 않은 점
이 었다. 김자점은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청미천을 막음으로써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사시 사철 푸른 물이 고여있게 하여 부친의 묘를 명실상부한 금반형
의 명당(名堂)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 덕(德)으로 가뭄이 들 때에는 근처 농민들이 보의 물을 몰래 뽑아써서 인근 일
대가 흉작으로 모르는 고장이 되었고 자점보의 물로 농사를 지으면 밥맛이 좋고 그
쌀을 먹은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어 김자점이 그 쌀을 가져다 먹고는 임금
의 외척이 되어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는 말도 생겨났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보의 길이는 약 500m, 폭이 넓은 곳이 약 6m, 좁은 곳은 약 2m 가
량인데 자점보는 지금도 장호원 일대의 중요한 농용수 공급지로 긴요하게 쓰여지고
있다. 김자점도 우리 고장을 위해서는 한가지 좋은 일을 남김 셈이라 하겠다.
(三)
<출전 : 새천년을 여는 전북/전라북도(문경민, 새전북신문 정치부장)/2000년 봄호>
--인조 21년(1636년)에는 김자점(金自點)이 황해도 봉산군(재령평야)에 어지둔보(於
之屯洑)를 축조하여 약 500정보의 논을 관개하고, 경기 장호원에 김자점보를 축조했
다는 기록들이 전한다.<주회씨 제공>
<인터넷 검색. -간척지 사료작물 재배기술 및 문제점-(축산기술연구소 초지사료과
-------------연구관 임영철)>
--이조에 와서는 태종 14년(서기 1414년)에 경기 통진지구(현 김포)에 간척지 약
200여석 직이를 사축하였던 기록이 있고, 인조 21년(서기 1643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김자점에 의해 재령강 연변에 방조제를 축조하여 농지화하고 관.배수까지 갖춘 기록
이 있다.<주회씨 제공>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황해도 북서부를 북류하는 재령강 유역의 평야. 재령강은 수양산 설류봉에서 발원
하여 장수산 동쪽을 돌아 북류하면서 삼강에서 지류인 은파천 서흥강을, 하구 부근
에서 서강 직천 수함강을 합쳐 철도에서 대동강에 합류한다. 따라서 재령강 유역의
평야는 황해도의 황주 봉산 재령 신천 안악의 5개군에 걸친 우리나라 굴지의 평야이
다. 재령평야는 원래 구월산맥 멸악산맥 자모산맥 사이가 함몰하여 바다가 만입한
고재령만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육지의 융기와 재령강 및 그 지류의 토
사의 퇴적작용을 받아 육지로 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도 만조시에는 재령평야의 일
부가 수면 아래 3m나 되는 저습지가 되며, 사주에 막힌 석호였던 곳도 있어 평야의
대부분은 높이 20m 이하이다.
(중 략)
--저습지였던 재령평야의 개척은 조선시대 인조때 시작되었다. 인조반정의 공신이었
던 김자점(金自點)이 벽해정(碧海亭)이라 불리는 북률면 동남의 초원지대에 기러기떼
물오리떼가 수없이 많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저곳에 머지않아 인가가 날새무리처럼
모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무주공지를 개간하게 되었다.
--그는 청수면 전탄 부근에서부터 북률면에 이르는 제방을 쌓아 재령강 물을 관개하
는 장거리 수로를 만들어 큰 논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후에 경우궁(慶祐宮)에 속하
였기 때문에 논들을 ‘경우궁들’, 수로이름을 ‘경우궁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보는 최
근까지도 수십리에 걸쳐 남아 있다. 이 보를 개설하는 도중 몇 곳에서 거센 조수 때
문에 제방이 무너지기도 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저습한 초원지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뒤 1926년에 안녕수리조합 재신수리조합 등이 건설되어 재령평야는
수리시설을 갖춘 곡창지대로 발전하였다.
--재령평야를 일명 ‘나무리벌’이라고도 부르는데, ‘먹고 입고 쓰고도 남는다’고 해서
나온 이름이다. 재령 쌀은 예로부터 왕가의 진상미로 유명하였고 쌀알이 길고 커서
동양굴지의 최우수미로 취급되었다. 쌀 이외의 농산물로는 사과 채소 등이 유명하다.
(후 략)
<참고문헌> 택리지, 황해도지(황해도지편찬위원회,1982) -金蓮玉-<주회씨 제공>
<안동김씨 익원공파종회보. -재조명되는 선조의 역사->
--(전략) 특히 농업정책에 힘을 기울여 호남지방에 洑(보)를 막고 저수지를 축조하여
지금도 그 이름을 自點洑(자점보)로 통하는 곳이 있으며, 황해도 재령은 배수가 되지
않아 갈대가 우거진 황무지였으나 수로를 개척하고 풍부한 수원을 이용하게 됨으로
써 곡창지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곳 향지에 실려있고, 400여년에 가까운 지금까지
도 세인의 입에서 전설로 전해져 공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고 한다.(후략)
▣ 김태서 - 자점할아버지에 대한 전설은 참많기도합니다.한강을 막으면 왕이되다 하여
▣ 김태서 - 지금의 잠실일대에 둑을 막았다는 설 또는 황주에 정방산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로 보아 국가적인 사업을 많이 하신것 같습니다.
▣ 김항용 - 전설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자점 할아버지의 간척 수리사업이 총정리된 것 같습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내년엔 더좋은 한해 되십시오.
▣ 솔내 -
▣ 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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