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학자의 시각에서 본 성씨의유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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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미 작성일02-12-30 03:54 조회1,848회 댓글0건본문
---2편에 이어서 계속---
박(朴)씨에 대하여
이미 앞에서 이야기된것처럼 박(朴)씨는 저성의 하나이다.그래서 우리 나라에는 박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고문헌자료에 의하면 박씨는 그 력사도 매우 오래다.
박씨유래기에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먼 옛날 조선반도의 동남땅일대에는 노예소유자국가인 진한(辰韓)이란 나라가 있었다.
여기에 고조선(古朝鮮)에서 많은 백성들이 내려와 6개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그중의 한 마을인 고허촌에서는 소벌공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마을의 어른으로 있었다.
어느날 소벌공이 경주(慶州),양산(楊山)기슭을 바라보았는데 그곳 라정우물옆의 숲에서 말이 꿇어앉아 울고있었다.
소벌공은 그것이 하도 기이하여 말이 있는데로 다가갔다.소벌공이 다가가자 말은 간곳없이 사라지고 그자리에 큰 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든 소벌공은 그 알을 조심히 쪼개여보았다.
아니나다를가 알속에서는 환하게 생긴 총각애가 새별눈을 반짝이며 나왔다.
그후 총각애는 소벌공의 집에서 자랐다.
총각애는 열살이 좀 넘자 뛰여나게 숙성했고 기골이 장대하여 장부의 기개가 넘쳐났다.
고조선에서 온 여섯 마을의 사람들은 그의 출생이 기이하고 그 인물이 남달리 출중하여 그를 임금으로 받들어 모시였다.
진한사람들은 포(匏)를 《박》(朴) 즉 바가지라고 불렀는데 소벌공이 처음 큰 알을 발견하였을 때 그 모습이 꼭 바가지와 같았다고 하여 그의 성을 박씨로 불렀다.그리고 그의 이름은 혁거세(赫居世)라고 불렀다.
이렇게 되여 세상에는 박가가 생기였다고 한다.
이 전설은 박씨유래기이자 신라건국설화이다.
이렇게 박씨는 2천년이 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있다.
《전고대방》(典故大方)의 《만성시조편》(만가지 성의 시조에 대하여 쓴 부분)에는 박씨가 박혁거세이후 8명의 왕자들에 의해 갈래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하며 신빙성이 적다.
왜냐하면 밀양,상주,전주,함양,고령,경주 등의 8대박씨를 유리왕자(儒理王子)나 경명(景明)왕자의 자손으로 보기는 그 근거가 너무 희박하기때문이다.그것은 유리왕자나 경명왕자의 시대에 고령이나 전주,함양 등지가 신라의 령역으로 될수 없었다는 사정과 관련된다.《삼국사기》에도 경명왕자에 대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그것은 후세사람들이 8대박가의 시조에 대하여 적당히 꾸민것으로 보아진다.
박씨에서는 밀양(密陽)박가가 제일 유명하다.그것은 밀양박가의 조상이 큰 인물이였던것과도 관련된다.
밀양박가의 시조 박언부(朴彦孚)는 고려시기의 문종(文宗)고려의 제11대왕(1047-1083)때에 중서문하시중(中書門下侍中)으로 있었다.(이 벼슬은 오늘날의 총리와 비슷한 직책이다.)그는 임금으로부터 대사(大師)선생이라고 불리우는 사회적지위도 획득하였다.후에 박언부는 밀성(밀양)부원군으로 책봉(冊封)받았다.
밀양박가는 그후 89파의 갈래로 퍼졌다.그러나 이들도 대부분 밀양을 본으로 삼을 때가 많다.
그래서 박가라면 밀양박가를 먼저 꼽는다.
박씨의 본은 대체로 314개로 본다.그중에 본관을 가지고있는것은 30개 정도이다.나머지는 여기서 갈라져나온 본들이다.
조(曺)씨에 대하여
조(曺)씨는 저성에 속하는 성이다.
조씨의 유래와 관련하여 일부 사람들은 조씨가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열두번째 아들에서부터 시작되였다고 하고있다.다시말하여 조씨의 조상이 주나라 문왕의 열두번째 아들이라는것이다.
그러나 이 설은 사대주의가 심하였던 리조시기에 와서 꾸며진것이다.
리조시기에 와서 사대주의가 우심해지면서 봉건사대부들가운데는 자기의 조상계보를 큰 나라에서 이으려는 경향이 많았다.그때 조씨가운데서도 특별한 근거가 없으면서 중국왕족에게서 계보를 이으려는 사람들이 있은것 같다.그래서 조씨가 중국성이라느니,조씨의 조상이 옛날 중국의 왕자였다느니 하는 말이 생겨났다고 본다.
조씨는 대대로 조선민족의 혈통을 이어오는 조선성이다.
조씨의 본은 128향관인데 기본적인 본은 10개 정도이다.이 10개 정도의 본관에서 백개가 넘는 갈래가 퍼져나갔다.
조씨에서는 창녕(昌寧)조씨,릉성(綾城)조씨,남평(南平)조씨,장흥(長興)조씨,안동(安東)조씨,청도(淸道)조씨,수성(壽城)조씨,가흥(嘉興)조씨,령암(靈岩)조씨,,창평(昌平)조씨 등이 기본을 이루는데 그중에서도 창녕조씨가 대표적인 성이다.
족보를 적은 책인 《전고대방》(典故大方)에 의하면 창녕조씨의 시조에 계룡(繼龍)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그런데 그의 갈비아래에 《조(曹)》라는 글자가 새겨져있었다.그래서 그의 성을 조씨로 삼았는데 그것이 결국 창녕조씨로 되였다는것이다.
조계룡은 커서 신라 진평왕(眞平王),D597∼632년.녀왕)의 사위가 되였다고 한다.
물론 허구가 많은 기록이기는 하지만 창녕조가는 력사가 매우 오래며 또 신라녀왕의 사위가 될 정도로 일정한 세력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시사하고있다.
후세의 력사가들은 6가야에 속하였던 비화(창녕)가야가 망하면서 그 나라의 임금이 신라의 사위가 된것으로 추리하고있다.
민간전설에도 창녕조씨의 유래가 있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신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리광옥(李光玉)에게 례향(禮香)이라 부르는 미모의 딸이 있었다.
어느날 그가 갑자기 배를 끌어안고 돌아갔다.심한 동통이 왔던것이다.례향의 부모들은 이름있는 의원들을 불러다 례향의 병을 보였다.그러나 그 어느 의원의 치료도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웬 낯선 길손이 집에 들려 례향이를 화왕산(火旺山.창녕에 있는 큰 산)우에 있는 못에 데리고 가서 기도를 드리면 병이 곧 나으리라는것이였다.
례향의 부모들은 그 말을 쫓아 화왕산우에 있는 못가에 가서 례향의 병이 낫기를 하늘에 빌었다.
이렇게 한창 빌고있는데 례향이가 자취없이 사라져버렸다.
그의 부모들과 마을사람들은 숲속이며 물속이며를 가리지 않고 샅샅이 뒤지였으나 종내 례향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지 몇달후였다.
화왕산못이 갑자기 하늘로 치솟더니 그속에서 례향이가 나왔다.
이로부터 얼마후 례향에게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의 갈비뼈아래에 《曹》자가 새겨져있었다.그래서 이 아이의 성을 조가로 삼았다는것이다.
이 전설에 나오는 화왕산에는 비화가야때의 산성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오래동안 웅거할수 있는 풍부한 수원을 가진 못이 있다.
임진전쟁때의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가 여기서 왜적들의 발목을 묶어놓았다.
이렇게 창녕조가는 비화가야를 특징짓는 산인 화왕산과 더불어 이야기되고있다.
서(徐)씨에 대하여
서(徐)씨는 우리 나라의 오랜 성의 하나이다.
력사묶음책 《동국문헌비고》에는 서씨의 본관이 40여향이라고 되여있으나 그 이후 서씨의 본관은 153향으로 확인되였다.
이 153개의 향이나 되는 서씨중에서 리천(利川)서씨가 기본을 이루고있다.
서씨가운데서 리천서씨가 기본을 이룬다고 하는것은 리천서씨의 머리수가 많으며 후에 리천서씨에서 대구서씨,장성서씨,련산서씨,평당서씨,남평서씨,남양서씨 등 많은 서씨가 갈라져나왔기때문이다.
리천서씨의 유래를 더듬으면 다음과 같다.
먼 옛날 고조선에 위만(魏滿)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그런데 연(燕)나라가 한때 세력을 확대하자 그는 연나라에 가있었다.한창 세력을 펴나가던 연나라도 흉노(匈奴)족에게 몰리게 되였다.그러자 위만은 1천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를 넘어왔다.물론 조선식으로 상투도 틀고 옷차림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에 온 위만을 왕 준(準)이가 무척 신임하면서 신하로 삼았다.
고조선왕 준의 신하로 있던 위만은 은근히 힘을 축적해나갔다.자기의 세력이 커지자 위만은 정변을 일으키고 준왕을 내쫓았다.
그야말로 배은망덕한 행위였다.
이렇게 되여 위만에게 왕자리를 빼앗긴 준왕은 남쪽땅인 한(韓)에 가서 왕으로 칭하였다.
서씨족보에 의하면 준왕은 처음에 리천(오늘의 경기도지방) 서아성(徐阿城)에 있었다고 한다.
바로 서씨는 이 서아성의 서(徐)에서 시작된것이다.
이 리천서씨가 앞에서 언급한 대구,장성,남양 등으로 갈라졌다고 한다.
리천서씨의 유래설에는 이밖에도 서신일(徐神逸)이 조상이라는 유래설이 더 있다.
언제인가 서신일이 사냥군에게 쫓기우는 사슴을 구원해주었는데 그 덕으로 신일의 자손들이 자자손손 높은 벼슬을 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력사에 전해지고있다.
세치 혀바닥으로 거란의 80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유명한 서희장군이 바로 서신일의 손주이다.
리천서씨와 대구서씨 등은 서신일의 후손이라고도 하고있다.
리천서씨보다 더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는것이 부여(夫餘)서씨라고 한다.
부여서씨에게는 단군(檀君)에게서 성을 받았다는 사성(賜姓)전설이 있다.
사성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옛적 단군때의 일이다.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으로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있었다.그에게는 인물이 출중하고 재능이 남다른 아홉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들은 여러 고을을 다스렸는데 상벌이 뚜렷하였고 고을에서 제기되는 정사를 매우 원만하게 처리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따랐고 고을들에는 화평한 분위기가 넘쳐났다.
이에 단군은 여수기와 그의 아들들에게 서씨를 성으로 하사하였다.
사성전설은 대략 이러하다.
전설에 있는것처럼 단군시기에 성을 썼는지 쓰지 않았는지는 아직 정확한 자료가 없다.그리고 전설속의 인물들 즉 여수기와 그의 아홉 아들이 실재하였던 사람인지 아니면 말그대로 전설속의 인물인지는 잘 알수 없다.
그러나 이 전설에서 한가지만은 명확한것이 있다.
그것은 서씨의 후손들이 자기들을 슬기로운 단군의 자손임을 강조한것이다.
조선민족의 원시조이며 첫 건국시조인 단군에게서 성을 하사받았다고 하는것은 단군의 후예임을 자랑높이 노래한것이며 자기 조상의 전통성을 강조한것이다.
이밖에도 서씨에는 의녕(宜寧)서씨,황산(黃山)서씨,군위(軍威)서씨 등 많이 있지만 이들의 조상은 대개 주부(主簿)나 호장(戶長) 기껏해야 군수(郡守) 정도의 벼슬을 한데 지나지 않았다.
서씨로서 유명한 사람은 리천서씨의 갈래인 당성(唐城-남양〔南陽〕의 별칭)서씨의 시조 서득부(徐得富)의 후손인 서경덕(徐敬德)이다.그는 조선뿐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진 유명한 철학자였다.
최(崔)씨에 대하여
최(崔)씨는 김,리,박씨 다음으로 머리수가 많은 성이다.본관수는 326개 향에 달한다.
최씨가운데서 가장 유명하고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는것은 경주(慶州)최씨이다.
지금 많은 족보책들이 경주최씨의 시조를 최치원(崔致遠)으로 밝히고있다.
그러나 력사자료에는 경주최씨가 최치원대에 생긴것이 아니라 썩 이전인 신라(新羅)건국때에 생겼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옛날 고조선유민들이 나라가 망하면서 조선반도 동남쪽에 많이 옮겨가 살게 되였다.그들이 오늘의 경주일대에서 세운 나라가 신라였다.
고조선때부터 성을 가지고있던 고조선유민들은 경주일대에 가서 살면서 자기의 성을 한자식으로 정리하였다.이때에 김씨,박씨,최씨 등의 성이 생겨났다.
최씨는 신라 6부(6촌)를 구성한 오랜 부족집단을 대표하는 성이였다.최씨가 사는곳을 본피부(本彼部)라 하였다.
최치원은 바로 경주 본피부출신이였다.그는 자를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고 하였는데 머리가 뛰여나게 좋았다고 한다.그는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잘하였고 12살때에 당나라에 류학을 갔다.
그가 당나라 사신을 따라 류학을 떠나던 날 아버지가 이렇게 훈계했다고 한다.
《10년이 되도록 과거급제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최치원은 아버지의 훈계를 명심하고 공부에 일심전력을 다하였다.
몇년후 당나라에서 과거시험에 나선 최치원은 그 나라 사람들을 누르고 단연 으뜸으로 합격하였다.
그의 재주가 얼마나 뛰여났던지 당나라 군총사령관은 그를 자기의 종사관(비서장 겸 서기)으로 임명하였다.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최치원은 28살이 되던 해에 고국인 신라로 돌아왔다.
그때 당나라 친구 한사람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그를 찬양하였다.
계림(조선을 말함)땅에 기이한 인재 태여났네
열두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중국의 온 나라를 문장으로 진감시켰다네
열여덟에 문단싸움 휩쓸고 다니면서
첫 화살로 과녁 맞히듯
으뜸으로 급제했네
이 시에는 당나라에서의 최치원의 활동이 집약되여있다.그는 당시 문화가 세계적수준에서 발전하고있던 당나라에 가서 크게 이름을 떨친 사람이였다.
최치원이 고국에 돌아왔을 때 신라는 봉건관료배들의 썩은 정치로 하여 쇠퇴몰락하고있었다.어지러운 세상에서 최치원이 배운 학문과 뜻은 쓰이지 못하였다.
현실에 환멸을 느낀 최치원은 산속에 파묻혀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때 그는 《신라는 누런 잎이요.고려는 푸른 솔이라.》고 하면서 어지러운 신라는 쇠퇴하고 고려가 흥하리라는것을 암시하였다.
멸망의 위기에 처한 신라의 운명을 한탄한데로부터 최치원은 당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사상을 가지게 되였다.
그러나 10대,20대에 벌써 시와 문장으로 온 당나라땅을 들었다놓은 최치원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생겨났다.특히 최씨문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최치원을 시조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최치원에게는 계원필경(桂苑筆耕)이라는 문집 20권이 있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있다.
최씨에는 계림(鷄林)최씨가 있다.계림최씨의 시조는 경주사람으로서 계림(경주)태수를 지낸바 있는 최윤순(崔允順)이다.결국 계림최씨도 본은 경주에 두고있다.
이밖에도 1천여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는 최씨에는 동주(東州)최씨가 있다.오늘의 강원도 철원을 동주라고 불렀다.
동주최씨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이였으며 태사(太師)였던 최준옹(崔俊邕)이다.
최씨에는 또한 해주(海州)최씨(시조 최본),강릉(江陵)최씨(시조 최필달),충주(忠州)최씨(시조 최우청),통천(通川)최씨 등 많은 최씨가 있다.
통천최씨의 시조 최록(崔祿)은 그닥 이름난 장수가 아니였다.고려말에 호군(護軍)벼슬을 하던 그는 이웃나라에서 일어났던 반란을 진압할 때에 군공을 세운바가 있을뿐이다.
최록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고려말 리조초에 무훈으로 소문난 최운해(崔雲海)였다.최운해의 아들 최윤덕도 외적을 치는데서 력사에 기록을 남기였다.최운해,최윤덕부자는 왜구격퇴에 한생을 바친 출중한 무장이였다.이처럼 통천최씨는 3대에 걸쳐 무장이 배출된것으로 하여 유명해졌다.
일설에는 최록의 아들 최운해가 유명해진데는 그가 왜구격멸에서 무공을 세웠을뿐아니라 몹시 사나운 안해를 데리고 살았기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최운해의 부인 권씨는 어찌나 사나왔던지 언제인가는 검으로 남편을 치려고까지 했는데 최운해가 가까스로 빠져나가 목숨을 건졌다는 여담도 있다.
최씨는 그 수가 많은것처럼 력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도 또한 많다.
강(姜)씨에 대하여
우리 나라에는 강(姜)씨가 매우 많다.그래서 강씨를 대성(大姓)의 하나라고 한다.
강씨들의 족보에는 그 조상이 중국사람으로 되여있는것이 많다.거기에는 강씨가 중국의 신농(神農)씨의 후손인데 그들이 강수(姜水)라는곳에서 살았기때문에 그로 인하여 강(姜)으로 성을 삼았다고 하고있다.
신농이란 중국고대의 전설에서 나오는 신으로서 음양오행(陰陽五行)에서 말하는 화덕(火德)을 가졌다고 하는 신화적인물이다.일명 염제(炎帝)라고도 한다.
력사에 있었던 인물도 아닌 신화속의 인물을 자기네 조상이라고 하는것은 허황하기 짝이 없다.
앞에서 취급된 성씨유래기에 나오는 고주몽이나 김수로도 그 출생과 비상한 재주 등이 신격화되여있다.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우리 나라 력사에 실재한 인물들이다.
이런것으로 미루어보아 신농에서의 강씨유래설은 리조때에 강씨문중의 사람들이 꾸며낸것이 틀림없는것 같다.
강씨의 본은 104개 향관으로 알려져있다.
강씨에서 가장 유명한 본은 진주(晉州)강씨이다.
진주강씨의 시조는 고구려사람인 강이식(姜以式)이다.족보에 의하면 강이식은 고구려의 병마원수(兵馬元帥 륙군사령관)로서 612년 수나라 양제(煬帝)가 300만의 대군으로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적들을 용감히 무찔렀다고 한다.
그러나 력사는 을지문덕장군이 수나라 300만 대군을 쳐물리쳤다고 하고있다.
족보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고구려에는 또 한명의 유명한 장수가 있은것으로 된다.아마도 을지문덕장군이 고구려군의 총사령관이였으니 강이식은 그밑에서 고구려의 륙군을 통솔한것 같다.
진주강씨는 이렇게 고구려의 명문거족이였기에 후세에 이르면서 갈래가 많아졌고 또 명장명사(名將名士)들도 많이 배출되였다.
진주강씨출신으로서 강민첨(姜民瞻)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고려의 7대왕 목종(穆宗 998-1009)때 벼슬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기개가 강직하고 뜻이 컸다.
강민첨은 거란의 제3차침입때 강감찬장군의 밑에서 대장군(부사령관)으로 싸웠는데 그 공이 매우 컸다.
싸움이 끝난 다음 일등공신은 강감찬이 차지하고 버금가는 공로는 강민첨이 차지하였다.
강민첨은 반거란침략전쟁때의 공로로 하여 후세에 그 이름이 널리 전해졌다.
그의 초상은 고려국가의 공신각(功臣閣 고려에서 력대공신들의 초상을 그려놓은 전각)에 새겨져 길이길이 전해지게 되였다.
금천(衿川)강씨 또한 유명하다.
금천은 금주(衿州,●{黑+今}州)라고도 부르는데 오늘의 경기도에 있다.
신라때에 강여청(姜餘淸)이란 사람이 경기도 시흥군(始興郡)에서 살았는데 그가 금천강씨를 칭하여 시조로 되였다 한다.
강여청의 4세손인 강궁진(姜弓珍)은 고려의 태조 왕건을 섬기여 고려창건에 참여하였다.그후 그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칭호를 받았다.
이 강궁진의 아들이 조선력사에서 3대명장의 한사람으로 불리우는 애국명장 강감찬이다.
강감찬은 무인이 아니였다.어려서 글공부를 좋아하던 그는 과거급제에 1등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체소한 몸집과 보잘것없고 떨치지 못한 용모를 보아서는 무인은 고사하고 지략과 담력이 있을상싶지 않았건만 국가대사를 의논하는 마당에 들어서기만 하면 큰 선에서 문제를 큼직큼직하게 세우고 완강하게 밀고나갔다.
말그대로 국가대사를 안고 움직일 때의 강감찬은 《거인》(巨人)이였다.
이런 강감찬은 거란의 제3차침입때에는 고려군의 총대장이 되였다.슬기에 넘쳤던 강감찬은 대담한 작전과 지략으로 거란의 대군을 보기 좋게 물리쳤다.
애국자,백전로장으로서의 그의 이름은 조국력사에 길이 알려지게 되였고 후세사람들은 그와 같은 조상을 가지고있는것을 자랑으로 여기게 되였다.
강감찬의 17세손으로 강석기(姜碩期)라는 사람이 있다.그는 리조시기에 우의정,령의정까지 하였다.그의 호는 월당(月塘)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강씨에는 안동(安東)강씨,배천(白川)강씨,해미(海美)강씨,동복(同福)강씨,광주(光州)강씨 등 많은 강씨가 있다.
[조국사제공 99/09/18]
--- 끝 ---
▣ 김항용 -
▣ 솔내영환 - 잘 읽엇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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