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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학자의 시각에서 본 성씨의유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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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미 작성일02-12-30 03:49 조회1,8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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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와 관련한 언급에서 안동김씨의 시조를  김일긍(金日兢)으로 보고있는것이 특이 합니다.

 

---1편에 이어서 계속---

 

김(金)씨에 대하여

 우리 나라에는 경주(慶州)김씨를 비롯하여 본관이 500개나 되는 김씨가 있다.

 500개나 되는 김씨의 본관가운데서 기본은 경주김씨와 김해(金海)김씨이다.나머지 김씨는 이 두개 김씨로부터 갈라져나온 김씨들이다.

 경주김씨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아득히 먼 옛날이였다.

 어느날 깊은 밤에 신라의 수도 금성(金城.오늘의 경주) 서쪽의 숲속에서 닭우는 소리가 났다.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고있던 때에 왕궁에서 그 연고를 알아보게 하였다.

 그래서 포공이란 사람이 닭의 울음소리를 쫓아 숲속에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흰닭이 목청을 돋구어 《꼬끼오!》 하고 울고있는데 머리우의 나무가지에는 자그마한 금궤(金櫃)가 걸려있었다.

 포공은 왕궁에 돌아가 임금에게 자기가 보고온것을 그대로 이야기하였다.임금은 즉시 령을 내려 그 금궤를 가져오도록 하였다.

 사람들은 금궤를 존중히 받들고 궁궐로 들어갔다.

 뭇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속에서 금궤를 열었더니 그속에서 귀여운 사내애가 나타났다.총각애는 용모가 기이하고 매우 아름답게 생기였다.

 왕은 몹시 기뻐했다.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준 아들이 아니겠는가!》

 왕은 금궤속에서 나온 총각애를 자기의 수양아들로 삼았다.총각애는 총명하고 지혜가 깊었다.그리하여 그의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지었다.

 알지는 금궤에서 나왔다고 성을 금(김)으로 쓰게 하였다.

 그 김알지가 경주김씨의 조상인것이다.

 그후 알지의 후손들이 신라에서 박가 대신 임금으로 되였다.

 이 경주김씨의 후손들은 후에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광주(光州)김씨의 시조는 신라 헌강왕의 셋째 아들 김흥광(金興光)이였고 안동(安東)김씨의 시조도 신라 경순왕(신라의 마지막 왕)의 후손인 김일긍(金日兢)이였다그는 고려초기 태사대광이라는 높은 벼슬을 하면서 안동김씨를 칭하였다.

 강릉(江陵)김씨의 시조 김주원(金周元)도 신라의 김춘추(金春秋)의 5세손인 김유정(金惟靖)이 시작한것이고 연안(延安)김씨의 시조도 신라의 왕자였다고 한다.전설에 의하면 신라에 두 왕자가 있었는데 임금(부왕)에게 간(諫.임금의 잘못을 타이르는것)하였더니 독같이 성이 난 임금은 형을 강릉에 귀양보내고 동생은 연안에 귀양보냈다고 한다.이것이 강릉과 연안 김씨의 시작이라고 한다.

 경주김씨에 맞먹거나 또는 그보다 더 오랜 김씨는 김해(金海)김씨이다.

 김해김씨의 조상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옛적 오늘의 경상남도 김해땅에 아홉명의 추장들이 있었다.아홉 추장은 7만 5천명의 백성들을 거느리고있었다.

 어느날 구지산 북쪽에서 무슨 수상한 소리가 났다.아홉 추장이 2백∼3백명의 무리를 이끌고 기척이 나는데로 갔더니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나는것이였다.

  《거기 누가 있느냐?》
  《우리들이 있습니다.》
  아홉 추장이 대답하였다.
  《내가 있는곳이 어디인고?》
  《구지(龜旨)외다.》
  《하느님이 나에게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그래서 나는 여기에 내려왔다.너희들은 봉우리 꼭대기의 흙 한줌씩을 쥐고 노래를 불러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으라!
 내밀지를 않으면
 불에 구워먹겠다.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면 대왕을 마중하여 즐겨 뛰노는것으로 될것이다.》

 아홉 추장들이 그의 말대로 모두 즐겨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그러자 보라빛 노끈이 하늘로부터 드리워 땅에 닿았고 노끈끝에는 빨간 보로 싼 금합(金合)이 있었다.

 합을 열어보니 해같이 둥근 황금알 6개가 있었다.뭇사람들은 놀랍고 기뻐서 함께 몇번이나 꾸벅꾸벅 절을 하였다.잠시후 그들은 알을 정히 싸서 첫째가는 추장 아도간(我刀干)의 집 탁자우에 올려놓았다.

 그후 12시간이 지난 뒤 합을 다시 열었더니 이게 웬일인가.여섯개의 알이 총각애로 변하고있는것이 아니겠는가.

 뭇사람들은 또다시 절을 하고 공경해마지 않았다.

 첫번째 알로부터 맨먼저 사람으로 변한것이 제일 용모가 출중한 총각애였다.그가 먼저 나타났다고 하여 수로(首露)라고 하였으며 금알이 변했다 하여 김(金)씨로 성을 달았다.

 김수로는 김해땅에서 임금이 되였고 나머지 다섯도 여러곳의 작은 나라의 임금이 되였는데 이들 여섯 왕이 가야나라들을 다스렸다고 하여 6가야라고 한다.김수로가 김해에 있는 금관국을 다스렸다.

 이것이 가야(6가야,가라라고도 한다.)국의 건국신화이자 김해김씨의 조상유래기이다.

 금관가야국은 5백∼6백년동안 내려오다가 6세기에 들어오면서 신라에 의해 먹히우고말았다.그후 금관 가야국의 많은 왕족들은 신라의 수도 경주로 이사해갔다.신라사람들은 본래부터 있던 김씨와 이사해온 김씨를 구별하기 위하여 특별히 원래부터 있던 김씨를 경주김씨,후에 들어온 김씨를 그곳 지명을 따서 김해김씨라고 불렀다.

 나머지 김씨에 대하여 간단히 보고 넘어가자.

 금녕(金寧)김씨의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6세손인 김봉린의 넷째 아들이라고 한다.그는 고려 인종(仁宗.1123-1146)때 공로를 세웠다.

 순천(順天)김씨는 신라 경주김씨에서 갈라져나왔다.순천김씨는 원래 경주김씨였던 김총이 순천지방으로 이사를 간후 생긴것이고 청도(淸道)김씨의 시조 김지대(金之岱)는 고려 고종(高宗.1214-1259)때에 본성을 칭하였다.

 그밖에도 상주(尙州)김씨(시조 김유 金儒.신라 경순왕의 후손),영동(永同)김씨,원주(原州)김씨 등 숱한 김씨가 있으나 이들은 거의나 다 경주김씨와 김해김씨에서 갈라져나왔다.그들은 고려시기와 리조시기에 공로를 세우고 자기가 사는 고장을 본관으로 삼았던것이다.

 

고(高),량(良),부(夫)에 대하여

 고(高)씨와 량(良,梁)씨,부(夫)씨에 대하여 보기로 하자.

 우리 나라의 고씨는 본이 101개나 된다.그중에서 가장 유명한것은 고구려의 왕족의 성이다.고구려의 시조왕 주몽의 성이 고씨였다.그리하여 그의 자손들은 천수백년동안 대대로 고씨를 칭하여왔다.

 주몽이 성을 고씨로 삼게 된것은 고구려의 건국유래와 밀접히 련관되여있다.그 유래를 살펴보기로 하자.

 비상한 재주를 지니고 북부여의 왕궁에서 태여난 고주몽은 항상 부여왕의 왕자들로부터 심한 시기와 중상을 당하였다.지어 여러 왕자와 신하들은 그의 재주를 시기하여 그를 죽여버리려고 하였다.

 이 무서운 음모를 주몽의 어머니가 알게 되였다.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치려고 한다.네 재간으로 어디에 간들 성공하지 못하겠느냐.여기서 우물쭈물 머뭇거려 수치를 당하느니보다 먼곳에 가서 큰일을 하는것이 나을것이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주몽은 친하게 지내던 오이,마리,협부 세명과 함께 부여를 떠났다.

 주몽일행은 모둔곡이라 부르는곳에 이르러 삼베옷을 입은 사람,중의 옷을 입은 사람,마름옷을 입은 사람 등 세명을 만나게 되였다.

 주몽이 이들에게 《그대들은 어떤 사람이며 이름은 무엇인가?》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나의 이름은 재사요.》,《나는 무골이요.》,《나는 묵거라 부르오.》라고 일일이 대답하였다.그러면서 그들은 주몽이 자기들을 거두어주기를 청하였다.

 주몽은 그들의 요구를 쾌히 받아들여 재사에게는 극(克)씨를,무골에게는 중실(仲室)씨를,묵거에게는 소실(少室)씨를 주었다.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명을 받아서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데 마침 어진 그대들을 만났으니 이는 하늘이 내게 준 복이로다.》

 주몽은 이렇게 기뻐하며 이들에게 각기 일을 맡기고 일행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이곳은 땅이 비옥하고 산천이 준험하여 천연의 요새를 이루었다.

 드디여 주몽은 여기에 자리를 정하고 이곳을 도읍으로 하였다.그리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다.

 이렇게 나라를 세운 주몽은 자기의 성을 고(高)씨로 하였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살이였다.

 이렇게 고구려의 건국으로부터 고주몽의 자손들은 대대로 고씨로 부르게 되였으며 많은 귀족들이 고씨성을 가지였다.

 고구려가 망하면서 많은 고씨들이 당나라에 끌려갔다.그러나 적지 않은 고씨들이 이국에 끌려가는것을 반대하여 동족의 나라인 신라에 넘어갔다.

 실례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족속인 고안승(高安勝)은 황해도 재령일대(오늘의 신원군과 재령군 일대의 장수산주변)에 고구려국을 재건하였다가 정사가 잘되지 않자 신라땅에 들어갔다.

 이렇게 고구려의 왕족 고씨는 우리 나라 남쪽에로 많이 옮겨갔다.

 한편 고구려가 망한후 고구려의 유민들은 발해를 세웠다.발해에는 고씨가 적지 않았는데 이들이 고려건국후 동족의 나라인 고려에 들어갔으므로 고려에도 고씨가 많았다고 한다.

 101개의 본관을 가지고있는 고씨는 제주도의 고씨와 개성 고씨,연안 고씨,담양 고씨 등 14개의 본이 기본을 이루며 나머지는 여기서 갈라져나온 가지본들이다.이들중에는 장흥(長興)고씨처럼 제주도 고씨가 장흥에 옮겨와서 새로이 장흥 고씨로 본을 삼은것도 있다.장흥 고씨중에는 고경명(高敬命)과 같이 임진조국전쟁때 영용하게 싸운 애국명장도 있다.

 고구려 고씨 다음으로 유명한 고씨는 제주 고씨이다.

 제주 고씨는 제주도개벽신화와 련관되여있으며 량씨와 부씨와도 관계되는 조상유래기를 가지고있다.그 유래기는 다음과 같다.

 먼 옛날 제주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그런데 언제인가 땅속으로부터 3명의 신이 솟아나왔다.

 이 세명의 신인(神人)은 맏이를 고을나(高乙那)라고 했고 둘째를 량을나(良乙那)라고 하였다.그리고 막내를 부을나(夫乙那)라고 불렀다.

 그들이 제주도에서 살기 시작하여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 동해쪽에서 해빛에 번쩍이는 큰 돌함이 떠내려왔다.

 세 신은 신기한 그 돌함을 건져 뭍으로 올려왔다.

 돌함은 굳게 닫겨있었는데 거기에는 《절대로 다치지 말지어다.》라는 어마어마한 명이 씌여져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세 신은 잠시 주저하지 않을수 없었다.그러나 끝내 젊은 신들의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기고말았다.그들은 봉인을 뜯고 돌함뚜껑을 열었다.

 세 신은 머리를 맞대고 돌함속을 들여다보았다.돌함속에는 사람의 눈을 시리게 하는 그 무엇이 빛나고있었다.

 실눈을 하고 자세히 여겨보니 하늘의 선녀인가,천상궁궐의 궁녀인가 아름답게 단장을 하고 금실은실을 휘감은 녀인 세명이 수태를 함뿍 머금고 다소곳이 인사를 하는것이였다.

 녀인들의 미모에 세 신은 완전히 넋을 빼앗기고말았다.이러기를 한참,잠시후 정신을 가다듬은 맏이 고을나가 손을 내밀어 녀인들에게 어서 밖으로 나오라고 청하였다.

 녀인들은 밖으로 나왔다.해빛을 받은 녀인들의 모습은 더욱 황홀히 빛났다.

 《그대들은 누구이며 어찌하여 돌함을 타고 이처럼 험한 바다를 건너왔는고?》

 맏이 고을나의 물음에 녀인들이 대답하였다.

 《저희들은 동해 벽랑국(壁浪國) 국왕의 딸들이옵니다.부왕께서 남해의 큰 섬에 세 신이 나타났다고 하니 거기 가서 락을 누리라 하옵기에 분부를 받들어 이렇게 돌함을 타고 찾아왔습니다.》

 세 신의 기쁨은 한량없었다.

 이리하여 세 신과 세 녀인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한해에 한쌍씩 시집장가를 가기로 하였다.

 세 신,세 녀인은 하늘을 향하여 화살 석대를 쏘았다.매 화살에는 표식을 해놓았는데 화살이 떨어지는곳에서 매 부부가 살도록 하자는것이였다.

 첫번째 고을나의 화살이 제일 좋은 땅에 떨어지고 나머지 화살도 둘째,셋째의 순위로 좋은 땅에 떨어졌다.

 세 신은 화살들이 떨어진곳에 각기 자리를 잡고 살게 되였다.

 그후 자손이 퍼져 제주도가 하나의 나라로 되였다.이 나라에서는 고(高)씨가 대대로 임금이 되였고 량(良,梁)씨가 신하가 되였으며 부(夫)씨는 백성으로 살았다.

 세 녀인은 섬에 올 때 망아지와 송아지들 그리고 오곡의 씨도 가지고왔다.

 이것이 제주땅에 퍼졌다.그리하여 제주도에는 좋은 말과 소 그리고 오곡이 잘되였다고 전해오고있다.

 지금도 제주도에는 세 신이 나왔다는 흙구멍이 있다.이 흙구멍은 삼성사(三姓祠),라고 하며 사람들이 여기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제주도에는 세 신의 후손이라고 하는 고,량,부씨들이 실로 많다.

 또한 제주도의 녀자들속에 미인이 많은것도 바로 그들의 조상이 그토록 미인이였기때문이라고 하고있다.

 부(夫)씨는 본이 제주 부씨 하나이며 여기서 갈라져나온것이 양주(楊州),행주(幸州),의성(義城),한양(漢陽) 부씨이다.

 량씨는 79향관의 본을 가지고있다.

 제주 량씨가 남원(南原)량씨로 갈라져나갔다.

 량씨에는 이밖에 충주(忠州) 량씨,양주(楊州) 량씨,라주(羅州) 량씨,림천(林川) 량씨,청주(淸州) 량씨 등이 있다.

 

문(文)씨에 대하여

 문(文)씨는 132개의 향관을 가지고있는 비교적 많은 성의 하나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에 의하면 문씨중에서 제일 력사가 오래고 유명한 문씨는 남평(南平)문씨이다.

 남평문씨는 경상남도 사천군 남양면에 있는 문벌이다.

 남평문씨의 시조는 고려초기의 공신이였던 문다성(文多省)이라고 한다.문다성은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에 남평백 무성공(南平伯 武成公)이라는 높은 작위를 받았다.그는 14살때에 대사도(大司徒)가 되고 18살에 대사마(大司馬)가 되였다고 한다.여기에는 과장이 조금 섞인것 같다.아마도 문다성의 후손들이 자기들의 조상을 내세우느라고 사실에 얼마간 보탠것 같다.

 남평문씨는 조상이 바위짬에서 나왔다는 유래가 전해지고있다.

 사람이 손오공처럼 바위짬에서 나왔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으며 오늘에 와서 그것을 믿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경상남도 사천군에 가면 문씨의 조상이 나왔다는 바위가 있는데 지금도 그 후손들이 이곳에 제사를 지내고있다고 한다.

 문다성의 먼 후손으로 문태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어느날 밤에 그가 잠에 들었는데 꿈에 백발로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이제 남쪽에서 란리가 일어나니 피난을 하여야 하느니라.피난하는곳은 그대들 조상이 나온 바위가 제일 좋으니라.》라고 하는것이였다.

 문태봉이 로인을 쫓아가다 눈을 뜨니 꿈이였다.

 문태봉은 머리를 기웃거렸지만 조상의 덕으로 오늘의 이생이 있는데 조상의 계시(啓示)를 어찌 소홀히 할수 있을소냐 하며 일가족속을 몽땅 거느리고 백발로인이 가리킨 동굴속깊이에 숨었다.

 그로부터 얼마후에 란리가 터지고 숱한 백성들이 침략자의 칼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동굴속에 숨은 문씨일가는 화를 당하지 않고 난을 무사히 넘겨 오늘까지 번성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조상이 났다고 하는 바위에 정성껏 제를 올리는지…

 남평문씨 다음으로 많은 문씨는 단성(丹城)문씨이다.

 단성문씨의 조상은 고려의 유명한 애국자 문익점(文益漸)이다.

 문익점은 우리 나라에서 목화재배의 력사를 창조한 애국자로서 조선사람이면 누구나가 다 잘 아는 사람이다.

 문익점은 사신으로 중국 원(元)나라에 갔을 때 운남지방에서 목화씨 10알을 붓대속에 몰래 넣었다.당시 원나라에서는 목화씨가 다른 나라에 나가는것을 금지하고있었던것이다.

 문익점이 고려에 돌아오는 길은 헐치 않았다.그것은 반역의 무리들이 그를 고려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을뿐아니라 고국에서는 또 문익점을 역적들과 공모하였다고 하면서 그를 파직시켰던것이다.

 간난신고끝에 고향에 돌아온 문익점은 목화씨 5알은 장인인 정천익(鄭天益)에게 주고 나머지 5알은 자기가 심었다.

 문익점의 밭에 심은 목화는 제대로 되지 않았으나 정천익의 밭에 심은 목화에서는 100알의 씨를 받는데 성공하였다.이리하여 고려에서 목화재배의 력사가 시작되였다.

 3년후 문익점은 목화씨를 고향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심게 하였는데 10년이 못되여 그것은 온 나라에 퍼지게 되였다.

 그리하여 삼베와 모시,명주밖에 없던 우리 나라에 비로소 무명천이 생겨나게 되였다.

 일본의 목화도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가 15세기에 일본에 넘어가 퍼진것이라고 한다.

 문익점으로 말하면 남평문씨의 시조 문다성의 11세손이라고 한다.이렇게 놓고보면 단성문씨도 결국 남평문씨에서 갈라져나왔다고 봐야 할것이다.

 문씨에는 남평문씨,단성문씨외에 장연(長淵)문씨,릉성(綾城)문씨,선산(善山)문씨 등 11개의 본이 기본을 이룬다.

 개녕(開寧)문씨는 문익점의 후손인 문세욱(文世郁)이 시조가 되여 생겨난것이다.

 감천(甘泉)문씨의 시조 문원길은 경주김씨였는데 문장을 잘 짓는다고 칭찬을 받고 문씨로 성을 고쳤다 한다.

 이렇게 문장을 잘 짓는다고 하여 문씨로 성을 바꾼것은 정선(旌善)문씨의 시조 문림간(文林幹)을 비롯하여 몇씨 더 있다.문림간의 본래 성은 전(全)씨였다.

 

왕(王)씨에 대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있는 우리 나라 왕씨의 본은 15향관이다.여기에서 기본은 고려태조 왕건을 조상으로 하는 개성왕씨와 강릉(江陵)왕씨,해주(海州)왕씨들이 기본을 이루고있다.

 그러나 해주와 강릉의 왕씨들도 그 조상을 따지면 왕건의 아들이거나 왕건에게서 성을 받아 왕씨로 된 사람들이다.강릉왕씨는 왕건의 아들이 분가하여 시작된것이고 해주왕씨의 시조는 본래 박가였으나 왕건에게서 왕씨를 하사받아 왕씨로 되였다.

 이러한 자료들에 비추어 어떤 사람들은 우리 나라 왕씨가 고려태조 왕건으로부터 시작된것으로 알고있는데 력사적사실은 이와는 다르다.

 우리 나라에서 왕씨는 고려가 건국된 10세기가 아니라 그보다 썩 우로 거슬러오른다.

 기록과 전설에 의하면 벌써 고조선시기에 우리 나라에는 왕수긍(王受兢),왕몽(王蒙) 등 왕씨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에도 왕씨가 있었다.칠현금을 만든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이 그 실례로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산악은 이미 있던 칠현금(七絃琴)의 본래 모양을 보존하면서 그것을 개량하였다.그는 정력적인 창작을 하여 100여곡의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왕산악은 현금을 기막히게 잘 탔다고 한다.그가 현금을 탈 때면 검은 학이 날아와서 노래가락에 맞추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는 기록까지 남아있다.그리하여 왕산악이 만든 현금을 일명 현학금(絃鶴琴)이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한다.

 이렇게 왕씨는 우리 나라에서 첫 고대국가인 고조선과 강성대국으로 자랑떨친 고구려에도 있었다.

 개성왕씨의 시조 왕건은 고구려사람의 후손이였다.그의 조상은 고구려의 벼슬을 하던 성골(聖骨)장군이였다.력사기록에는 성골장군이 백두산에서 내려왔다고 하고있다.

 고려가 동서방에 이름을 날리던 500년동안 왕씨는 《존엄있는 성씨》였다.고려국가를 상징하던 왕씨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선망과 존경의 표징이기도 하였다.이 시기 왕씨는 그 수가 아주 많았다.

 그런데 14세기말에 와서 왕씨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리성계의 횡포한짓때문이였다.

 시골뜨기 촌무사였던 리성계는 왜적과 홍두적을 무찌르는 싸움에서 일정한 공로를 세웠으며 점차 출세의 길을 걷게 되였다.이렇게 벼슬이 높아지자 야심가였던 리성계는 왕권을 탈취할 꿍꿍이를 꾸미였다.그는 자기를 추천해주고 내세워준 선배이며 스승인 최영을 몰아내고 나라의 실권을 쥐였으며 군권을 배경으로 왕위까지 가로채고말았다.

 왕위를 가로챈 리성계는 왕씨들이 웅거해있는 수도 개경(개성)을 떠나서 한양(오늘의 서울)으로 수도옮김을 하였다.

 한양에로 수도를 옮긴 리성계는 고려의 왕족인 왕씨들을 없애버리는데 급급하였다.

 리성계는 저들에게 조금이라도 반항하거나 사소한 불평이라도 품고있는 왕씨들과 고려의 신하였던 사람들을 가차없이 처단해버리였다.뿐만아니라 자기들에게 반항하지 않더라도 고려의 왕과 가까운 친척들은 모조리 죽이였으며 왕과 먼 친척벌이 되는 사람들은 외진 섬에 귀양을 보내였다.자료에 의하면 리성계와 그 일파는 왕씨들을 태운 배를 무인도에 보냈는데 그 배는 깊은 바다에 나와서 밑창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물이 새여들어와 바다에 가라앉았다.대부분의 왕씨들은 바다에 빠져 죽었으나 헤염을 칠줄 아는 몇사람만이 요행 뭍에 오르게 되였다.그러나 그곳에서는 대기하고있던 무사들의 서리발 칼날이 왕씨들의 목을 잘라버리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렇게 리성계는 피비린내나는 학살만행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이 류혈참극속에서 왕족과는 거리가 먼 왕씨들도 공포로 날을 보냈다.그들은 자기들에게 들씌워질 죽음을 피하여 정든 고장을 떠나 변성명하기 시작했다.

 무지막지한 폭압속에서 가련한 목숨을 살리자니 조상이 물려준 성을 버릴수밖에 없었다.눈앞에 닥쳐온 화를 모면하기 위한 미봉지책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왕(王)자에 점을 하나 찍어 옥(玉)씨로,좌우에 획을 내리그어 전(田)씨로,거기에 아래우 꼬리를 달아 신(申)씨로,신자의 아래우에 가로획을 그어 차(車)씨로 둔갑하게 되였다.

 우리 나라에 왕씨의 본이 적고(15향관) 왕씨가 적은것은 바로 이와 같은 력사의 비극에 기인한다.

 아마도 리성계의 《왕씨멸족작전》이 없었더라면 우리 나라에서 왕씨는 10대 저성에 속할수 있을것이다.

 이러나저러나간에 우리 나라의 왕씨는 고조선이래로 면면히 이어지고있는 력사가 아주 오랜 성이다.

---3편에 계속---




▣ 김항용 -
▣ 솔내 - 감사합니다.
▣ 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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