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사공 金士廉 ③(아들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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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9-12 19:41 조회2,362회 댓글0건본문
안렴사공 金士廉 ③(아들 손자)
▣ 김사렴의 아들과 손자들의 묘소와 약간의 행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1자 金侃(김간)은
안찰사를 지내고 배위는 광주인 김회조의 여이다
1993년 김용선 편저로 한림대학교에서 발간한 [고려묘지성집성]에 있는
1380년 (우왕6년 경신)에 만들어진 윤해묘지명 (파평군윤공묘지명 병서)을 보면
金侃(김간)의 장인인 金懷祖는 당시 판내부사를
金侃은 護軍을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호군護軍)은 고려·조선 시대 정사품의 무관직으로
고려 공민왕 때 장군(將軍)을 고친 것이다. 오위(五衛)에 속하였던 정사품의 무관으로, 1392년 건국 초에는 12명의 정원을 두었으나 명종 때 8명을 감원하였다. 호군은 후에 문관·무관·음관(蔭官)에서 임명하고 봉록(俸祿)만을 지급, 실제 직무는 맡지 않았다.
*오위(五衛)는 조선 전기의 중앙 군제(軍制)로
1393년(태조 2) 태조는 고려 때의 삼군총제부(三軍摠制府)를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칭하여 여기에 종래의 10위군(衛軍)을 중·좌·우군의 3군으로 나누어 귀속시켜 최초의 강력한 중앙군사체제를 갖추었다.
★按廉使(안렴사) ; 고려 때 집아장관으로 절도사. 안찰사라고도 한다. 지금의 광역시장. 도지사.
묘소는 목령 하사동 술좌에 (충북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웅대한 방호석실로 문관석이 있었고 위토는 330평이며, 묘하 양청동 방예손 일계에서 세사를 봉행하여 왔다.
1998년 복현리 분토동 용미상 임좌 예경묘원으로 (충북 청원군 오창면 복현리) 이안하였다. 이안하는 과정에서 고려동경으로 추정되는 면경(경8cm, 후3mm) 이 발굴되어 현재 안렴사공 김사렴의 재실인 영모재에서 보관하고 있다.
면경은 직경 8cm, 厚3mm의 원형물건인데 표면은 약간 凸형으로 고운 면을 갖고 있으며 배면은 운용문이 조각되어 있고 중앙에 꼭지가 있고 위에는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슬끈으로 꾀었든 듯하였다. 전문가의 감정이 있어야 하겠지만 고려동경일 것으로 판단된다.
⊙ 5자 金 (김약)은
소윤을 지내고
배위는 순천인 박원상의 여이다
★소윤(少尹)은 고려시대의 관직으로
전중감(殿中監)·전중시(殿中寺)·위위시(衛尉寺)·예빈시(禮賓寺)·대부시(大府寺)·소부시(小府寺)·군자시(軍資寺)·사재시(司宰寺) 등에 둔 종4품관이다. 문종 때에는 시 또는 그 전신이 되는 관서에 종4품직의 소경이 있었는데 충선왕 때에 소윤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묘소는 목천현 백락촌에 있었으나 실전되었고, 1946년 오은공 묘하에 설단하였다가 1998년 복현리 분토동 용미상 임좌 예경묘원에 영분을 모시었다. 위토는 답 1,053평, 전 464평이 있다.
소윤공 휘 (약)은 아들 지주사공 遇周(우주)와 더불어 오은공을 평총으로 모시고 별세하여 부자 역시 평총으로 하였다. 오은 안렴사공 증손 휘丸은 상대의 고향인 오근에서 출사하기가 미안하여 여주땅으로 이거한 후 과시에 합격하여 승문원판교에 이르렀다.
★지주사(知奏事)는 고려시대 중추원의 속아문인 승지방(承旨房)에 소속된 정3품 관직으로
문종 때 둔 중추원(中樞院)의 관제 정비 때 승선방의 장관급으로 처음 설치하였다. 정원은 1명이었고, 정3품 벼슬로 그 명칭은 자주 바뀌멌다. 1276년(충렬왕 2) 중추원을 밀직사로 고치면서 승선을 승지로, 지주사를 지신사로 고쳤던 것 같다. 1298년에는 밀직사를 광정원으로, 지신사를 도승지로 고치고 종5품으로 격하시켰다. 그러나 곧바로 지주사로 환원시켰으며, 이후 지신사로, 다시 지주사 등으로 그 명칭이 자주 뒤바뀌면서 변화를 되풀이하였다.
*승지방(承旨房)은 고려시대 왕명출납(王命出納)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사(使:정4품) 2명, 부사(副使:종4품) 2명, 판관(判官:종8품) 2명의 관원을 두었는데, 1298년(충렬왕 24) 사림원(司林院)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그후 다시 승지방을 두었다가 1308년 인신사(印信司)로 고쳤다.
⊙ 3자 金 (김위)는
정랑을 지냈고,
★정랑(正郞)은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의 정5품 관직으로
1275년(충렬왕 1) 전기의 상서 6부 및 속사(屬司)인 고공사(考功司)와 도관(都官)을 전리사(典理司:이부·예부)·군부사(軍簿司:병부)·판도사(版圖司:호부·공부)·전법사(典法司:형부) 등 4사(司)와 고공사·도관으로 고치면서 낭중을 개칭한 것이다. 정원은 전리사에 1명, 군부사·전법사·판도사에 각 2명씩 두었다. 1298년에 4사를 전조(銓曹)·병조(兵曹)·민조(民曹)·형조(刑曹)·의조(儀曹)·공조(工曹)의 6조로 바꾸면서 낭중으로 복구하고 정원은 각 3명씩 두되, 그 중 1명은 서반(西班)이 겸직하게 하였다. 1308년에는 직랑(直郞)으로, 1310년(충선왕 2)에는 정랑으로, 1369년에는 직랑으로 바꾸었다가 1372년에 다시 1362년의 관제로 복구하였다.
묘소는 목령에 소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실전된 상태로 있다가 1998년 복현리 분토동 용미상 임좌 예경묘원에 영분을 모시었다.
⊙ 4자 金 (김제)는
일찍이 고려우왕3년(1377) 선광정사 진사과에 등제하고 우왕8년(1382) 홍무임술 문과에 급제하여 관이 도절제사에 승임되고 절도사를 역임하셨으며, 성주인 이원구의 녀와 결혼하였고
★도절제사(都節制使)는 고려 말에 설치된 양계(兩界)지역의 장관으로
1389년(공양왕 1) 종래의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이 이름으로 고쳐 대체로 재추(宰樞)로서 이 직을 맡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군지휘관으로서의 기능이 강하여,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지방 도(道)에 파견되어 작전지휘를 하였다. 후에는 동북면 ·서북면에 각 1명씩 고정배치되어 군사 및 민사를 모두 관장하였다. 또 1390년에는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도절제사를 겸임하였고, 1392년 4월에는 도순문사로 다시 개칭되었다.
★절도사(節度使)는 고려·조선 시대의 외관직(外官職)으로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 14) 지방행정구역을 12주(州)로 나누고 주 장관으로 절도사를 두었다. 1012년(현종 3) 5도호(五都護)·75도(道)를 설치하면서 절도사를 없애고 안무사(按撫使)를 대신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병마절도사(종2품)와 수군절도사(정3품)로 나누어 각 주진(主鎭)을 관장하였다.
묘소는 양지리 목령하 자좌에 있는데, 김제의 1녀는 전의인 이정간(송천서원 배향)의 아들 이사혜에게 출가하여 4남을 낳았는데 이효석(송천서원 배향), 이우석, 이인석, 이인석이다.
도절제사공 김제는 후사가 없어 당시 예속으로 여서 가문에 습승되어 거차 오백여년래 외손봉사를 뫼시어오고 있다.
<오창지>에 보면
山亭은 절제사 김공 제가 세운 정자인데 유지가 창고의 동쪽 몇 리쯤 되는 곳에 있다.
李貞幹 (1360-1439) 다섯째아들 士惠가 안렴사의 아들인 병사 (제)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오근을 별장으로 삼아 왕래하였는데 자손들이 인하여 거주하였다. 송천서원에 (충북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배향되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 6자 金湜(김식)은
진천인 송광우의 녀와 결혼하였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을 지내고, 공은 충북 진천군 문백면 막동에 은거하여 문학으로서 평생을 마치었는데 문하에서 문사가 다수 배출되었다.
★좌랑(佐郞)은 조선시대 6조에 소속되어 있던 정5품 관직으로 각 조(曹)마다 3명씩을 두었으며 병조(兵曹)에는 1명을 더 두었다고 한다.
묘소는 遺命平塚으로 실전되었다가 물후 100여년 후에 충남 천원군 동면 壽南里 後山에서 誌石을 발견하였고 비와 석상이 있었고, 1997년 장손 (김식-1/2김자려- 1/3극) 김극의 유택이 있는 영동군 황간면 회포리 구미촌 후록 유좌에 이안하였다.
이때 진천군 문백면 계산리에 있던 큰아들 직장을 지낸 金自麗(김자려)의 묘소도 (노장우撰 권영구書 비와 석상이 있다) 함께 이안하였다. 둘째아들 서령을 지낸 金自荊(김자형)의 묘는 진천군 문백면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 삼보산에 설단하였다.
★직장(直長)은 고려시대 중앙 관서의 시(寺) ·감(監) ·서(署) ·국(局) ·고(庫) 등에 둔 정 ·종 7품의 관직.
▣ 청주교대 김재윤 교수 (문학박사)가 지은 "여말의 충절 김사렴"을 보면
공은 순흥안씨와 결혼하였는데 그녀의 아버지 문혜공 안원숭은 정당문학 순성군이고, 할아버지 문숙공 안목은 정당문학 순흥군이요, 증조부인 문순공 안우기는 문하찬성 순평군이며, 고조부인 문성공 안향은 당대의 대학자로서 이름을 떨쳤던 분이다. 이로써 미루어보면 공의 처가 역시 공의 가문 못지않은 당대의 이름난 가문이었다.
공은 순흥안씨 사이에 6남 1녀 (7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은 안찰사 侃(간)이고, 셋째는 정랑공 (위), 넷째는 절도사공 (제), 다섯째는 소윤공 (약), 여섯째는 좌랑공 湜(식)이고, 둘째아들 仁庇(인비)는 승문에 출가하였고, 따님은 馬希遠(마희원)에 출가하였다.
다섯째 아들 소윤공은 아들 한 분을 두었는데 諱는 遇周(우주)로 지주사 벼슬을 지냈고, 공의 여섯째 아들 좌랑공은 아들 두 분을 두었는데 장남은 自麗(자려)로 직장 벼슬을 지냈고, 차남은 自荊(자형)으로 서령을 지냈다. 그런데 공의 장남, 차남, 삼남, 사남은 후사가 없어 안타깝게도 대를 잇지 못하였다.
공의 유언으로 남긴 遺命平塚(유명평총)은 공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공의 아들 (약)과 湜(식)은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어받아 역시 평총을 하였는데, (약)의 묘소는 그 뒤 실전되어 설단을 차려 묘하에서 향사를 받들어 왔었고, 湜(식)의 묘소는 다행히 몰후 100여년 만에 충남 천원군 동면 수남리 뒷산에서 誌石이 발견되어 실전을 면할 수 있었다.
또한 (약)의 아들 遇周(우주)는 임종하면서 그 자손에게 이르기를
"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이미 평총을 하셨는데, 내가 어찌 홀로 봉분을 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누대에 걸쳐 내려오는 충절 가문의 넋을 잃지 않으려 하였다. 이는 곧 충효의 본보기가 되었음은 물론 세상 사람들은 공의 가문을 절의대가로 칭송해 왔다.
또한 湜(식)의 둘째아들이며 공의 손자인 自荊(자형)은 임종에 임하여 그 자손에게 이르기를
"충효 두 글자는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遺命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안렴사공 할아버님의 유지를 받들어, 너희들은 앞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지 말며 조상들께서 이루어 놓으신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 고 하였다.
이에 그 자손들 역시 유지를 받들어, 自荊(자형)도 자기 분묘를 평총으로 하도록 일렀고, 그 때문에 지금도 이 분의 묘소를 알 길이 없다. 이 분이 지금 충북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에 있는 삼보산에 설단하여 향사를 올리고 있다.
또한 공의 아들인 侃(간)과 (약), 손자인 遇周(우주)도 공의 유지를 받들어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 김사렴의 아들과 손자들의 묘소와 약간의 행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1자 金侃(김간)은
안찰사를 지내고 배위는 광주인 김회조의 여이다
1993년 김용선 편저로 한림대학교에서 발간한 [고려묘지성집성]에 있는
1380년 (우왕6년 경신)에 만들어진 윤해묘지명 (파평군윤공묘지명 병서)을 보면
金侃(김간)의 장인인 金懷祖는 당시 판내부사를
金侃은 護軍을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호군護軍)은 고려·조선 시대 정사품의 무관직으로
고려 공민왕 때 장군(將軍)을 고친 것이다. 오위(五衛)에 속하였던 정사품의 무관으로, 1392년 건국 초에는 12명의 정원을 두었으나 명종 때 8명을 감원하였다. 호군은 후에 문관·무관·음관(蔭官)에서 임명하고 봉록(俸祿)만을 지급, 실제 직무는 맡지 않았다.
*오위(五衛)는 조선 전기의 중앙 군제(軍制)로
1393년(태조 2) 태조는 고려 때의 삼군총제부(三軍摠制府)를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칭하여 여기에 종래의 10위군(衛軍)을 중·좌·우군의 3군으로 나누어 귀속시켜 최초의 강력한 중앙군사체제를 갖추었다.
★按廉使(안렴사) ; 고려 때 집아장관으로 절도사. 안찰사라고도 한다. 지금의 광역시장. 도지사.
묘소는 목령 하사동 술좌에 (충북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웅대한 방호석실로 문관석이 있었고 위토는 330평이며, 묘하 양청동 방예손 일계에서 세사를 봉행하여 왔다.
1998년 복현리 분토동 용미상 임좌 예경묘원으로 (충북 청원군 오창면 복현리) 이안하였다. 이안하는 과정에서 고려동경으로 추정되는 면경(경8cm, 후3mm) 이 발굴되어 현재 안렴사공 김사렴의 재실인 영모재에서 보관하고 있다.
면경은 직경 8cm, 厚3mm의 원형물건인데 표면은 약간 凸형으로 고운 면을 갖고 있으며 배면은 운용문이 조각되어 있고 중앙에 꼭지가 있고 위에는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슬끈으로 꾀었든 듯하였다. 전문가의 감정이 있어야 하겠지만 고려동경일 것으로 판단된다.
⊙ 5자 金 (김약)은
소윤을 지내고
배위는 순천인 박원상의 여이다
★소윤(少尹)은 고려시대의 관직으로
전중감(殿中監)·전중시(殿中寺)·위위시(衛尉寺)·예빈시(禮賓寺)·대부시(大府寺)·소부시(小府寺)·군자시(軍資寺)·사재시(司宰寺) 등에 둔 종4품관이다. 문종 때에는 시 또는 그 전신이 되는 관서에 종4품직의 소경이 있었는데 충선왕 때에 소윤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묘소는 목천현 백락촌에 있었으나 실전되었고, 1946년 오은공 묘하에 설단하였다가 1998년 복현리 분토동 용미상 임좌 예경묘원에 영분을 모시었다. 위토는 답 1,053평, 전 464평이 있다.
소윤공 휘 (약)은 아들 지주사공 遇周(우주)와 더불어 오은공을 평총으로 모시고 별세하여 부자 역시 평총으로 하였다. 오은 안렴사공 증손 휘丸은 상대의 고향인 오근에서 출사하기가 미안하여 여주땅으로 이거한 후 과시에 합격하여 승문원판교에 이르렀다.
★지주사(知奏事)는 고려시대 중추원의 속아문인 승지방(承旨房)에 소속된 정3품 관직으로
문종 때 둔 중추원(中樞院)의 관제 정비 때 승선방의 장관급으로 처음 설치하였다. 정원은 1명이었고, 정3품 벼슬로 그 명칭은 자주 바뀌멌다. 1276년(충렬왕 2) 중추원을 밀직사로 고치면서 승선을 승지로, 지주사를 지신사로 고쳤던 것 같다. 1298년에는 밀직사를 광정원으로, 지신사를 도승지로 고치고 종5품으로 격하시켰다. 그러나 곧바로 지주사로 환원시켰으며, 이후 지신사로, 다시 지주사 등으로 그 명칭이 자주 뒤바뀌면서 변화를 되풀이하였다.
*승지방(承旨房)은 고려시대 왕명출납(王命出納)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사(使:정4품) 2명, 부사(副使:종4품) 2명, 판관(判官:종8품) 2명의 관원을 두었는데, 1298년(충렬왕 24) 사림원(司林院)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그후 다시 승지방을 두었다가 1308년 인신사(印信司)로 고쳤다.
⊙ 3자 金 (김위)는
정랑을 지냈고,
★정랑(正郞)은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의 정5품 관직으로
1275년(충렬왕 1) 전기의 상서 6부 및 속사(屬司)인 고공사(考功司)와 도관(都官)을 전리사(典理司:이부·예부)·군부사(軍簿司:병부)·판도사(版圖司:호부·공부)·전법사(典法司:형부) 등 4사(司)와 고공사·도관으로 고치면서 낭중을 개칭한 것이다. 정원은 전리사에 1명, 군부사·전법사·판도사에 각 2명씩 두었다. 1298년에 4사를 전조(銓曹)·병조(兵曹)·민조(民曹)·형조(刑曹)·의조(儀曹)·공조(工曹)의 6조로 바꾸면서 낭중으로 복구하고 정원은 각 3명씩 두되, 그 중 1명은 서반(西班)이 겸직하게 하였다. 1308년에는 직랑(直郞)으로, 1310년(충선왕 2)에는 정랑으로, 1369년에는 직랑으로 바꾸었다가 1372년에 다시 1362년의 관제로 복구하였다.
묘소는 목령에 소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실전된 상태로 있다가 1998년 복현리 분토동 용미상 임좌 예경묘원에 영분을 모시었다.
⊙ 4자 金 (김제)는
일찍이 고려우왕3년(1377) 선광정사 진사과에 등제하고 우왕8년(1382) 홍무임술 문과에 급제하여 관이 도절제사에 승임되고 절도사를 역임하셨으며, 성주인 이원구의 녀와 결혼하였고
★도절제사(都節制使)는 고려 말에 설치된 양계(兩界)지역의 장관으로
1389년(공양왕 1) 종래의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이 이름으로 고쳐 대체로 재추(宰樞)로서 이 직을 맡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군지휘관으로서의 기능이 강하여,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지방 도(道)에 파견되어 작전지휘를 하였다. 후에는 동북면 ·서북면에 각 1명씩 고정배치되어 군사 및 민사를 모두 관장하였다. 또 1390년에는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도절제사를 겸임하였고, 1392년 4월에는 도순문사로 다시 개칭되었다.
★절도사(節度使)는 고려·조선 시대의 외관직(外官職)으로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 14) 지방행정구역을 12주(州)로 나누고 주 장관으로 절도사를 두었다. 1012년(현종 3) 5도호(五都護)·75도(道)를 설치하면서 절도사를 없애고 안무사(按撫使)를 대신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병마절도사(종2품)와 수군절도사(정3품)로 나누어 각 주진(主鎭)을 관장하였다.
묘소는 양지리 목령하 자좌에 있는데, 김제의 1녀는 전의인 이정간(송천서원 배향)의 아들 이사혜에게 출가하여 4남을 낳았는데 이효석(송천서원 배향), 이우석, 이인석, 이인석이다.
도절제사공 김제는 후사가 없어 당시 예속으로 여서 가문에 습승되어 거차 오백여년래 외손봉사를 뫼시어오고 있다.
<오창지>에 보면
山亭은 절제사 김공 제가 세운 정자인데 유지가 창고의 동쪽 몇 리쯤 되는 곳에 있다.
李貞幹 (1360-1439) 다섯째아들 士惠가 안렴사의 아들인 병사 (제)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오근을 별장으로 삼아 왕래하였는데 자손들이 인하여 거주하였다. 송천서원에 (충북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배향되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 6자 金湜(김식)은
진천인 송광우의 녀와 결혼하였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을 지내고, 공은 충북 진천군 문백면 막동에 은거하여 문학으로서 평생을 마치었는데 문하에서 문사가 다수 배출되었다.
★좌랑(佐郞)은 조선시대 6조에 소속되어 있던 정5품 관직으로 각 조(曹)마다 3명씩을 두었으며 병조(兵曹)에는 1명을 더 두었다고 한다.
묘소는 遺命平塚으로 실전되었다가 물후 100여년 후에 충남 천원군 동면 壽南里 後山에서 誌石을 발견하였고 비와 석상이 있었고, 1997년 장손 (김식-1/2김자려- 1/3극) 김극의 유택이 있는 영동군 황간면 회포리 구미촌 후록 유좌에 이안하였다.
이때 진천군 문백면 계산리에 있던 큰아들 직장을 지낸 金自麗(김자려)의 묘소도 (노장우撰 권영구書 비와 석상이 있다) 함께 이안하였다. 둘째아들 서령을 지낸 金自荊(김자형)의 묘는 진천군 문백면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 삼보산에 설단하였다.
★직장(直長)은 고려시대 중앙 관서의 시(寺) ·감(監) ·서(署) ·국(局) ·고(庫) 등에 둔 정 ·종 7품의 관직.
▣ 청주교대 김재윤 교수 (문학박사)가 지은 "여말의 충절 김사렴"을 보면
공은 순흥안씨와 결혼하였는데 그녀의 아버지 문혜공 안원숭은 정당문학 순성군이고, 할아버지 문숙공 안목은 정당문학 순흥군이요, 증조부인 문순공 안우기는 문하찬성 순평군이며, 고조부인 문성공 안향은 당대의 대학자로서 이름을 떨쳤던 분이다. 이로써 미루어보면 공의 처가 역시 공의 가문 못지않은 당대의 이름난 가문이었다.
공은 순흥안씨 사이에 6남 1녀 (7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은 안찰사 侃(간)이고, 셋째는 정랑공 (위), 넷째는 절도사공 (제), 다섯째는 소윤공 (약), 여섯째는 좌랑공 湜(식)이고, 둘째아들 仁庇(인비)는 승문에 출가하였고, 따님은 馬希遠(마희원)에 출가하였다.
다섯째 아들 소윤공은 아들 한 분을 두었는데 諱는 遇周(우주)로 지주사 벼슬을 지냈고, 공의 여섯째 아들 좌랑공은 아들 두 분을 두었는데 장남은 自麗(자려)로 직장 벼슬을 지냈고, 차남은 自荊(자형)으로 서령을 지냈다. 그런데 공의 장남, 차남, 삼남, 사남은 후사가 없어 안타깝게도 대를 잇지 못하였다.
공의 유언으로 남긴 遺命平塚(유명평총)은 공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공의 아들 (약)과 湜(식)은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어받아 역시 평총을 하였는데, (약)의 묘소는 그 뒤 실전되어 설단을 차려 묘하에서 향사를 받들어 왔었고, 湜(식)의 묘소는 다행히 몰후 100여년 만에 충남 천원군 동면 수남리 뒷산에서 誌石이 발견되어 실전을 면할 수 있었다.
또한 (약)의 아들 遇周(우주)는 임종하면서 그 자손에게 이르기를
"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이미 평총을 하셨는데, 내가 어찌 홀로 봉분을 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누대에 걸쳐 내려오는 충절 가문의 넋을 잃지 않으려 하였다. 이는 곧 충효의 본보기가 되었음은 물론 세상 사람들은 공의 가문을 절의대가로 칭송해 왔다.
또한 湜(식)의 둘째아들이며 공의 손자인 自荊(자형)은 임종에 임하여 그 자손에게 이르기를
"충효 두 글자는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遺命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안렴사공 할아버님의 유지를 받들어, 너희들은 앞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지 말며 조상들께서 이루어 놓으신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 고 하였다.
이에 그 자손들 역시 유지를 받들어, 自荊(자형)도 자기 분묘를 평총으로 하도록 일렀고, 그 때문에 지금도 이 분의 묘소를 알 길이 없다. 이 분이 지금 충북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에 있는 삼보산에 설단하여 향사를 올리고 있다.
또한 공의 아들인 侃(간)과 (약), 손자인 遇周(우주)도 공의 유지를 받들어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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