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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 金士廉 ④(예경묘원由緣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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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9-13 15:15 조회2,5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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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 金士廉 ④(예경묘원由緣碑)





1998년 충북 청원군 오창면 복현리에 예경묘원을 조성하여 안렴사공 김사렴의 1남 김간 묘소, 5남 김약 영분, 3남 김위 영분을 모시면서 세운 예경묘원유연비의 비문을 소개합니다.







▣ 예경묘원유연비문 (예<木변隸>慶墓苑由緣碑文)



단기4331년 (서기1998) 무인 3월 일

안동김씨대종회 고문 전 괴산군 증평읍장 예손 在華 근찬

안렴사공파종회 부회장 예손 在澤 근서

예경묘원영건추진위원

안렴사공파 종회장 章會 지주사공 종회장 昌會, 禮默, 在均, 旨會, 會潤, 隆會, 泰浩







오호라 류광이 무심타거니 창상지변이 몇 번이며 정병부침인들 그 또한 얼마나 넘겼으리오, 유아현조 오은 안렴사 부군께서 승국지신으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어 오근촌 도산에 은둔하신지 지어20世, 육백년의 연광이 류휘불식하였도다.



역성혁명의 황망중에 은신처를 가릴나위조차 없으실제 복거택지의 현명하신 탁견으로 차령지맥이 위?원래하여 북태산조령되어 둘러있고 상당산을 남향하여 금강상류 학천을 연한 옥야천리가 펼쳐진 터전 위에 세거지향을 잡으셨으니 가위 천년 복록지지라 할 것이로다.



산명수려한 자연환경과 백세유방의 고절을 지키신 선현의 음덕으로 수십만 내외손세가 번연극창하니 회모할수록 감읍하기 그지없다.







?호 부군은 후사로서 휘侃(간) (법호)仁庇(인비), 장녀, 휘 (위), 휘 (제), 휘 (약), 휘湜(식)의 6남1녀를 두시니 개위 조세현달한 영명준사 이었으되 엄군의 광망에 가리우고 유훈을 경종하여 새 조정에의 복사를 삼가고 행의를 근신하였을 뿐아니라 더욱 네분의 계후가 없으심으로 그 공업과 행적이 후세에 소상히 유전되지 못하였음을 못내 한스러히 여길 따름이다.



회고컨대 오랜 세월 명도조차 이산되어 송구지심이 무한터니 이제 시류변전으로 다시금 추원경모하는 後昆(후곤)들의 지성을 모아 제2도산이라 할 이곳 복현에 예경묘원을 영건하면서 우리 경진성보에 전거하여 첨존의 편영을 재조명케 됨은 희행의 호기라 할 것이다.







장군 휘侃(간)공은 관이 안찰사에 이르시고 배는 무주부인 광주김씨니 부판서懷祖(회조)지녀요 묘는 오창목령하사동술좌이었다가 금번 이 묘원에 면봉하게 되었다.



서차2 (법호) 仁庇(인비)공은 시속따라 삭발출가하여 불계에 귀의하였으며



서차 장녀는 목사 목천인 馬希遠(마희원)에 출가하였다.



서차3 휘 (위)공은 관이 정랑이며 배 실관부인과 함께 묘지가 목령에 소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끝내 실전하였기로 금차 이 묘원에 영분을 봉축하였다.



서차4 휘 (제)공은 일찍이 고려우왕3년(1377) 선광정사 진사과에 등제하고 우왕8년(1382) 홍무임술 문과에 급제하여 관이 도절제사에 승임되고 절도사를 역임하셨으며 배 성산군부인 성주이씨는 부성산군元具(원구)지녀이요 묘는 오근목령하자좌원이었다.



여서는 전의인 군수 李士惠(이사혜), 정랑 李訓(이훈)이니 군수공은 부 중추원사효정공貞幹(정간)이요 생4남하니 한성부좌윤孝碩(효석), 부사友碩(우석), 종사랑仁碩(인석), 부위義碩(의석)이며 효정공(이정간)과 좌윤공(이효석)은 송천서원에 동배되었다. 당시 예속으로 도절제사공은 여서 가문에 습승되어 거차 오백여년래 외손봉사를 뫼시어오니 희세의 기문이오 미거라 찬양할 일이다.



서차5 휘 (약)공은 관이 소윤이오 배는 승평부인 순천박씨니 부 전서元象(원상)지녀요 조 대제학淑貞(숙정)이다. 묘는 목천현백락촌에 유명평총하였다가 실전되어 도산 오은선공묘하에 설단수호타가 금번 이 묘원에 영분을 봉축하였다.



서차6 휘湜(식)공은 관이 이조좌랑이오 배는 상산부인 진천송씨니 부 전서匡佑(광우)지녀이다. 묘재 천안군 동면 수남 후산이었다가 서기 1997년에 영동군 황간면 회포리 구미촌 후록 유좌지원에 이안하였다.







?호, 참으로 유규한 광음이 류전한 금자, 조령의 비음하에 마침 보본반시의 계기가 마련되었기에 예경묘원을 영건케 된 연유를 기록하여 다음 세대에의 권징하는 거울로 삼고저 한다.



즉 안찰사 휘侃(간)공의 영묘는 오창목령술좌에 웅대한 방호석묘로 모셔져 있었고 원래 비대한 산판과 위토가 있었을 것이나 후사없는 묘소인데다 방손들의 불찰로 거개가 상실되었고 임야는 소유포기되어 행정청의 귀속재산으로 처분된 것으로 사유된다. 우금까지 근소한 위토 330평이 유지되어 있어 묘하 양청동 방예손 일계에서 세사를 봉행하여 오던중



의외로 국가사업인 오창 첨단과학기술공단 건설사업이 추진됨에 따라 전기 위토가 편입되어 그 보상금 2천3백6십만원을 수령케 되자 소관문중의 협의로 오은공 대종회에 헌납하고 묘지이안을 성원하는지라 이를 기꺼이 가납하여 정랑공, 소윤공의 영분까지 일괄사업으로 병행키로 만장일치 종의가 숙성되어 묘원을 영건하게 되었다.



이로써 행로가 다른 분들을 예외로 한 ?계3위를 비경인 지주사공 휘遇周(우주)공지묘 용미상 임좌원에 명당을 잡어 묘원을 봉축안정하오니 명부에서라도 골육지정과 애열이 비할바 없으실 것이로다.



때마침 형제애를 상징하는 예화가 만개하는 화월에 즈음하여 3위구묘를 같이 영축하노니 보다 더한 경행사가 없으리라 믿으면서 後昆(후곤)들의 지성을 모아 존령의 영원한 안식을 경축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 묘원영건역사 개황



1998.4.2 묘원영건 추진위원이 2조로 편성되어 1조는 소윤공 설단비를 이전하여 오고 신묘원의 정지 영묘위치 및 굴광작업을 하고, 2조는 안찰사공 구묘 발굴 및 유골수습, 이안작업을 수행하였다.



안찰공 휘侃(간)공의 분묘는 약 570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조고비 양위분의 유골이 정결히 유류되어 있어 실로 기이한 감탄을 느끼게 하였다.



예경묘원에는 以西爲上 원칙에 따라 향하여 좌측에 안찰사공의 면봉묘를, 중앙에 소윤공의 이안영분을, 우측에는 이제까지 실전되었든 정랑공의 초혼영분을 봉축하였다.



따라서 별항 게기한 바와 같이 각 석물을 배열하고 안찰사공 구묘에서 가져온 문관석을 세웠으며 우측에 유연비를 수립하여 묘정을 정제하였으니 이상 작업에는 범 3일간의 용역이 소요되었다.







⊙ 부장품 유물의 발견



안찰사공 구묘에 대하여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 규모가 웅대하고 오랜 고분인지라 혹여 부장품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신중히 발굴한 바 과연 하나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니



직경 8cm, 厚3mm의 원형물건인데 표면은 약간 凸형으로 고운 면을 갖고 있으며 배면은 운용문이 조각되어 있고 중앙에 꼭지가 있고 위에는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슬끈으로 꾀었든 듯하였다. 이제는 전문가의 감정이 있어야 하겠지만 필자의 상식으로는 고려동경일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공께서 평생 지니든 애용물을 부장한 것이거나 더 비약적으로 해석하면 안렴사 부군께서 또는 상락후 부군 때부터의 것을 장자이신 안찰사공께로 유전하였다가 후사가 없으심으로 부장케 된 것인가도 추리해 보게 된다.



여하간 면경은 자기면모를 성찰하는 것이오 청직한 인격을 관조하는 것이니 고결한 역대 선조의 지조와 풍절을 포회한 진품임이 틀림없다 하겠다. (海< +農> 주)







⊙묘원수호 및 봉사대책



기존의 지주사 遇周(우주)공의 재실이 있으나 심히 頹落(퇴락)하여 앞으로 재건을 목표로 하고 이를 예경재라 재명을 부여하여 통합하고 4위 열조를 모시어 수호하고 봉사하기로 방침을 결정하였다.



지주사공의 위토는 상당 면적을 보유하고 있으나 현하 농촌실정으로 세향을 올릴 정도에 그치고



소윤공 위토는 답 1,053평, 전 464평인 바 도산에서 이곳으로 세수를 전교받어 합사에 소용키로 한다면 세일사에는 큰 애로사항이 없다할 것이다.



예경재에 대하여는 수축이나 재건함에는 전혀 재력이 전무한지라 앞으로 새로이 계획을 세워 사업을 추진해야 될 것인바 각별히 後昆(후곤)을의 성력과 특별한 협찬이 있어야만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 예경묘원 유연비문의 찬록과 서역



비문은 해농 金在華 (안동김씨대종회 고문, 전 안렴사공파 종회장, 전 괴산군 증평읍장) 의 찬작인바 해농은 85노옹으로 다년간 종사에 성력을 바쳐 왔고 소윤공 영단을 복현으로 이설함이 합당하다는 숙제를 가진지 오래였든 차 금번 묘원 영건사업에 깊이 관여하였을 뿐 아니라 비문은 필생의 사업이란 정성으로 찬술하였다.



예경-예는 "산영조체"자이니 그 화실이 형제애의 다정함과 같다하여 고래로 형제우애를 상징하나니 여기에서는 명부에서나마 형제 상봉이 더 없는 경사라는 뜻으로 창작한 것이다.



유연비-유래비, 내력을 기록한 비란 뜻

영분-영혼을 매안한 봉분을 말함. 설단비나 초혼 영위등 체백이 아닌 초령을 매안하였음을 이름이니 타에 별로 유례가 없었든 창작 어휘이다.





비문의 서역

표기대자는 梧南 金在澤 (안렴사공파 종회 부회장, 청녕서화회 운영위원)의 휘호이니 해서체로서 필치가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치는 달필이다.



오남은 다년간 서예에 정진하여 한일서예교류전, 한국서예대전 및 충청북도 미술대전에 수많은 입특선을 거치었으며 청녕서예회 운영위원을 역임하는 등 명성있는 중견필재이다.



음기는 컴퓨터 집자로써 제작하였는데 그 교정, 교합, 배열 등 미술적인 조화정리를 역시 오남이 전담 처리한 공로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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