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 김광수(金光粹) --國朝人物考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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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1-09-14 19:39 조회2,467회 댓글0건본문
松隱 金光粹선조는 도평의공의 후손이십니다.
계대를 살펴보면
충렬공(김방경)--판서공(김선)--양간공(김승택)--안렴사공(김면)--도평의공(김구정)
--김자첨(감목공=안동사촌 입향조)--김효온--김극해(지례현감)--송은(김광수)입니다.
김광수(송은)선조의 더욱 자세한 자료는 김정중씨가 쓴 내고향사촌(게시판번호 121)및
게시판번호130(사촌입향후 대소 과거 입격자), 141,150(독화신국전희음) 170(경심잠 해설)등
김정중씨가 쓴 글을 참조하십시요 ..(게시판 아래란에 작성자를 김정중으로 선택하면 정중님의
모든 글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참 대단하니 꼭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국조인물고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인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인데 그중에 송은 김광수 선조님
기록이 있어 여기에 적어어봅니다.
이 글은 공의 외손이신 서애 유성룡선생께서 지으신 공의 묘표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
송은 김광수 묘표(松隱 金光粹 墓表)
공(公)의 휘(諱)는 광수(光粹)요, 자(字)는 국화(國華)이며, 김(金氏)는 본래 신라(新羅)
왕실(王室)의 성(姓)이다. 고려 때 휘 방경(方慶)이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어
큰 공훈(功勳)을 세상에 세웠는데, 공이 바로 그 후손이다. 증조(曾祖)는 함길도 감목관
(咸吉道監牧官) 김자첨(金子瞻)이요, 조부(祖父)는 사직(司直) 金孝溫이며, 고(考)
휘 극해(克諧)는 문과(文科)에 올라 벼슬이 지례현감(知禮縣監)에 이르렀다.
공은 천성이 욕심이 없고 맑았으며 풍채가 단정하고 깨끗하며 부귀 영달에 전혀 뜻을
두지 않았는데, 일찍이 친구 사이에 시(詩)에 능하다고 알려졌다. 홍치(弘治=明 孝宗의 年號)
신유년(申酉년=1501년, 연산군 7년)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_)한뒤로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의성(義城)의 북촌(北村)에 들어가 살면서 더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데 뜻을 두지
않았다. 집 가에 왜송(矮松)이 한그루 있었는데, 푸르고 울창하여 두어 이랑의 그늘을
만들었으므로 공이 이를 사랑하였다. 이에 매일같이 술도 마시고 시도 읊으며 그 아래에서
한가히 지내며 스스로 송은처사(松隱處士)라 불렀다. 집안이 가난하여 의식(衣食)을 잇대기
어려웠으나 공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종일토록 조금도 불평 없이 만족하게 지냈는데,
당시 이웃 마을에 사는 현우(賢愚)와 소장(少長)을 막론하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즐겨 나아가
본을 뜨려 하였다. 공의 효성과 우애는 타고 나서 지례공(知禮公)이 일찍이 돌아가자 수십 년
어머니를 모시면서 안색을 살피고 뜻을 받드는 일을 모두 다 하였으며, 한 아우가 안동(安東)에
살면서 오기로 약조한 날이면 매번 문에 기대어 기다리며 날이 저물도록 먹지 않다가 반드시
더불어 같이 밥을 먹곤 하였다. 평생 입으로 재산을 경영하는 데 대한 말은 하지 않았고,
오직 옛사람의 아름다운 말과 선행(善行)을 노래로써 읊고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복(婢僕)들도 익히 듣고 능히 전하기까지 하였다. 아! 공은 독행군자(篤行君子)라
할만하다. 비록 옛날의 곤궁(困窮)하면서도 고상(高尙)한 뜻을 기른 선비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공의 선취(先取) 남씨(南氏)는 아들 김당(金당)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은 김순(金珣)에게
출가하였다. 후취(後娶) 순천장씨(順天長氏)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장홍(長弘)의
후예(後裔)로서 첨정(僉正) 장일신(長日新)의 딸이다. 딸 다섯을 낳으니 맏이는
신택(申澤)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김처선(金處善)에게 출가하였는데 충순위(忠順衛)요,
다음은 김온(金溫)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유중영(柳仲영)에게 출가하였는데
관찰사(觀察使)요, 다음은 이영(李영)에게 출가하였는데 훈도(訓導)이다. 김당은 딸 하나를
낳으니 권덕린(權德麟)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김세우(金世佑)이다. 김순은 두 아들을 낳으니
김생하(金生河), 김생명(金生溟)이요, 사위는 강여개(姜汝皆)이다. 신택은 두 아들을 낳으니,
신대년(申大年),신대유(申大有)요,세 사위는 김목(金牧),문희정(文希禎),조희조(趙希祖)이다.
충순위는 세 아들을 낳으니 김응하(金應夏), 김응상(金應商), 김응주(金應周)이요, 김온은
한 아들을 낳으니 김명견(金命堅)이다. 관찰사는 두 아들을 낳으니 류운용(柳雲龍),
류성룡(柳成龍)인데 관찰사이며 세사위는 이윤수(李潤遂), 김종무(金宗武), 정호인(鄭好人)이다.
훈도는 딸 하나를 낳으니 사위는 김탄(金坦)이다. 내외손(內外孫)은 남녀 백여 인이다.
장부인(張夫人)은 어질고 식견과 사려가 있어 공과 더물어 곤궁하게 살면서 거친 음식은
먹었지만 역시 스스로 즐거워하며 고된 생활을 싫어하는 뜻이 없었다.
공은 성화(成化;明 憲宗의 年號) 무자년(戊子년;1468년,世祖14년)에 태어나
가정(嘉正;明 世宗의 年號) 계해년(癸亥年;1563년,明宗18年)에 돌아가니
향년(享年)96세이었다. 임종(臨終)에 목욕하고 궤( )에 기대어 손가락을
꼽으며 말하기를 "족(足)하다" 하고는 조금 뒤 홀연히 서거(逝去)하였는데,
피부는 살았을 때와 같았다. 장 부인은 공보다 몇해 앞서 가정(嘉正)
기미년(己未년;1559,明宗14년)에 졸(卒)하니, 88세였다. 대곡산(大谷山)
건좌 손향(乾座巽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공이 서거한 뒤 그 산기슭에
나아가 같은 묘역(墓域)에 봉분(封墳)을 달리한 제도(制度)로 만들었다.
그 22년 후에 외손(外孫)류성룡(柳成龍)이 조정의 명을 받들고 관찰사로서
남쪽으로 내려와 공의 묘(墓)에 나아가 제(祭)를 올렸는데 그 묘도(墓道)에
비(碑)가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었고 데상에 알려지지 않은 덕(덕)과 빛[光]이
따라서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고 민멸될까 크게 두려워하여,드디어 짧은 빗돌을
그 앞에 세우고 대략 이상과 같이 그 후면(後面)에 서술(敍述)하니, 아마도 백세(百歲)
뒤에도 이로 인하여 공의 대개(大개)를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柳成龍 지음
(國朝人物考에서 인용)
*편집자 해설
류성용은 송은 김광수의 외손자이다.
유성룡(柳成龍)
1542(중종 37)∼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출생.
공작(公綽)의 손자로, 황해도관찰사 중영(仲#영45)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 관직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뒤 정언·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에는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여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 皇華集序〉를 찬진(撰進)하였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어 올렸으며, 그해 함경도관찰사에 특제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하였으며, 다음해 왕명으로 〈정충록발 精忠錄跋〉을 지었고, 또 그 다음해에 《포은집 圃隱集》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 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2. 가축옥사때 자핵
이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게 되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자핵(自劾)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이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하였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다음해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여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으며, 이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 중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하여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3. 임진왜란 대비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으며,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3월에 일본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를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사신은 그대로 돌아갔다.
그해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軍事)에 관하여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4. 임란시의 군무총괄
4월 14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뒤 충청·경상·전라 삼도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으며,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하여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권율과 이빈(李$빈01)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을 건의하여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으며,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하게 함으로써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할 것과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보완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하여졌다.
5. 학문과 저술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이리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애집 西厓集》·《징비록 懲毖錄》·《신종록 愼終錄》·《영모록 永慕錄》·《관화록 觀化錄》·《운암잡기 雲巖雜記》·《난후잡록 亂後雜錄》·《상례고증 喪禮考證》·《무오당보 戊午黨譜》·《침경요의 鍼經要義》 등이 있고, 편저로는 《대학연의초 大學衍義抄》·《황화집 皇華集》·《구경연의 九經衍義》·《문산집 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 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그런데 그의 저서에 대하여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서애행장 西厓行狀〉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영모록》·《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淸選考, 增補文獻備考, 西厓年譜草本, 柳成龍(李載浩, 韓國人物大系 3, 博友社, 1972)
西厓柳成龍의 社會經濟觀(李樹健, 西厓硏究 2, 西厓柳成龍先生紀念事業會, 1979)
壬辰倭亂과 柳西厓의 自主國防策(李載浩, 歷史敎育論集 11, 1987). 〈李章熙〉
유성룡자료=(디지털한국에서 인용)
계대를 살펴보면
충렬공(김방경)--판서공(김선)--양간공(김승택)--안렴사공(김면)--도평의공(김구정)
--김자첨(감목공=안동사촌 입향조)--김효온--김극해(지례현감)--송은(김광수)입니다.
김광수(송은)선조의 더욱 자세한 자료는 김정중씨가 쓴 내고향사촌(게시판번호 121)및
게시판번호130(사촌입향후 대소 과거 입격자), 141,150(독화신국전희음) 170(경심잠 해설)등
김정중씨가 쓴 글을 참조하십시요 ..(게시판 아래란에 작성자를 김정중으로 선택하면 정중님의
모든 글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참 대단하니 꼭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국조인물고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인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인데 그중에 송은 김광수 선조님
기록이 있어 여기에 적어어봅니다.
이 글은 공의 외손이신 서애 유성룡선생께서 지으신 공의 묘표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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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 김광수 묘표(松隱 金光粹 墓表)
공(公)의 휘(諱)는 광수(光粹)요, 자(字)는 국화(國華)이며, 김(金氏)는 본래 신라(新羅)
왕실(王室)의 성(姓)이다. 고려 때 휘 방경(方慶)이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어
큰 공훈(功勳)을 세상에 세웠는데, 공이 바로 그 후손이다. 증조(曾祖)는 함길도 감목관
(咸吉道監牧官) 김자첨(金子瞻)이요, 조부(祖父)는 사직(司直) 金孝溫이며, 고(考)
휘 극해(克諧)는 문과(文科)에 올라 벼슬이 지례현감(知禮縣監)에 이르렀다.
공은 천성이 욕심이 없고 맑았으며 풍채가 단정하고 깨끗하며 부귀 영달에 전혀 뜻을
두지 않았는데, 일찍이 친구 사이에 시(詩)에 능하다고 알려졌다. 홍치(弘治=明 孝宗의 年號)
신유년(申酉년=1501년, 연산군 7년)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_)한뒤로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의성(義城)의 북촌(北村)에 들어가 살면서 더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데 뜻을 두지
않았다. 집 가에 왜송(矮松)이 한그루 있었는데, 푸르고 울창하여 두어 이랑의 그늘을
만들었으므로 공이 이를 사랑하였다. 이에 매일같이 술도 마시고 시도 읊으며 그 아래에서
한가히 지내며 스스로 송은처사(松隱處士)라 불렀다. 집안이 가난하여 의식(衣食)을 잇대기
어려웠으나 공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종일토록 조금도 불평 없이 만족하게 지냈는데,
당시 이웃 마을에 사는 현우(賢愚)와 소장(少長)을 막론하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즐겨 나아가
본을 뜨려 하였다. 공의 효성과 우애는 타고 나서 지례공(知禮公)이 일찍이 돌아가자 수십 년
어머니를 모시면서 안색을 살피고 뜻을 받드는 일을 모두 다 하였으며, 한 아우가 안동(安東)에
살면서 오기로 약조한 날이면 매번 문에 기대어 기다리며 날이 저물도록 먹지 않다가 반드시
더불어 같이 밥을 먹곤 하였다. 평생 입으로 재산을 경영하는 데 대한 말은 하지 않았고,
오직 옛사람의 아름다운 말과 선행(善行)을 노래로써 읊고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복(婢僕)들도 익히 듣고 능히 전하기까지 하였다. 아! 공은 독행군자(篤行君子)라
할만하다. 비록 옛날의 곤궁(困窮)하면서도 고상(高尙)한 뜻을 기른 선비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공의 선취(先取) 남씨(南氏)는 아들 김당(金당)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은 김순(金珣)에게
출가하였다. 후취(後娶) 순천장씨(順天長氏)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장홍(長弘)의
후예(後裔)로서 첨정(僉正) 장일신(長日新)의 딸이다. 딸 다섯을 낳으니 맏이는
신택(申澤)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김처선(金處善)에게 출가하였는데 충순위(忠順衛)요,
다음은 김온(金溫)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유중영(柳仲영)에게 출가하였는데
관찰사(觀察使)요, 다음은 이영(李영)에게 출가하였는데 훈도(訓導)이다. 김당은 딸 하나를
낳으니 권덕린(權德麟)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김세우(金世佑)이다. 김순은 두 아들을 낳으니
김생하(金生河), 김생명(金生溟)이요, 사위는 강여개(姜汝皆)이다. 신택은 두 아들을 낳으니,
신대년(申大年),신대유(申大有)요,세 사위는 김목(金牧),문희정(文希禎),조희조(趙希祖)이다.
충순위는 세 아들을 낳으니 김응하(金應夏), 김응상(金應商), 김응주(金應周)이요, 김온은
한 아들을 낳으니 김명견(金命堅)이다. 관찰사는 두 아들을 낳으니 류운용(柳雲龍),
류성룡(柳成龍)인데 관찰사이며 세사위는 이윤수(李潤遂), 김종무(金宗武), 정호인(鄭好人)이다.
훈도는 딸 하나를 낳으니 사위는 김탄(金坦)이다. 내외손(內外孫)은 남녀 백여 인이다.
장부인(張夫人)은 어질고 식견과 사려가 있어 공과 더물어 곤궁하게 살면서 거친 음식은
먹었지만 역시 스스로 즐거워하며 고된 생활을 싫어하는 뜻이 없었다.
공은 성화(成化;明 憲宗의 年號) 무자년(戊子년;1468년,世祖14년)에 태어나
가정(嘉正;明 世宗의 年號) 계해년(癸亥年;1563년,明宗18年)에 돌아가니
향년(享年)96세이었다. 임종(臨終)에 목욕하고 궤( )에 기대어 손가락을
꼽으며 말하기를 "족(足)하다" 하고는 조금 뒤 홀연히 서거(逝去)하였는데,
피부는 살았을 때와 같았다. 장 부인은 공보다 몇해 앞서 가정(嘉正)
기미년(己未년;1559,明宗14년)에 졸(卒)하니, 88세였다. 대곡산(大谷山)
건좌 손향(乾座巽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공이 서거한 뒤 그 산기슭에
나아가 같은 묘역(墓域)에 봉분(封墳)을 달리한 제도(制度)로 만들었다.
그 22년 후에 외손(外孫)류성룡(柳成龍)이 조정의 명을 받들고 관찰사로서
남쪽으로 내려와 공의 묘(墓)에 나아가 제(祭)를 올렸는데 그 묘도(墓道)에
비(碑)가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었고 데상에 알려지지 않은 덕(덕)과 빛[光]이
따라서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고 민멸될까 크게 두려워하여,드디어 짧은 빗돌을
그 앞에 세우고 대략 이상과 같이 그 후면(後面)에 서술(敍述)하니, 아마도 백세(百歲)
뒤에도 이로 인하여 공의 대개(大개)를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柳成龍 지음
(國朝人物考에서 인용)
*편집자 해설
류성용은 송은 김광수의 외손자이다.
유성룡(柳成龍)
1542(중종 37)∼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출생.
공작(公綽)의 손자로, 황해도관찰사 중영(仲#영45)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 관직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뒤 정언·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에는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여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 皇華集序〉를 찬진(撰進)하였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어 올렸으며, 그해 함경도관찰사에 특제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하였으며, 다음해 왕명으로 〈정충록발 精忠錄跋〉을 지었고, 또 그 다음해에 《포은집 圃隱集》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 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2. 가축옥사때 자핵
이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게 되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자핵(自劾)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이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하였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다음해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여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으며, 이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 중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하여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3. 임진왜란 대비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으며,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3월에 일본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를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사신은 그대로 돌아갔다.
그해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軍事)에 관하여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4. 임란시의 군무총괄
4월 14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뒤 충청·경상·전라 삼도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으며,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하여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권율과 이빈(李$빈01)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을 건의하여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으며,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하게 함으로써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할 것과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보완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하여졌다.
5. 학문과 저술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이리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애집 西厓集》·《징비록 懲毖錄》·《신종록 愼終錄》·《영모록 永慕錄》·《관화록 觀化錄》·《운암잡기 雲巖雜記》·《난후잡록 亂後雜錄》·《상례고증 喪禮考證》·《무오당보 戊午黨譜》·《침경요의 鍼經要義》 등이 있고, 편저로는 《대학연의초 大學衍義抄》·《황화집 皇華集》·《구경연의 九經衍義》·《문산집 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 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그런데 그의 저서에 대하여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서애행장 西厓行狀〉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영모록》·《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淸選考, 增補文獻備考, 西厓年譜草本, 柳成龍(李載浩, 韓國人物大系 3, 博友社, 1972)
西厓柳成龍의 社會經濟觀(李樹健, 西厓硏究 2, 西厓柳成龍先生紀念事業會, 1979)
壬辰倭亂과 柳西厓의 自主國防策(李載浩, 歷史敎育論集 11, 1987). 〈李章熙〉
유성룡자료=(디지털한국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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