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장보고와 우리 선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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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1-05 02:51 조회1,573회 댓글0건본문
ㅐㅐㅇ5278장보고와 우리 선조님
(태보공 알지 19대손) 김균정(金均貞)
(태보공 알지 20대손) 신무왕(神武王)
(태보공 알지 21대손) 문성왕(文聖王)
범신라김씨의 비조이신 태보공 알지의 21세손이신 신무왕(휘우징)은 장보고와 연합하여 왕위에 오르시고,
아들이신 문성왕(휘경응)은 재위시 장보고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청해진을 혁파하였다고 합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셨던 경순왕은 태보공 알지의 26대손이 되고, 會자 항렬은 경순왕의 32대손이 되므로 신무왕은 會자항렬의 38대조가 되시고, 문성왕은 37대조가 되십니다.
● 신무왕(神武王)
?∼839(신무왕 1). 신라 제45대왕. 재위 839년 4월∼7월.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우징(祐徵). 할아버지는 혜강대왕(惠康大王)으로 추봉된 원성왕의 아들 예영(禮英)이며, 아버지는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봉해진 균정(均貞), 어머니는 헌목태후(憲穆太后)로 봉해진 진교부인(眞橋夫人) 박씨(朴氏)이다.
그가 아버지 균정과 함께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부상하게 되는 것은 헌덕왕 때였다. 812년(헌덕왕 4)에 균정은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며, 김헌창(金憲昌)의 난이 일어나자 우징 부자는 왕을 도와 반란군을 평정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828년(흥덕왕 3)에 우징은 시중에 임명되었다.
834년에 균정이 상대등에 피임되자 우징은 아버지가 재상(宰相)이 되었다는 이유로 시중직을 사퇴하고 대신 김명(金明:민애왕)이 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균정과 김명간의 대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흥덕왕이 죽자 그 사촌동생인 균정과 오촌 조카인 제륭(悌隆:희강왕)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김명과 아찬(阿飡) 이홍(利弘)·배훤백(裵萱伯) 등은 제륭을 받들고 우징과 조카인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워 균정은 전사하고, 우징은 김양 등과 더불어 청해진(淸海鎭)으로 도망하여 ★장보고(張保皐)에게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여 희강왕이 되었으나, 838년(희강왕 3)에 김명이 이홍 등과 함께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보전할 수 없음을 알고 자진하였다. 김명은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뒤 균정계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민애왕 1) 청해진에 의탁해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 000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왔다. 김양·염장(閻長)·장변(張弁)·정년(鄭年)·낙금(駱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李順行)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金敏周) 등을 파견하여 무주(武州:지금의 光州)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그 다음해 정월 달벌(達伐: 지금의 大邱지역)에서 왕군과 토벌군이 맞부닥치게 되었다.
이때 민애왕을 대신하여 왕군을 이끈 자는 대흔(大昕)·윤린(允璘) 등이었는데, 토벌군에게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난중에 월유댁(月遊宅)으로 도망갔으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고, 우징이 왕이 되었다. 신무왕의 즉위는 원성왕의 큰아들인 인겸계(仁謙系)와 균정계세력의 대립 중 균정계의 승리를 의미한다.
균정계가 승리한 데에는 청해진세력과 이미 거세된 김주원계(金周元系)의 후손인 김양의 도움이 컸다. 신무왕은 즉위한 지 반년도 못 되어 죽었기 때문에 별다른 경륜을 펴지 못하였으나, 다만 그는 ★장보고나 김양에 대하여 배려하고 있었던듯하다.
839년에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아 2, 000호(戶)의 실봉(實封)을 내렸다. 반면 ★장보고도 이에 그치지 않고 딸을 왕비로 세우려 하였다. 이것은 청해진세력의 강대함을 알려준다. 신무왕은 ★장보고 등 왕권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을 제압하여야 하는 과업을 앞두고 돌아갔다. 능은 제형산(弟兄山) 서북에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金杜珍〉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신라 신무왕릉(新羅神武王陵)
【관리번호】780-230-280-313
【지정사항】사적 제185호
【유적종류】능·원(역대왕과 비빈,세자,후궁의 능·원)
【소 재 지】경상북도 경주시 동방동 660
【시 대】통일신라시대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신라 제45대 신무왕의 능으로 형제산 아래에 있는데 봉토(封土)만
있고 특별한 능묘시설이나 호석같은 것이 없다. 신무왕의 휘는 우
징(祐徵)이고 상대등 균정(均貞)의 아들이니 곧 원성왕의 증손이 된
다. 김명(金明) 등과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을 죽이고 그의 아버지
균정을 추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다시 청해진대사 ★장보고
의 지원으로 민애왕을 죽이고 839년 즉위하였으나 3개월 후 7월에
병사하였다.
【참고문헌】동해문화사, 1995, <<경상북도문화재도록>> 1, 333.
【비 고】1969. 8. 27. 지정.
● 문성왕(文聖王)
?∼857(헌안왕 1). 신라 제46대왕. 재위 839∼85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경응(慶應)이다. 신무왕의 태자.
어머니는 정계부인(貞繼夫人, 또는 定宗太后, 貞從太后), 할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이며 뒤에 성덕대왕으로 봉하여진 균정(均貞), 할머니는 뒤에 헌목태후(憲穆太后)로 봉하여진 진교부인(眞矯夫人) 박씨(朴氏), 비(妃)는 소명왕후(炤明王后)이다. 본래 부인으로 박씨가 있었고, 또 뒤에 위흔(魏昕)의 딸로 비를 삼은 일이 있는데, 소명왕후는 이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신무왕은 흥덕왕이 죽은 뒤 계속되어온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지만 6개월도 못 되어 죽어, 왕위쟁탈과정에서 쌓여온 많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숙제는 그 아들 문성왕대로 고스란히 넘어오게 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왕위를 둘러싼 균정계와 원성왕의 장자 인겸(仁謙)의 아들인 충공계(忠恭系)와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이 싸움에서 일단 패한 균정계의 우징(祐徵)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와 김주원(金周元)의 후손 김양(金陽)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그 결과 ★장보고와 김양 등 신무왕을 도운 귀족세력은 그에 상응한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문성왕은 즉위하자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봉하고, 예징(禮徵)을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였고 김양에게 소판(蘇判)의 관등을 주면서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하였다. 반면, 이와같은 귀족세력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841년(문성왕 3) 홍필(弘弼)의 모반은 그러한 모순의 첫번째 노출에 불과하다.
846년 ★장보고의 반란이 있었다. ★장보고는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세우려 하였는데, 조신들이 해도(海島)사람의 딸을 왕비로 맞을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자, 청해진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염장(閻長)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한 인물이 김양이라 하는데, 842년 김양이 그의 딸을 왕비로 세우는 기사가 이러한 추측을 낳게 한다. ★장보고의 난이 진압되자 851년 청해진을 혁파하였으며, 그곳 민호(民戶)를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시켰다. 궁복(弓福:張保皐의 별명)의 난 이후에도 정치적인 불안은 계속되었다.
847년 이찬(伊飡) 양순(良順)과 파진찬(波珍飡) 흥종(興宗)의 반란이 있었고, 849년 이찬 김식(金式)·대흔(大昕)의 반란이 있었다. 양순이나 대흔은 모두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전래로부터 계속된 왕위 다툼은 그대로 계속되다가, 857년 문성왕은 숙부 의정(誼靖)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유조(遺詔)를 내리고 죽었다.
이것은 그 한달 전에 문성왕을 도와오던 김양이 죽자, 상대등인 의정과 시중인 계명(啓明)이 결합하고 왕을 핍박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0, 1980). 〈金杜珍〉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김항용 - 지금 보고 있습니다.
▣ 김윤식 -
▣ 김은회 -
▣ 솔내 -
(태보공 알지 19대손) 김균정(金均貞)
(태보공 알지 20대손) 신무왕(神武王)
(태보공 알지 21대손) 문성왕(文聖王)
범신라김씨의 비조이신 태보공 알지의 21세손이신 신무왕(휘우징)은 장보고와 연합하여 왕위에 오르시고,
아들이신 문성왕(휘경응)은 재위시 장보고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청해진을 혁파하였다고 합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셨던 경순왕은 태보공 알지의 26대손이 되고, 會자 항렬은 경순왕의 32대손이 되므로 신무왕은 會자항렬의 38대조가 되시고, 문성왕은 37대조가 되십니다.
● 신무왕(神武王)
?∼839(신무왕 1). 신라 제45대왕. 재위 839년 4월∼7월.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우징(祐徵). 할아버지는 혜강대왕(惠康大王)으로 추봉된 원성왕의 아들 예영(禮英)이며, 아버지는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봉해진 균정(均貞), 어머니는 헌목태후(憲穆太后)로 봉해진 진교부인(眞橋夫人) 박씨(朴氏)이다.
그가 아버지 균정과 함께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부상하게 되는 것은 헌덕왕 때였다. 812년(헌덕왕 4)에 균정은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며, 김헌창(金憲昌)의 난이 일어나자 우징 부자는 왕을 도와 반란군을 평정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828년(흥덕왕 3)에 우징은 시중에 임명되었다.
834년에 균정이 상대등에 피임되자 우징은 아버지가 재상(宰相)이 되었다는 이유로 시중직을 사퇴하고 대신 김명(金明:민애왕)이 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균정과 김명간의 대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흥덕왕이 죽자 그 사촌동생인 균정과 오촌 조카인 제륭(悌隆:희강왕)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김명과 아찬(阿飡) 이홍(利弘)·배훤백(裵萱伯) 등은 제륭을 받들고 우징과 조카인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워 균정은 전사하고, 우징은 김양 등과 더불어 청해진(淸海鎭)으로 도망하여 ★장보고(張保皐)에게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여 희강왕이 되었으나, 838년(희강왕 3)에 김명이 이홍 등과 함께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보전할 수 없음을 알고 자진하였다. 김명은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뒤 균정계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민애왕 1) 청해진에 의탁해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 000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왔다. 김양·염장(閻長)·장변(張弁)·정년(鄭年)·낙금(駱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李順行)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金敏周) 등을 파견하여 무주(武州:지금의 光州)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그 다음해 정월 달벌(達伐: 지금의 大邱지역)에서 왕군과 토벌군이 맞부닥치게 되었다.
이때 민애왕을 대신하여 왕군을 이끈 자는 대흔(大昕)·윤린(允璘) 등이었는데, 토벌군에게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난중에 월유댁(月遊宅)으로 도망갔으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고, 우징이 왕이 되었다. 신무왕의 즉위는 원성왕의 큰아들인 인겸계(仁謙系)와 균정계세력의 대립 중 균정계의 승리를 의미한다.
균정계가 승리한 데에는 청해진세력과 이미 거세된 김주원계(金周元系)의 후손인 김양의 도움이 컸다. 신무왕은 즉위한 지 반년도 못 되어 죽었기 때문에 별다른 경륜을 펴지 못하였으나, 다만 그는 ★장보고나 김양에 대하여 배려하고 있었던듯하다.
839년에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아 2, 000호(戶)의 실봉(實封)을 내렸다. 반면 ★장보고도 이에 그치지 않고 딸을 왕비로 세우려 하였다. 이것은 청해진세력의 강대함을 알려준다. 신무왕은 ★장보고 등 왕권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을 제압하여야 하는 과업을 앞두고 돌아갔다. 능은 제형산(弟兄山) 서북에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金杜珍〉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신라 신무왕릉(新羅神武王陵)
【관리번호】780-230-280-313
【지정사항】사적 제185호
【유적종류】능·원(역대왕과 비빈,세자,후궁의 능·원)
【소 재 지】경상북도 경주시 동방동 660
【시 대】통일신라시대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신라 제45대 신무왕의 능으로 형제산 아래에 있는데 봉토(封土)만
있고 특별한 능묘시설이나 호석같은 것이 없다. 신무왕의 휘는 우
징(祐徵)이고 상대등 균정(均貞)의 아들이니 곧 원성왕의 증손이 된
다. 김명(金明) 등과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을 죽이고 그의 아버지
균정을 추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다시 청해진대사 ★장보고
의 지원으로 민애왕을 죽이고 839년 즉위하였으나 3개월 후 7월에
병사하였다.
【참고문헌】동해문화사, 1995, <<경상북도문화재도록>> 1, 333.
【비 고】1969. 8. 27. 지정.
● 문성왕(文聖王)
?∼857(헌안왕 1). 신라 제46대왕. 재위 839∼85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경응(慶應)이다. 신무왕의 태자.
어머니는 정계부인(貞繼夫人, 또는 定宗太后, 貞從太后), 할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이며 뒤에 성덕대왕으로 봉하여진 균정(均貞), 할머니는 뒤에 헌목태후(憲穆太后)로 봉하여진 진교부인(眞矯夫人) 박씨(朴氏), 비(妃)는 소명왕후(炤明王后)이다. 본래 부인으로 박씨가 있었고, 또 뒤에 위흔(魏昕)의 딸로 비를 삼은 일이 있는데, 소명왕후는 이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신무왕은 흥덕왕이 죽은 뒤 계속되어온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지만 6개월도 못 되어 죽어, 왕위쟁탈과정에서 쌓여온 많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숙제는 그 아들 문성왕대로 고스란히 넘어오게 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왕위를 둘러싼 균정계와 원성왕의 장자 인겸(仁謙)의 아들인 충공계(忠恭系)와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이 싸움에서 일단 패한 균정계의 우징(祐徵)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와 김주원(金周元)의 후손 김양(金陽)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그 결과 ★장보고와 김양 등 신무왕을 도운 귀족세력은 그에 상응한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문성왕은 즉위하자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봉하고, 예징(禮徵)을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였고 김양에게 소판(蘇判)의 관등을 주면서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하였다. 반면, 이와같은 귀족세력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841년(문성왕 3) 홍필(弘弼)의 모반은 그러한 모순의 첫번째 노출에 불과하다.
846년 ★장보고의 반란이 있었다. ★장보고는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세우려 하였는데, 조신들이 해도(海島)사람의 딸을 왕비로 맞을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자, 청해진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염장(閻長)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한 인물이 김양이라 하는데, 842년 김양이 그의 딸을 왕비로 세우는 기사가 이러한 추측을 낳게 한다. ★장보고의 난이 진압되자 851년 청해진을 혁파하였으며, 그곳 민호(民戶)를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시켰다. 궁복(弓福:張保皐의 별명)의 난 이후에도 정치적인 불안은 계속되었다.
847년 이찬(伊飡) 양순(良順)과 파진찬(波珍飡) 흥종(興宗)의 반란이 있었고, 849년 이찬 김식(金式)·대흔(大昕)의 반란이 있었다. 양순이나 대흔은 모두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전래로부터 계속된 왕위 다툼은 그대로 계속되다가, 857년 문성왕은 숙부 의정(誼靖)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유조(遺詔)를 내리고 죽었다.
이것은 그 한달 전에 문성왕을 도와오던 김양이 죽자, 상대등인 의정과 시중인 계명(啓明)이 결합하고 왕을 핍박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0, 1980). 〈金杜珍〉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김항용 - 지금 보고 있습니다.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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