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사공 金士廉 ⑥(여말선초 두문동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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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9-17 06:29 조회2,333회 댓글0건본문
안렴사공 金士廉 ⑥(여말선초 두문동시절)
■ 안렴사공 김사렴의 여말선초 역성혁명시의 두문동 시절 등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말충의열전>
드디어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함에 청주 오근촌으로 숨어들어가 일찍이 한양을 향하여 앉지도 아니하고 매양 "열녀는 불경이부이거늘 충신이 어찌 두 임금을 섬길 것이냐" (烈女不更二夫 忠臣豈事二君) 하였다. <♠두문동서원지>
조선조에 불복하고 오직 고려만을 사모하며 그 강개한 충성으로 의리를 같이하는 동지들과 운곡의 집으로 모여 단사에 종참하였다. 이 단사는 운곡 원천석 선생이 고려의 宗社를 잇고자 원주 치악산 정산에다 단을 만들어 단군,기자,고려태조 등 列聖과 공민왕, 여흥왕, 윤왕, 간성왕 등 變革을 당한 왕들을 비롯하여 고려조에 충성하다가 살신성인한 충신들을 매년 춘추로 제사드렸던 것이다. <♠화동인물총기>
이태조가 선생에게 좌사간을 삼아 여러차례 불렀어도 나아가지 않고 드디어 도산으로 옮겨가 더욱 문을 굳게 닫고 손님도 거절하였다.
임종이 다가옴에 여러 아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나는 고려의 옛 신하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 국가를 존속시키지 못하고 나라가 망함에 또한 몸을 순국치 못한 천하의 죄인이니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선왕을 뵈옵고 선조를 함께 하겠는가. 내가 죽으면 깊은 산중에 장사하여 봉분도 짖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이미 前朝에서 벼슬한 자는 다시 벼슬하지 말라" 고 遺戒하였으므로 그 유명을 쫒아 평장하였다. <♠고려명신전>
<여말의충절 김사렴>
공이 영호남 지방의 안렴사로 외직에 재직하고 있을 때 드디어 이성계 일파가 고려를 찬탈하는 역성혁명이 일어났다. 공을 비롯해서 많은 신하들은 오직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만을 섬기고자 두문동 동지들과 규합하여 생사를 같이하면서 새 조정에 나아가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이들 망복지신 (나라가 망하여 새 왕조의 신하가 되지 않은 신복) 들은 주지하는 대로 두문동 72현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아 오면서 두문동 서원에서 향사를 받들어 왔는데, 공은 이 중 항절반에 모셔져 왔다.
또한 공은 "여말 8청"의 한분으로서 추앙을 받았는데, 이분들은 고려 사직이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게 되자, 불사이군의 절의로 벼슬을 그만두고, 배록동에 은거하였는데, 공을 비롯하여 어은 金浚, 어촌 孔(마음심)府, 대은 李裕, 둔촌 李集, 대제학 尹珪, 사암 閔(마음심)兪, 송은 具鴻 등을 이른다.
배록동이란 이씨 조선에서 전조의 신하들에게도 봉록을 주었지만, 이들 고려의 절신들은 한 마을에 살면서 이를 거절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분들 모두 "두문동 72현"으로 모셔져 내려오고 있다.
고려가 망하고 이씨조선이 개국하게 되자 공은 1392년 (이조태조 원년, 임신)에 충북 청원군 오창면 오근촌으로 숨어 들어가, 세상 사람들을 멀리하고 이태조가 개국한 한양 쪽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으며,
언제나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열녀불갱이부 충신불사이군)" 는 고사를 외웠다. ([두문동서원지])
그리고 공은 조선조에 불복하고 오직 고려만을 사모하며 그 강개한 충성으로 의리를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耘谷 元天錫의 집에 모여 壇祀(단사)에 종참하였다.
당시 운곡은 고려말에 군벌이 설치고 국기가 흔들리면서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원주 치악산 밑에 숨어 들어가 시국을 개탄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살아가던 터였다.
그런데 혁명 역도들이 우왕, 창왕을 시해하고 훈구 대신들을 몰아내는 것을 보자 비분강개한 충성으로 비록 나라는 망해도 고려의 종사만은 끊어지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치악산 정상에다 계단을 설치하고
단군, 기자, 고려 태조 등의 열성과 변혁을 당한 왕들을 비롯하여 살신성인한 충신들을 종묘제례와 똑같이 제사를 올렸다. 이 단사를 變祀(변사) 또는 革祀(혁사)라고도 불렀는데,
이에 종참한 분들은 공(김사렴)을 비롯하여 이양중, 최청몽, 서?, 탁신, 조승숙, 이집, 최원도, 조유, 김로, 음양동, 하자종, 성여완, 이?, 이원, 겅계성, 우성유, 방직범, 최양, 부종의, 설지유, 김약시 등인데 이에 참사한 분들은 모두 80인 이었다고 한다. ([화해사전], [화동인물총기]참조)
이씨조선이 개국한 뒤에 이태조는 공의 강직한 인품과 덕망을 이미 잘 알고 있는 터였기 때문에 司諫院 左司諫이란 벼슬을 주면서 여러 차례 불렀지만 끝내 나아가지 않고 더욱 문을 굳게 닫아 걸고 두문불출하였다.
■ 조선태조 이성계의 약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조 太祖 [1335~1408]
조선의 제1대 왕(재위 1392∼1398).
본관 : 전주(全州)
호 : 송헌(松軒)
별칭 : 자 중결(仲潔), 휘(諱) 성계(成桂)
활동분야 : 군사, 정치
출생지 : 함남 영흥(永興)
본관 전주(全州). 자 중결(仲潔). 호 송헌(松軒). 성 이(李). 휘(諱) 성계(成桂). 시호 지인계운성 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함경도 영흥(永興) 출생. 자춘(子春)의 2남. 즉위 후 휘를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비(妃)는 한경민(韓敬敏)의 딸 신의왕후(神懿王后), 계비는 강윤성(康允成)의 딸 신덕왕후(神德王后).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내부(來附)한 뒤 이듬해 유인우(柳仁雨)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이에 내응(內應)하여 공을 세웠고, 후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1361년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토벌하였으며, 같은 해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다음해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전에 참가하여 제1착으로 입성, 전공을 세움으로써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승진되고, 원(元)나라의 나하추[納哈出]가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침입하자 함흥평야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1364년 원나라 연경(燕京)에 있던 최유(崔濡)가 충숙왕(忠肅王)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고 1만 명의 군대로 평안도에 침입하여 공민왕을 폐하려 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이들을 달천강(악川江)에서 대파하고, 이어 여진족(女眞族)의 삼선(三善) ·삼개(三介)가 함경도 화주(和州)에 침입한 것을 격퇴하였다.
이 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록되었다. 1368년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 ·문하성지사(門下省知事)로 승진, 1372년(공민왕 21) 화령부윤(和寧府尹)이 되고, 1377년(우왕 3) 왜구가 개경을 위협할 때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이를 격퇴하였다. 1380년 양광 ·전라 ·경상도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가 되어 운봉(雲峰)에서 왜구를 소탕하고 1382년 찬성사(贊成事)로서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었다. 다음해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함경도에 침입한 호바투[胡拔都]의 군대를 길주(吉州)에서 대파하였으며, 1384년 동북면도원수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고 이듬해 함경도 함주(咸州)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
1388년(우왕 14)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최영과 함께 권신(權臣)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을 처형, 이때 명(明)나라의 철령위(鐵領衛) 설치 문제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출정을 반대했으나 거절당했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후 창왕(昌王)을 세웠으며, 자신은 수시중(守侍中)으로서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였다. 다음해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웠다. 1390년(공양왕 2) 삼사영사(三司領事)로 승진하였고, 1391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로서 조준(趙浚) 등과 함께 구신(舊臣)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구신들은 경제적 기반을 잃었고, 그의 일파인 신진세력은 경제적인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 그 해 7월 공양왕을 양위시키고 스스로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이듬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정하고 1394년(태조 3) 서울을 한양(漢陽)으로 옮겼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과(芳果:定宗)에게 선위한 뒤 상왕(上王)이 되고, 1400년 방원(芳遠)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되었다. 1402년 왕자들의 권력 다툼에서 빚어진 심뇌로 동북면에 가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돌아왔고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냈다. 사대주의(事大主義) ·배불숭유(排佛崇儒) ·농본주의(農本主義)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조선 500년의 근본 정책이 되게 하였고 관제의 정비, 병제(兵制)와 전제(田制)의 재조정 등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묘호(廟號)는 태조, 능은 건원릉(健元陵)이다.
■ 두문동 관련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 두문동 杜門洞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光德山) 서쪽에 고려왕조의 충신들이 모여 살던 곳.
이성계(李成桂)의 조선건국(朝鮮建國)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 신규(申珪) 등 72인은 개성 남동쪽에 있는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에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두문동에 들어가 끝까지 신왕조(新王朝)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72명의 고려 충신들을 몰살하였는데, 후일 정조(正祖)때, 표절사(表節祠)를 그 자리에 세워 그들의 충절(忠節)을 기렸다.
⊙ 고려수절신 高麗守節臣
조선이 개국된 시기를 전후하여 유학(儒學)의 대의명분론을 내세워, 왕씨(王氏) 고려에 충성을 하고 새로 개국한 이씨(李氏) 조선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은 학자.
이들은 고려 멸망 전 은둔생활을 하며, 이성계(李成桂)의 등극을 반대하다 살해되기도 하고, 조선 개국 후에는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두문동에 들어간 72명의 이름이 전하는데, 전부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것은 아니고,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은 사람들도 있다.
수절신으로는 다음의 이름들이 들어 있다.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길재(吉再) ·서견(徐甄) ·원천석(元天錫) ·김진양(金震陽) ·이숭인(李崇仁) ·조연(趙捐) ·안원(安瑗) ·김주(金澍) ·우현보(禹玄寶) ·조신충(曺信忠) ·이고(李皐) ·이집(李集) ·김자수(金自粹) · 송유(宋愉) ·허도(許棹) ·허금(許錦) ·이양중(李養中) ·박유(朴愈) ·윤충보(尹忠輔) ·조의생(曺義生) ·고천상(高天祥) ·신규(申珪) ·신우(申瑀) ·임선미(林先味) 등이다.
⊙ 두문동칠십이현 杜門洞七十二賢
조선의 개창에 반대해 두문동에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를 지킨 72명의 고려 유신(遺臣)을 이르는 말.
72명의 이름은 현재 모두 밝혀지지는 않았고, 신규(申珪) ·신혼(申琿) ·신우(申瑀)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이경(李瓊)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서중보(徐仲輔) 성사제(成思齊)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이의(李倚) 등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으로, 칠십이현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 ·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빚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
■ 여말선초의 역성혁명시에 우리가문의 인물 가운데
고려조 충신으로 기록된 분은 안렴사공 김사렴, 군사공 김칠양, 자포옹 김전 (미확인), 전서공 김성목과 그의 아들 학당 김휴가 있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여한 분은 익원공 김사형, 안정공 김구덕, 정의공 김철이 있습니다.
이때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고려조 충신으로 절의를 지킨 분들은 정몽주나 이색의 경우처럼 죽음이나 몰살을 당한 사람들이 많은데, 위에 열거한 분들은 이리저리 피해다니고 향리에 운둔한 기록은 있어도 죽음을 당한 경우는 없는데, 이는 아마도 익원공 김사형의 영귀로 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려조 충신>
表節編
梧隱 金士廉
*방경- (3/5)순- (4/4)영후- (1/2)천- (2/4)안렴사공 사렴
義節編
康隱 金七陽 (?-?)
*방경- (1/5)선- (2/4)승용- (1/2)후- (3/3)군사공 칠양
靖節編
自逋翁(자포옹) 金鈿(김전) (?-?)
?*방경- (3/5)순- (4/4)영후- (2/2)판삼사? 장- (1/2)일?, (2/2)전?,
*방경- (3/5)순- (4/4)영후- (2/2)장령공 장- (1/1)서운관정공 유
靖節編
典書 金成牧(?-?)
*방경- (1/5)선- (2/4)승용- (2/2)구- (1/2)전서공 성목
義節編
學堂 金休 (?-?)
*방경- (1/5)선- (2/4)승용- (2/2)구- (1/2)전서공 성목- 휴
<조선조 개국공신>
김사형(金士衡) <1333-1407(충혜왕2-태종7)>
*방경- (3/5)순- (4/4)영후- (1/2)천- (4/4)익원공 사형
김구덕(金九德) ?∼1428(세종10)
*방경- (1/5)선- (3/4)승택- (1/2)묘- (3/3)안정공 구덕
김 철(金 哲)
*방경- (4/5)윤- (2/2)영요- (1/1)행- (2/2)정의공 철
<대종회보 제68호, 2000.4월>
여말충의열전에 수록된 우리 선조님들 약기
사단법인 고려숭의회출판부에서 출간한 여말충의열전에 수록된 선조님들의 약기를 이번 68호 종보에 소개합니다.
表節編
⊙ 梧隱 金士廉 (1335-1405)
*방경- (3/5)순- (4/4)영후- (1/2)천- (2/4)안렴사공 사렴
義節編
⊙ 康隱 金七陽 (?-?)
*방경- (1/5)선- (2/4)승용- (1/2)후- (3/3)군사공 칠양
호는 강은이니 안동인으로 첨의평리 厚의 아들이요 밀직사사 承用의 손자요, 稼亭 李穀의 문인이다.
공은 젊어서부터 재주와 덕망이 뛰어났으며 일찍이 성리학의 강구하여 포은 정몽주와 재종인 척약재 김구용, 목은 이색을 從遊하여 그 의리 명분을 같이 하였다.<세보>
여말에 늦게나마 수안군사를 지냈으나 고려가 망한 후에는 절의를 지켜 강진 긍릉산 선묘하에 은거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이조참의를 삼아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대동기문>
공이 모든 아들들에게 훈계하여 이르기를
"나는 옛 고려국의 世臣으로 비록 나라와 함께 망하지는 못하였더라도 너희들의 학문을 닦아 충성으로 새 나라의 聖王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아들 진(土+眞)과 돈(墩) 형제는 과연 친명을 쫓아 早歲에 등과하여 모두 제학이 되었다. <세보>
靖節編
⊙ 自逋翁(자포옹) 金鈿(김전) (?-?)
?*방경- (3/5)순- (4/4)영후- (2/2)판삼사? 장- (1/2)일?, (2/2)전?,
*방경- (3/5)순- (4/4)영후- (2/2)장령공 장- (1/1)서운관정공 유
호는 자포옹이니 안동인으로 판삼사 場의 아들로서 벼슬이 영동정 첨의찬성사(정2품)이다.
고려가 망함에 망복의 뜻을 굳게 지켜 큰 형님 부정 일(鎰)을 뫼시고 뜻을 같이하는 제현과 함께 서쪽 벽란진을 건너서 수양산 서쪽 삼곡리 해추 마을에 은거하여 그 절의를 지켰다.
선생이 은거하자 처음에 마을 이름을 자포동이라 하고 또 선생의 호로 삼으니 이는 세상에서 숨어살고자 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마을 뒤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있어 항상 이 산에 올라가 개성 송악산을 돌아나오는 구름을 바라보며 고국을 사모하는 슬픈 뜻을 새겨 그 봉우리를 고려봉이라 이름부치니 이는 전 임금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선생의 그 청고한 지절이 지금도 전송되고 있으며, 유허비가 있다. 뒤에 두문동 서원에 배향하였다.
靖節編
⊙ 典書 金成牧(?-?)
*방경- (1/5)선- (2/4)승용- (2/2)구- (1/2)전서공 성목
공은 안동인으로 구(王+久)의 아들이요, 밀직사사 承用의 손자요, 평장사 方慶의 후손이다.
여말이 벼슬이 공조전서에 이르렀다.
때에 고려를 반역하여 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이 조정에 창궐하여 고려의 운이 기울어지자 선생은 문하평리 변빈, 판서 성만용, 박사 정몽주, 제학 홍재, 대사성 이색, 전서 조열, 전사 이오, 단구재 김후 등과 공당에서 기약없이 모여 술을 기울이며 정란을 상심 개탄하다가 합잠시를 지어 읊고 눈물을 흘리며 이색이 말하기를
"옛날 은나라에 3仁이 있어 나라가 망하자 비간은 죽고, 미자는 가고, 기자는 종이 되었다고 하니 우리도 각자의 의사에 따라 행동합시다" 하고 마침내 고려가 망함에 모두 망복지신의 절의를 지켜 은거하였다.
<본 홈페이지>
고려 때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으며,
1392년 조선(朝鮮)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충남 연기(戀岐)에서 은거했다.
義節編
⊙ 學堂 金休 (?-?)
*방경- (1/5)선- (2/4)승용- (2/2)구- (1/2)전서공 성목- 휴
자는 연부요 호는 학당이고 成牧의 자로 안동인이다.
공은 고려말에 사간을 역임하고 <金承露 實錄>
고려가 망함에 향리에 퇴둔하여 조선조에서 여러차례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학을 교육하면서 그 貞節을 지켰다. <대동운부군옥>
유고(遺稿)가 있다.
⊙ 김사형(金士衡)
*방경- (3/5)순- (4/4)영후- (1/2)천- (4/4)익원공 사형
고려, 조선시대[1333-1407(충혜왕2-태종7)]의 문신. 자는 평보(平甫)이고, 호는 낙포(洛圃). 시호는 익원(翼元). 본관은 안동(安東)임. 고조는 방경(方慶), 할아버지는 영후(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천46)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 2)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이23)·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정몽주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여러 장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응양상장군(門下侍郎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上將軍)에 올랐다.
같은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食實封)300호를 받았다.
그뒤 좌정승을 지냈고 1398년(태조 7) 제1차왕자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하여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책봉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는 배극렴(裵克廉)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원로구신이며, 가문이 귀현(貴顯)하였고 마음이 청고하여 이성계가 아꼈다고 한다.
조준과 함께 8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는 모두 조준이 전단(專斷)하였고, 말을 신중히 하고 스스로 삼가며 분수를 지켜 조준의 의견에 따랐으며, 적을 가지지 않았다.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된 것은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니며, 처음에는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다고도 한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韓永愚〉
⊙ 김구덕(金九德) ?∼1428(세종10)
*방경- (1/5)선- (3/4)승택- (1/2)묘- (3/3)안정공 구덕
조선의 문신.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 19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
다가 연안 부사(延安府史)·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에 올랐다.
1401년 (태종11) 딸이 태종의 명빈(明嬪)이 되자 동지총제(同知摠制) 한성 부윤(漢城府尹)·강원도 관찰사·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등을 역임.
다시 한성부 판윤으로 1414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지돈령부사(知 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
⊙ 김 철(金 哲)
*방경- (4/5)윤- (2/2)영요- (1/1)행- (2/2)정의공 철
호(號)는 양파(陽坡). 고려말에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을 지내고, 안동군(安東君)에 봉해졌으며,
1392년 조선개국(朝鮮開國)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 이어 공조(工曹)·예조(禮曹)의 판서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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