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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白凡 金九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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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1-06 20:20 조회1,5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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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白凡 金九先生) (1876년 고종13년∼1949년. 74세)

김구선생은 초명이 창수(昌洙)(會), 호는 백범이고 익원공 김사형의 21세손이며, 참의공 김황의 18세손으로 전 교통부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김신(金信)의 선친이다. 선생은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보명재하, 在夏)과 어머니 현풍곽씨 곽낙원(郭樂園)의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배웠고, 17세에 과거보러 갔다가 풍기가 문란하여 분개하여 돌아와 18세에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어 교도 700명을 끌고서 탐관오리들과 싸우다가, 안중근의사의 부친인 안태훈 공에게 가서 고능선 선생의 지도를 받으니 그의 나이 20세였다. 그해 8월 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손에 시해되자 울분한 생각을 참지 못하고, 표연히 길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만주 각처를 유랑하다가 국내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그 이듬해 2월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군사간첩 육군중위 토전양란이란 자를 죽임으로서 지난해 국모를 시해한 원한을 풀기는 하였으나, 그로 인해 내부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인천감옥에 옥살이를 하는동안 어머니가 식모살이를 해가며 옥바라지를 한 것은 특기할 일이거니와 선생은 사형결정 혹은 집행 보류 등 앞날이 확정되지 않은 채로 23세인 해 3월 7일밤에 탈옥을 감행하여 방랑하다가 공주마곡사에서 스님이 된 것도 또한 기구한 운명이다.
 몇 년 후에 속세로 돌아와 아버지를 여의고, 예수를 믿고 해주 최준례와 결혼하니 29세였다. 30세에 을사 매국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와 이준 등과 함께 조약 철회를 상소했으나, 여의치않자 이동영,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일으켰다. 36세때 사내총독 암살사건에 앞서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체포되어 17년 징역 판결을 받고 옥에 있을 때, 왜경은 선생을 새로 산 밭의 돌맹이 같은 자라 했으나, 어머님이 찾아와 네가 경기 감사가 된것 보다 더 기쁘다고 했으며, 선생은 항상 눈물로 구국 기도를 하되 우리나라가 독립되어 우리 정부청사를 쓸고 닦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주소서 하고 기원하였으며, 차츰 형기가 줄어 39세 7월에 가석방되어 몇해동안 교육에 전념하였다. 44세때 3.1만세 운동이 일어나 분연히 결심하고서 조국을 떠나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에 취임하면서부터 조국 광복을 위한 해외 활동이 시작되었다. 51세에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니 국내에서 민족단일전선으로 신간회가 결성된 해이다. 그 이듬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니 광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독립의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파괴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어 56세 되던 해 겨울 이봉창 의사를 일본에 보내어 일본천황 히로히토를 저격하는데 쓸 자금과 수류탄을 주어 동경으로 보내어 이듬해 1932년 1월 8일 왜왕을 저격케 하였으나 불행이도 적중하지 못하고, 이봉창 의사는 체포되어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0월 10일에 32세로 순국하였다.
   선생은 계속하여 다시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같은해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만주침략의 괴수 시라카와 대장을 폭살케하여 우리민족의 애국투쟁 정신을 크게 떨쳤으나, 윤봉길 의사는 왜놈의 형장에서 12월 19일 25세 나이로 순국하였다. 선생으로 인하여 국제적인 신임을 얻게 되어 중국 장개석 총동과 서로 만나 낙양군관학교에 독립군 특별반을 두어 한중합작으로 항일투쟁에 대처할 것을 합의했으며, 63세때 임시정부 주석이 되고 그해 5월 일본 특무기관의 꼭두각시가 된 반역자의 총탄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가 소생하니 줄기찬 뜻은 꺾일 수가 없었다. 다음해에 임시정부를 중경으로 옮기고, 각 정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에 취임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이집트 카이로 회담에서도 독립보장을 받았으나 70세되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으로서 역사는 하루아침에 바뀌어졌다. 그러나 세상을 여윈 동지들, 어머니, 그리고 부인과 맏아들 인(仁)이 광복의 기쁨을 같이 누리지 못한 것이 슬펐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11월 23일, 망명생활 27년만에 조국땅을 밟으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직후 모스코바 삼상 회의에서 발표한 한국 신탁 통치안에 대대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듬해 71세에는 민주의원 총리가 되고 다음해에는 국민의회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남한만의 선거를 실시하게 되자 조국의 분단이 영구화 될 것을 걱정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73세 되던해 4월 19일에는 통일을 위하여 남북협상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족적 의무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통일은 차츰 멀어만 갔건마는 선생은 변함도 굽힘도 없이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말과 글로 외치며, 무릇 역사 행진이란 그 방향을 출발점으로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안됨을 애타게 부르짖다가, 그 이듬해 1949년 6월 26일 정오 경교장에서 흉한 안두희의 저격을 받아 숨을 거두시니, 국민은 큰 지도자를 잃었고 통일과업은 역사의 숙제로 남게 되었고, 드디어는 6.25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는 등 날이 갈수록 앞길이 어두어져만 갔다. 그러나 우리 가슴속에 새긴 선생의 뜻과 정신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더욱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한 현시점에서 감회가 깊지 않을 수 없다. 매년 양력 6월 26일 효창공원 묘소에서 추모제(신미보 1권 78쪽, 기미대보 8권 48쪽).
   백범 김구 선생 기념관은 효창운동장 옆에 대지면적 5,552평, 건물 연건평 2,929평, 지하층 지하1층 주차장, 사무실, 자료실, 전기기계실 등 지상층 1,844평, 지상 2층 전시실, 전시홀, 다목적실, 회의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사기간은 2001.5.12∼2002.10.5(17개월), 총 사업비는 180억원(국고보조금 160억, 모금 20억)이 소요되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상진 - 정말 제가 존경하는 분이랍니다..감사합니다..
▣ 김윤식 - !!!
▣ 김윤만 -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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