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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태보공 김알지에서 경순왕까지 02 (2세 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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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1-09 03:13 조회1,6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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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시도기념물 34호

명 칭 ●경주능지탑지 (慶州陵只塔址)

분 류 유지

수 량 일원

지정일 1982.08.04

소재지 경북 경주시 배반동 621-1

소유자 국유

관리자 중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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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은 임종 후 10일 내에 왕궁 밖 뜰에서 검소하게 화장하라고 유언하였는데, 탑 주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되고 사천왕사, 선덕여왕릉, 신문왕릉과 이웃한 것으로 보아 문무왕의 화장터로도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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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경주능지탑지(慶州陵只塔址)

이 탑은 예로부터 능시탑(陵示塔) 또는 연화탑(蓮華塔)이라 불려 왔는데 이 주변에서는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의 일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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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릉비 文武王陵碑

신라 문무왕의 능비.



최대 높이 52cm. 너비 64cm. 두께 24cm. 682년(신문왕 2) 건립.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1796년(정조 20) 비석 조각 2개가 처음 발견되었다가 분실되었는데,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그 가운데 1개가 다시 발견되었다. 그런데 청나라의 유희해(柳喜海)는 1796년에 발견된 비석 조각의 탁본 네 장을 입수하여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실었으므로 그 내용이 전해지게 되었다. 글자는 적갈색 화성암(火成岩)의 앞뒷면에 가로 3.2cm, 세로 3.3cm의 크기로 네모칸[井間]을 긋고 그 안에 2cm 정도의 크기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국학(國學) 소경(少卿:차관)인 김□□(□□는 마멸되어 안 보이는 글자)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고, 글씨는 대사(大舍) 한눌유(韓訥儒)가 구양순체의 해서로 썼다.



비가 깨어지고 마멸된 부분이 많아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 왕실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업적, 신라의 백제 평정 사실이, 뒷면에는 문무왕의 죽음과 유언, 문무왕에 대한 찬미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특히 김씨의 시조를 성한왕(星漢王)이라 하고 문무왕의 15대조라고 함으로써, 당시 신라 왕실 계보와 조상에 대한 인식을 살필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비의 성격을 왕릉에 세운 능비로 보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무덤을 쓰지 않고 화장하여 그 재를 동해에 뿌렸다는 사실과 어긋나는 점이 있다. 이 때문에 문무왕과 사천왕사(四天王寺)의 밀접한 관계를 들어 절 안에 능비만 세웠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비문 내용상 죽은 이의 덕을 기리고 있고 명(銘)이 있는 점 등을 들어 묘지(墓誌)로 보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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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 시대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의 문집 ?이계집(耳溪集)?에는 그가 문무왕릉비의 파편을 습득하게 된 경위와 문무왕의 화장 사실, 그리고 대왕암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1796년경 홍양호가 발견했다는 문무왕릉비 두 편 가운데 한 편과 그보다 작은 파편 하나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나무를 쌓아 장사 지내다(葬以積薪), 뼈를 부숴 바다에 뿌리다(硏骨鯨津)?라는 대목이 있다. 결국 대왕암이 세계 유일의 수중릉이라는 것은 후세 사람의 욕심에서 나온 근거 없는 희망 사항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무왕의 호국 의지를 담은 대왕암의 본뜻이다.



대왕암은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무왕의 화장과 관련된 유적지로는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지고 있는 능지탑이 있다. 일제 시대에 발견된 ?사천왕사지 문무왕 비편?이라는 묵서(墨書)를 근거로 문무왕릉비가 사천왕사에 세워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능지탑과 사천왕사 터는 경주 배반동 낭산 기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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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석비(石碑)로 남아 있는 것은 937년에 세운 해주의 광조사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



황남 해주시 학현동 광조사에 있는 고려초 진철대사의 비석. 937년 광조사와 함께 세워졌으나 광조사는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있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4호

명 칭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 (毘盧寺眞空大師普法塔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72.12.29

소재지 경북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 390 비로사경내

소유자 비로사

관리자 비로사



비로사 안에 있는 진공대사의 탑비이다.



진공대사는 통일신라말·고려초에 활약한 승려로, 경주 출신이며, 성은 김씨이다. 가야산 선융(善融)의 제자가 되어 소백산에 절을 짓고 주지로 있다가 고려 태조 20년(937)에 입적하였다, 태조는 시호를 ‘진공대사’라 하고, ‘보법’이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비의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산(山)모양의 머릿돌을 얹은 모습인데, 비몸이 갈라져 일부가 파손되었다. 거북받침은 새겨진 조각이 얕아 둔해 보이며 등 중앙에 비를 꽂는 네모난 홈을 마련해 두었다. 머릿돌은 구름과 용무늬를 새겨 놓았는데, 화려하긴 하나 깊이 새긴 것은 아니다.



고려 태조 22년(939)에 세운 비로, 비문은 최언위가 짓고, 이환추가 글씨를 썼다.



문화재명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毘盧寺眞空大師普法塔碑)

진공대사(眞空大師)(855∼937)의 속성(俗姓)은 김씨(金氏), 선조(先祖)는 신라(新羅)의 왕계(王系) 확종(確宗)의 아들, 어머니는 설씨(薛氏)로서 가야산(伽倻山)에 입산하여 선융(善融)에게서 승려(僧侶)가 되고 신라 경문왕(景文王) 14년(874) 가야산 수도원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삼장(三藏)을 연구하였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20년(937) 태조의 후삼국(後三國) 통일(統一)을 진하(進賀)하고 열반하였으니 태조가 시호(諡號)를 주고 명하여 태조 22년(939)에 보법탑비를 이곳에 세웠다. 시호(諡號)는 진공(眞空)이며, 탑호(塔號)는 보법(普法)이다.













종 목 사적 30호

명 칭 ●신라흥덕왕릉 (新羅興德王陵)

분 류 능

면 적 61,983㎡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

시 대 통일신라 흥덕왕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주시



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의 무덤으로 무덤제도가 잘 갖추어진 왕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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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앞 왼쪽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비석을 받쳤던 거북이 모양의 귀부만 손상된 채 남아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무덤의 위치가 이 무덤과 대체로 일치하며, 왕릉 주위에서 ‘흥덕’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비석조각이 발견되어 이 무덤이 흥덕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있다. 전체적인 배치와 장식물의 양식으로 볼 때 성덕왕릉과 괘릉의 형식을 많이 본따고 있다.



문화재명 신라흥덕왕릉(新羅興德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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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왕릉(王陵)의 전방 좌측에는 능비(陵碑)를 세웠는데, 능비(陵碑)는 현재 귀부(龜趺)만 남아 있고 비신(碑身)과 이수(이首)는 없어졌다. 귀부(龜趺)의 조각 수법은 성덕왕릉(聖德王陵)의 귀부와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왕릉은 성덕왕릉(聖德王陵)과 괘릉(掛陵)의 형식을 모방하여 건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장지가 【안강북 비화양(安康北 碑火壤)】이라고 하여 현재의 위치와 대체로 부합되며, 특히 왕릉의 주위에서 【흥덕(興德)】이란 명문의 비편(碑片)이 발견되어 이 능(陵)이 흥덕왕릉(興德王陵)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신라 흥덕왕릉(사적 제30호)

Back Next Manu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군 안강읍 육통리

이 능은 신락 흥덕왕(826-836)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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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방 좌측에 비를 세웠던 귀부만 남아 있으나 이 주변에서 흥덕이라고 새긴 비의 조각이 수습되어 흥덕왕의 무덤임이 분명히 밝혀졌다.















종 목 시도기념물 32호

명 칭 ●김인문묘 (金仁問墓)

분 류 묘

수 량 7,687㎡

지정일 1982.08.04

소재지 경북 경주시 서악동 1006-1

소유자 국유및사유

관리자 경주시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문무대왕의 친동생 김인문(629∼694)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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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김인문묘(金仁問墓)

이 무덤은 신라(新羅)가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을 이룩하는데 공을 세운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친동생 김인문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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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묘비 金仁問墓碑

신라의 장군 김인문의 묘비.

소장 : 국립경주박물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시대 : 신라

크기 : 높이 약63m, 너비 94.5cm, 두께 18cm

종류 : 묘비



높이 약 63cm, 너비 94.5cm, 두께 18cm. 화강암.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1931년 12월 경주 서악동 소재 서악서원(西嶽書院)의 영귀루(詠歸樓) 보수 때, 북쪽 축대석(築臺石)으로 발견되었다. 원비(原碑)의 절반 이상이 결손되어 훼손이 심하고, 한쪽 면에 새겨진 약 4백자의 비문은 해서(楷書)로 음각되어 있으나, 알아보기가 어렵다. 비면에 ‘祖文興大王’ ‘太宗大王歎美其功’ ‘公爲副大摠管’ 등의 글귀로서 김인문묘비로 추정한다. 건립연대는 현존 비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며, 695년(효소왕 4) 경주 서쪽에 매장하였다는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으로 보아, 7세기 말로 추정된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는 비의 탑본을 김유신묘비로 잘못 추정하였고, 《대동금석총목(大東金石總目)》에서는 ‘함형 4년에 세웠는데, 경주에 있다.’라고 하였다. 효종 ·현종 때 이미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멸되어 있었던 듯하다. 통일신라 초기의 확실한 금석문의 하나이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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