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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공 만보당 김수동(文敬公 晩保堂 金壽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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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1-09 05:12 조회1,4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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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공 만보당 김수동(文敬公 晩保堂 金壽童) (1457년 세조 3년∼1512년 중종 7년)

공의 호는 만보당이며 목사공 김적의 장남, 공은 시사에 밝아 1474년(성종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3년후 식년시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예문과 정자, 주서 그리고 의정부 사인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올랐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홍문관에 전임되고 전한 직제학, 부제학을 역임하고 1497년(연산3년)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고, 이듬해 좌승지를 받고 전라도 관찰사와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다시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성학심법 4권을 가지고 왔다.
   그뒤 경상도와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참판 형조판서 겸 지춘추관사 홍문관 제학 등의 요직을 거쳐 1504년(연산10년) 47세때 이조판서에 오르다. 이해 갑자 사화가 일어난바 공은 폐비 윤씨에게 회릉진숭(懷陵進崇)할 것을 주장하여 시행한 사실로 인하여 연산군의 신임을 얻어 정헌대부에 가자가 되었다. 1506년 어머니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물러났으나 왕명으로 단상으로 마치고 3개월 만에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 바로 연산군의 폭정기간이라 정치가 문란하여져 인심이 흉흉할 뿐 아니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충간하는 중신들은 모두 처형 당하는 참변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은 성품이 원만하고 청탁을 모두 거절하고 검약한 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인화력도 좋아 화를 입지 않았다. 그리하여 많은 문신들을 감싸주어 연산군의 폭정으로부터 무사하게 해주었다고 전한다. 공도 이해 연산12년에 연산군 폭정을 바로 잡기 위한 인조반정에 계부인 풍양군 김무와 동생 영안군 김수경과 함께 참여한 공으로 정국공신 2등에 책훈되고 이어서 좌의정을 거쳐 1510년(중종5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때 일어난 왜변(倭變)의 진압을 총지휘하여 평정케 하였다. 1512년에 서거하니 봉호 영가부원군 시호는 문경공이다. 묘소는 대구시 동구 송정동 장등산에 안장되고 향사일은 음 2월 한식일과 10월 15일인바 지역유림들이 향사하고 있다.

 




▣ 김윤만 -
▣ 김항용 -
▣ 김윤식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부회 - 원래는 서울 강서구 신정동?아니면 신월동?에 있었는데 개발됨에 따라 대구로 이장을 모신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는지요 맞는다면 왜 대구로 결정됐는지 배경을 알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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