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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태보공 김알지에서 경순왕까지 05 (조분이사금, 미추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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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1-11 21:23 조회2,2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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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알지 6세손 구도의 아들, 알지 7세손 말구의 형제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284(유례이사금 1). 신라 제13대왕. 재위 262∼284. 미조(未祖, 未照) 혹은 미고(未古)·미소(未召)라고도 한다.

미추의 계보는 알지(閼智)에서부터 비롯하여, 알지→세한(勢漢, 熱漢)→아도(阿道)→수류(首留)→욱보(郁甫)→★구도(仇道)→미추로 이어진다.

그러나 문무왕릉비문을 비롯한 금석문(金石文)자료에는 김씨(金氏)왕실의 시조를 성한(星漢, 聖漢)이라 하여, 이를 세한으로 보는 설과 반대의 설이 있어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미추의 조상으로 역사에 나타나는 인물은 아버지인 ★구도로서 그는 8대 아달라이사금에서부터 9대 벌휴이사금 때까지 활약한 인물이며, 263년(미추왕 2) 갈문왕(葛文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구도는 이칠(伊柒)갈문왕의 딸인 술례부인(述禮夫人, 혹은 生乎) 박씨(朴氏)와 혼인하였고, 그의 딸인 옥모부인(玉帽夫人)은 골정(骨正) 갈문왕과 혼인하였다. 미추이사금의 비(妃)는 조분이사금의 딸인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결국 그는 조분이사금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셈이다.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지금의 榮州?)·괴곡성(塊谷城) 등을 쳐들어왔다는 《삼국사기》의 기사가 있는데,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볼 것인가는 학자에 따라 다른 견해가 있다. 재위 23년에 죽으니 대릉(大陵, 竹長陵이라고도 함.)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14대 유례이사금 14년 이서고국(伊西古國:지금의 淸道)이 금성(金城)을 쳐들어왔을 때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죽엽군(竹葉軍)이 갑자기 신라군을 도와 이들을 물리친 일이 있는데, 이들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찾아보니 죽장릉 위에 대나무잎이 쌓여 있어 선왕(先王)의 음덕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설화가 있다.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 ?∼284

■ 신라 제13대왕

■ 재위 262∼284

미조(未祖, 未照) 혹은 미고(未古)·미소(未召)라고도 한다. 미추의 계보는 알지(閼智)에서부터 비롯하여, 알지 → 세한(勢漢, 熱漢) → 아도(阿道) → 수류(首留) → 욱보(郁甫) → ★구도(仇道) → 미추로 이어진다.

---미추이사금릉에서 출토된 유물



그러나 문무왕릉비문을 비롯한 금석문(金石文)자료에는 김씨(金氏)왕실의 시조를 성한(星漢, 聖漢)이라 하여, 이를 세한으로 보는 설과 반대의 설이 있어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미추의 조상으로 역사에 나타나는 인물은 아버지인 ★구도로서 그는 8대 아달라이사금에서부터 9대 벌휴이사금 때까지 활약한 인물이며, 263년에 갈문왕(葛文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미추이사금릉에서 출토된 금제장신구



★구도는 이칠(伊柒) 갈문왕의 딸인 술례부인(述禮夫人, 혹은 生乎) 박씨(朴氏)와 혼인하였고, 그의 딸인 옥모부인(玉帽夫人)은 골정(骨正) 갈문왕과 혼인하였다. 미추이사금의 비(妃)는 조분이사금의 딸인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결국 그는 조분이사금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지금의 榮州?)·괴곡성(塊谷城) 등을 쳐들어왔다는 《삼국사기》의 기사가 있는데,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볼 것인가는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재위 23년에 죽으니 대릉(大陵, 竹長陵이라고도 함.)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미추이사금 릉



14대 유례이사금 14년 이서고국(伊西古國: 지금의 淸道)이 금성(金城)을 쳐들어왔을 때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죽엽군(竹葉軍)이 갑자기 신라군을 도와 이들을 물리친 일이 있는데, 이들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찾아보니 죽장릉 위에 대나무잎이 쌓여 있어 선왕(先王)의 음덕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설화가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韓國家族의 史 的 硏究(李光奎, 一志社, 1977)

新羅始祖系譜の構成(木下禮仁, 朝鮮史硏究會論文集 2, 1966)

古代祭政と穀靈信仰(三品彰英, 三品彰英論文集 5, 平凡社, 1973)







종 목 사적 175호

명 칭 신라★미추왕릉 (新羅味鄒王陵)

분 류 능

면 적 60,159㎡

지정일 1969.08.27

소재지 경북 경주시 황남동 89-2

시 대 신라 ★미추왕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주시



신라 최초의 김씨 왕으로 백제의 여러차례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한 신라 13대 왕인 ★미추이사금(재위 262∼284)의 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미추왕릉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유례왕 14년(297) 이서고국(伊西古國) 사람이 수도인 금성을 공격하여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군사가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 사라졌다. 누군가 ★미추왕릉에 댓잎을 수북이 쌓인 것을 보고 ★미추왕이 죽어서도 신라를 도와주었다하여 ★미추왕릉을 죽장릉(竹長陵), 죽현릉(竹現陵)이라 부른다고 한다.



경주 황남동 무덤들 중 가장 잘 정비된 대릉원 내에 높이 12.4m, 지름 56.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앞에는 혼이 머무는 자리인 혼유석이 있고, 담장을 돌려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다. 무덤 앞쪽에는 숭혜전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794년 다시 세운 것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다. 내부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문화재명 신라★미추왕릉(新羅味鄒王陵)

경주시내 평지고분군에 있으며 현재 신라(新羅) 사적공원(史蹟公園)인 대릉원(大陵苑) 안에 위치하여 있다. 주변에 대형분(大形墳)이 밀집하여 있으며,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은 그 북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다. 지름 56.7m, 높이 12.4m로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한다.



내부구조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일 것으로 추정된다. 능(陵)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남쪽에는 삼문(三門)이 있으며, 이 삼문을 따라 담장이 돌려져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으나 모두 후대(後代)에 설치한 것이다. 또 능(陵) 전방(前方) 가까운 곳에 왕을 제사하기 위한 숭혜전(崇惠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조선 정조(朝鮮 正祖) 18년(1794)에 다시 세운 것이다.



신라 제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金)(在位 262-284)은 일명 미조이사금(味照尼師今)이며 성은 김(金)씨이고,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으로 갈문왕 구도(葛文王 仇道)의 아들이다. 신라 최초의 김씨 왕(金氏 王)이고 왕비는 광명부인(光明夫人)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왕이 재위 23년에 돌아가니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미추왕릉(味鄒王陵)이 흥륜사(興輪寺) 쪽에 있다고 하여 경주시내 평지고분군 가운데 있음을 전하고 있다.



한편 ★미추왕릉(味鄒王陵)에는 죽엽군(竹葉軍) 전설이 전하고 있다. ★미추(味鄒)의 다음인 유례왕(儒禮王) 14년(297)에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을 침공하므로 크게 군사를 일으켜 막았으나 물리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귀에 댓잎을 꽂은 이상한 군사들이 몰려와 아군과 함께 적을 격파하였다. 적이 물러간 뒤 이 군사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는데 다만 댓잎이 ★미추왕릉(味鄒王陵)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선왕(先王)의 음조(陰助)인 것을 알고 이에 ★미추왕릉(味鄒王陵)을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고 한다.







종 목 사적 15호

명 칭 경주흥륜사지 (慶州興輪寺址)

분 류 사지

면 적 11,683㎡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경북 경주시 사정동 281-1

시 대 신라 진흥왕

소유자 국유,사유

관리자 경주시



흥륜사는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절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가 지은 것이라 전한다. 신라 ★미추왕이 절을 짓도록 하였다고 하나, 창건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며, 규모가 작고 검소하여 초가집을 짓고 불법을 강연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미추왕이 죽자 절은 곧 폐허가 되었고, 그 후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로 다시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5년(544)에 완성되었다. 진흥왕은 이 절을 ‘대왕흥륜사’라 하고 백성들이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왕 자신도 만년에는 스스로 삭발하여 법운이라는 법명을 받고 절의 주지가 되었다. 이후 흥륜사는 대법회를 열고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신라의 큰 절이 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이 전생에 밭을 보시한 절이 흥륜사이고, 김현(金現)이 호랑이와 인연을 맺었다는 절도 이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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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경주흥륜사지(慶州興輪寺址)

흥륜사는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사찰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264년(★미추왕 3)에 고구려 승려인 아도가 공주의 병을 고쳐주고 왕의 허락을 받아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의 하나인 천경림(天鏡林)인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초기의 절은 규모가 크지 않아 초가집을 짓고 불법을 강연하는 정도였는데 그나마도 절을 짓도록 허락한 왕이 죽자 곡 폐허화되었다. 또 초창기 절의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이와 다른 학설이 있으며 눌지왕(417-457년)대에 창건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 알지6세손 구도의 외손자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247(첨해이사금 1). 신라 제11대왕. 재위 230∼247. 성은 석씨(昔氏). 제귀(諸貴)라고도 하는데, 이는 제분(諸賁)의 잘못일 것이다.

벌휴이사금의 손자로, 골정갈문왕(骨正葛文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딸 옥모부인 김씨(玉帽夫人金氏)이고, 비는 내해이사금의 딸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이다.

내해이사금이 죽을 때 사위인 조분에게 왕위를 잇도록 유언하였다고 하지만, 조분은 이미 벌휴의 대손(大孫)이었고 개인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도 왕위계승의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며, 왕비계(王妃系)김씨세력의 영향력도 있었을 것이다.

즉위 후 영토확장에 주력하여 231년(조분이사금 2) 7월에 감문국(甘文國:경상북도 금릉군 개령면)을 정벌하고, 236년 2월에는 골벌국(骨伐國: 경상북도 영천)을 병합하여 각각 군(郡)으로 삼았다.

232년과 233년에는 금성(金城)과 변경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쳤으며, 245년에는 고구려가 북변(北邊)을 쳐들어왔다. 이같은 대외전쟁을 주도하였던 장군은 내해이사금의 태자인 우로(于老)인데, 그는 244년에 이찬(伊飡)에서 서불한(舒弗邯:이벌찬의 별칭)이 되었고 병마사(兵馬事)도 맡아보았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80). 〈辛鍾遠〉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 ?∼247

■ 신라 제11대왕

■ 재위 230∼247

성은 석씨(昔氏). 제귀(諸貴)라고도 하는데, 이는 제분(諸賁)의 잘못일 것이다.



벌휴이사금의 손자로, 골정갈문왕(骨正葛文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딸 옥모부인 김씨(玉帽夫人金氏)이고, 비는 내해이사금의 딸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이다.



내해이사금이 죽을 때 사위인 조분에게 왕위를 잇도록 유언하였다고 하지만, 조분은 이미 벌휴의 대손(大孫)이었고 개인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도 왕위계승의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며, 왕비계(王妃系) 김씨세력의 영향력도 있었을 것이다.



즉위 후 영토확장에 주력하여 231년 7월에 감문국(甘文國:경상북도 금릉군 개령면)을 정벌하고, 236년 2월에는 골벌국(骨伐國: 경상북도 영천)을 병합하여 각각 군(郡)으로 삼았다.



232년과 233년에는 금성(金城)과 변경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쳤으며, 245년에는 고구려가 북변(北邊)을 쳐들어왔다. 이같은 대외전쟁을 주도하였던 장군은 내해이사금의 태자인 우로(于老)인데, 그는 244년에 이찬(伊飡)에서 서불한(舒弗邯:이벌찬의 별칭)이 되었고 병마사(兵馬事)도 맡아보았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民族文化硏究所, 1980)















●이사금 尼師今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 때부터 제18대 실성왕(實聖王)까지 사용한 임금의 칭호.



이질금(尼叱今:爾叱今)·치질금(齒叱今)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사금은 이금[齒理]의 방언으로, 신라 제2대 남해왕이 죽을 때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내가 죽은 후 너희 박(朴)·석(昔) 2성이 연장자로 왕위를 이으라" 하여 그후 김씨도 포함해서 3성이 연치(年齒)의 많음을 따라 서로 왕위를 이은 까닭에 이사금이라 하였으나 이설이 많다.



신라는 제19대 눌지왕(訥祗王) 때에 이르러 임금의 칭호를 마립간(麻立干)이라 고치고, 제23대 법흥왕(法興王)에 이르러서 왕이라는 칭호를 쓰게 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김윤식 -

▣ 김항용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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