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태보공 김알지에서 경순왕까지 10 (13세 흠운-양산전투와 양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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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1-16 02:43 조회1,628회 댓글0건본문
<충북테마기행, 짧은만남 긴여운-전설따라 800리 : 충청북도 관광과, 2002 >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서기 655년 백제가 신라의 강성함을 견제하기 위해 양산지역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자 신라 태종 무열왕은 화랑 출신인 ★김흠운(金歆運)에게 백제군을 막도록 하였다.
★김흠운은 신라군을 이끌고 치열한 전투를 계속했는데, 어느날 새벽녘에 백제군의 기습을 받아 삽시간에 전세가 기울어졌다. 그때 부관이 "지금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워 비록 장군이 싸워서 죽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합니다." 하며 후퇴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김장군은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맡겼거늘 이를 알든 알지 못하든 어찌 명예만 구하리" 하고 말하며,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후에 사람들은 양산전투의 이야기로 양산가를 지어 불렀다. 양산지방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양산가는 다음과 같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 모링이 돌아서 양산을 가세
난들 가서 배 잡아타고 /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 잉어가 논다 잉어가 논다
양산 창포장에 잉어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 자라가 논다 자라가 논다
양산 백사장에 금자라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 장게가 논다 장게가 논다
양산 수풀 속에 무굴 장게가 논다
●송호관광지
금강 상류의 맑은 물과 100년 이상된 송림이 어우러진 가족휴식 공간이다. 야외 물놀이장에는 유아풀, 유수풀, 슬라이드풀 등의 시설을 갖추어 놓고 있다.
양산8경-영국사, 강선대, 비봉산, 봉황대, 함벽정, 여의정, 자풍당, 용암
<충북의 성곽을 찾아서 : 충북학연구소, 2000>
아직도 나제의 싸움 소리가 들리는 영동의 산성들
●대왕산성
영동에서 무주방향 19번 도로를 따라 양강면 묵정리를 지나 학산면 소재지 서산리에 하차하면 학산중·상고 뒤편에 우뚝 솟은 산이 보인다. 바로 산성이 있는 대왕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대왕산성은 학산면 서산리와 박계리, 양산면 원당리 경계의 속칭 성재산에 있는 산성으로 국립지리원 발행의 1:50,000 지도에서는 대왕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산의 높이는 해발 337.8m로 험한 산이 많은 영동군내에서는 낮은 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왕산이 위치하고 있는 서산리는 영동·무주·금산 방면의 세 길이 갈리는 교통의 요지다. 또한 박계리와 원당리가 금강을 북·서쪽에 끼고 있어 전략적인 요충에 해당된다.
이 산성에 대한 기록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지명은 기술되어 있지 않고 "아평 부락의 약 500간 대왕산의 정상에 있는 돌로 쌓은 산성으로서 둘레는 약 360간이며 성벽은 붕괴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1960년에 발행한 <영동군지> 산천조에는 "일명 대봉산이라 하며 양산·학산·용화의 3면의 경계를 이루는데 이 3면은 통칭 양산이라 부른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대양산은 곧 양산 지역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라 할 수 있는데 이곳에 축조된 대왕산성은 대양산성이라는 명칭으로 같은 책 성곽조에 기록되어 있다.
대왕산성은 신라가 축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곳에서의 전쟁은 당연히 백제를 상대로 하였을 것이나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옥천군 고적조에 양산 전투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양산에 대한 기록이 옥천군편에 나오는 것은 당시에 양산지역이 옥천군에 속하였기 때문인데 이 양산전투의 내용은 <삼국사기>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동사강목> <대동지리> <동경잡기> <대한불교통사> <영동군지> 등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원전인 <삼국사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종 무열왕 2년 (655) 정월에 고구려, 백제, 말갈연합군에게 신라의 북변 33성을 빼앗기자 신라에서는 ★김흠운을 낭당대감으로 삼아 백제지역으로 쳐들어가 양산 아래에 진을 치고 조천성을 치려 하였으나 밤을 타서 백제군이 선제 공격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김흠운은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에 세상 사람들이 이를 듣고 "양산가"를 지어 슬퍼하였다는 내용이다. 현재 양산 송호리 솔밭에 양산가의 내용을 적은 비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신라때 영동군에 속하였던 양산현은 본래 조비천현이므로 조천과 조비천을 같은 지명으로 본다면 조천성은 이곳 양산 일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조천성을 지금의 대왕산성으로 추정하는 설과 이 대왕산성의 서쪽 약 4km 지점에 있는 비봉산이라 추정하는 설이 있는데, 조비천과 조천이 같은 지명이고 조천성이 조비천현의 치지라고 한다면 비봉산성은 유적이나 출토유물의 상황이나 지형관계로 보아 치지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대왕산성이 김흠운과 관련이 있는 조천성이라 볼 수 있으며 조비천현과 신라 경덕왕때 개명된 양산현의 치지라 하겠다.
송호리 일대의 구양산 지역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이 산성은 북-남방향으로 뻗은 산등성이의 남서쪽 끝 2개 산봉을 감싸고 구축한 마안형 석축산성이다. 이 산성은 송호리쪽을 향한 북쪽이 절벽을 이루었고 남쪽 학산쪽으로는 다소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다.
이 산성은 석축 위에 토축한 소위 토석축성인데 성벽은 거의 대부분 허물어져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다만 허물어진 돌무더기를 따라 성이 있었다는 윤곽을 살필 수 있을 뿐이다.
성벽의 축조는 외벽만 석축하고 안쪽은 주로 산허리를 깍아 내탁한 것으로 보인다. 토량이 많이 무너진 부분에는 석축이 노출되어 있는데 원형이 잘 남아 있는 곳에서는 폭 5-6m의 성벽부를 확인할 수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토기편과 함께 신라토기 또는 고려시대의 토기 자기편이 발견되고 있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도 계속된 듯하다.
---대왕산성 정상부
---서쪽에서 본 대왕산성 전경
---학산면 서산리에서 본 대왕산성. 아래편으로 학상중 상고가 있다.
---양산가의 내용을 적은 비석
---비봉산성 전경과 비봉산성의 남아있는 성벽
●양산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에 기록되어 있는 김종직이 쓴 칠영 중 <양산가>를 국역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적국은 돼지가 되어 / 우리 나라의 강토를 침범하니
용맹스런 화랑님들도 / 보국 마음 겨를이 없어
창 메고 처자를 떠나 / 샘물로 입 가시고 말린 밥을 씹었네
적병이 밤에 성책을 무찌르니 / 씩씩한 혼백이 칼날 앞에 흩어졌다네
머리를 돌려 양산의 구름을 바라보니 / 무지개 빛 높이 뻗쳤구나
슬프다 가엾은 네 사람의 대장부는 / 마침내 모르는 북방의 강이었네
천추에 귀웅되어 / 서로 더불어 초장을 웅감하라.
또한 민간에서 부르는 양산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가자서라 가자서라 / 모롱이 돌아 양산 구경 가자서라
에헤이에 하문주가 하처재요 / 목동의 요지 향화촌이라
에라 놓아라 아니 못놓겠네 / 에헤이에 창포밭에 금잉어가 논다
이리 굼실 저리 굼실 잘도나 논다 / 에헤이에 바위 암상에 다람쥐 기고
시내 강변에 금자라 논다.
장섭섭 씨가 취재한 양산도는 다음과 같다.
1. 에헤이여 가세 가세 양산을 가세 / 모롱이 돌아 양산을 가세
(후렴) 에헤라 놓아라 아니 못놓겠네 / 능지를 하여도 나는 못놓겠네
2. 에헤이여 잉어가 논다 / 양산 청포 밭에 잉어가 논다
3. 에헤이여 자라가 논다 자라가 논다 / 양산 백사장에 자라가 논다
4. 에헤이여 양산 큰애기 베짜는 소리 / 가는 행인 발을 멈춰 못가네
●성재산성
한편 영동에서 무주방향 19번 국도롤 따라 달리다 학산면에서 다시 68번 금산방향으로 1km 지점 달리다 보면 박계리가 나타난다. 박계리 마을에서 우회전하여 원당리를 들어서기 전 바로 보이는 산이 산성이 있는 성재산이다.
성재산성은 영동군 양산면 원당리와 학산면 박계리 경계의 해발 약 180m의 야산으로속칭 성재라 불리는 나지막한 구릉지에 있는 소규모 보루모양의 산성이다. 원당천이라 불리는 소하천을 사이에 두고 대왕산성 1km 정도의 거리에 마주보고 있는 위치이다.
이 산성은 고기록은 물론 유적조사 자료나 목록에 일체 소개되지 않았으나 성의 흔적은 비교적 뚜렷하다.
이 성재산 산성은 1970년대 초에 조사되어 백제의 조천성으로 비정되는 대왕산성의 부성 또는 신라의 김흠운이 백제 조천성을 치기 위해 유영하였다가 전사한 곳으로 추정된 바 있다.
석축의 흔적은 대왕산성 쪽인 성재산의 남동쪽 구릉지 위에 구축되어 있는데 서쪽으로는 산능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동쪽은 원당천을 향하여 급한 경사를 이루었다.
성의 둘레는 실측결과 약 234m로 확인되었는데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었으며 남·북쪽에 2개소의 문지가 추정될 뿐으로 특별한 시설은 발견되지 않는다.
성을 쌓은 석재는 화강석으로 주변에서 채취하여 사용한 듯 한데 정교하게 다듬지는 않았다. 성 주변에는 파괴된 고분이 있으며 토기편과 기와편이 흩어져 있는데 토기편은 대부분 신라 토기이고 기와편은 고려시대와 조선시애의 것으로 짐작된다.
---원당리 성재산성의 성벽 유구
<디지털한국학 홈>
●보용나(寶用那)
?∼655(태종무열왕 2). 신라 태종무열왕 때의 군관.
655년 신라가 백제를 침입하여 양산(陽山:지금의 옥천현 남쪽 59리쯤에 위치) 아래에 진을 치고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려 할 때, 보용나는 신라군 대장 낭당대감(郎幢大監) ★김흠운(金歆運)밑에 보기당주(步騎幢主)로 출전하였다.
그런데 신라군이 진용을 채 갖추기도 전에 백제군이 야음을 틈타 신라군을 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김흠운이 분투하다 죽었는데, 보용나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저 골족(骨族)이 가진 세도와 영광을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바이나, 오히려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는데 하물며 보용나가 산다고 이익이 없으며, 죽는다고 손해가 있겠는가! ”하고는 적진으로 달려가 여러 명을 베고 죽었다.
태종무열왕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으며 보용나에게 대나마(大奈麻)를 추증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이 사실을 가지고 <瀯媛?陽山歌>를 지어 부르며 이를 슬퍼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金福順〉
●예파(穢破)
?∼655(태종무열왕 2). 신라 태종무열왕 때의 무관. 관직은 양산(陽山: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대감(大監)을 지냈다.
655년 백제·고구려가 함께 신라의 변경을 쳐들어오자 화랑 ★김흠운(金欽運)과 함께 양산 조천성(助川城:지금의 영동군 양산면 飛鳳山城)에서 백제군과 싸우다가 ★김흠운과 함께 전사하였다. 무열왕은 일길찬(一吉飡)에 추증하여 무훈을 찬양하였고, 세인들은 이 양산전투를 〈양산가 陽山歌〉로 지어 슬퍼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東史綱目. 〈金惠婉〉
●적득(狄得)
?∼655(태종무열왕 2). 신라 태종무열왕 때의 무장. 관직은 소감(少監)이었다.
655년 태종무열왕이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신라의 변경을 침범함을 분하게 여겨 정벌을 모의하고 군사를 출동시킬 때 낭당대감(郎憧大監) ★김흠운(金歆運)을 따라 소감으로 출전하였다.
신라군은 양산(陽山: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아래에 진영을 치고 조천성(助川城:지금의 영동군 양산면 비봉산성)을 공격하다가 ★김흠운이 전사하자, 적득도 대감(大監) 예파(穢破)와 함께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뒤에 태종무열왕에 의하여 대나마(大奈麻)의 관등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東史綱目. 〈李鍾恒〉
●전지(詮知)
생몰년 미상. 신라 태종무열왕 때의 관리.
655년(태종무열왕 2)에 태종무열왕이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변경을 침해함을 분히 여겨 정벌할 것을 모의하고 군사를 출동시킬 때에 대사(大舍)로서 낭당대감(郎幢大監) ★김흠운(金歆運)과 함께 출전하였다.
신라군이 백제땅에 이르러 양산(陽山: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아래에 진영을 치고 조천성(助川城: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飛鳳山城)을 공격할 때, 오히려 백제의 습격을 받아 전세가 크게 불리하였다.
이에 ★김흠운이 말을 타고 창을 잡고서 죽을 각오로 싸울 준비를 하자 전지는 “지금 적이 어두운 속에서 움직여 지척을 분별할 수 없으니 공이 비록 죽는다 해도 아무도 알 사람이 없다. 더구나 공은 신라의 귀골(貴骨)이요 왕의 사위이니 만일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요 우리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하며 말렸다.
그러나 ★김흠운은 물러나지 않고 싸우다가 죽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尹炳喜〉
▣ 김윤식 -
▣ 김태서 -
▣ 김항용 -
▣ 김윤만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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