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Re:태보공 김알지에서 경순왕까지 12 (18세 효양)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3-01-18 03:11 조회1,626회 댓글0건

본문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무장사지(藏寺址)

【관리번호】780-330-070-559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사지(폐찰지)

【소 재 지】경상북도 경주시 암곡동 산 1

【시 대】삼국시대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암곡동(暗谷洞) 고선사지(高仙寺址)에서 북으로 약 7km 지점에 위치

한 무장사지는 신라 제39대 ★원성왕(元聖王)의 부(父) 대아간 ★고양

(大阿干考讓)이 창건하였다. 이 절의 명칭은 태종(太宗)이 통일한 후

병무를 곡중(谷中)에 간직하였던데서 유래한다. 현재 보물 제126호

인 무장사지 삼층석탑(藏寺址三層石塔)과 보물 제125호 무장사아

미타불조상사적비 이수 및 귀부(藏寺阿彌陀佛造像事蹟碑首·龜

趺)가 유존하고 있으며 그외에 초석과 와편들이 다수 흩어져 있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중, 95.

【비 고】











<문화재청 홈>

종 목 보물 125호

명 칭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이수및귀부 (무藏寺阿彌陀佛造像事蹟碑이首및龜趺)

분 류 석비

수 량 2개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암곡동 산1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주시



신라 제 39대 소성왕(재위 799∼800)의 왕비인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면서 그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비이다. 1915년 주변에서 발견된 세 조각의 비석 파편에 새겨진 글을 통해 ‘무장사아미타조상사적비’임이 밝혀져 이곳에 무장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장사는 신라 제 38대 ★원성왕의 부친인 ★효양이 그의 숙부를 추모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비는 전체적으로 파손되어 비몸돌은 다른 곳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 절터에는 부서진 비받침과 비의 머릿돌만이 떨어진 채로 남아 있다. 비받침은 얼굴형상을 알 수 없으나 2좌로 구성된 점이 특이하다. 등 중앙에 마련된 잘려진 비좌(碑座)는 비몸을 직접 끼워두는 곳으로 사각형이며, 네 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잘려진 머릿돌에는 용이 구름속에서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는 조각이 있고, 왼쪽 면에는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의 조사기가 별도로 기록되어 있다. 이 석비는 통일신라 전기에 만들어진 신라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를 제외하고 그 이후 머릿돌이 남아 있는 예가 드문 상황에서 당시 머릿돌의 변화과정을 살필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문화재명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이수및귀부(무藏寺阿彌陀佛造像事蹟碑이首및龜趺)

비는 없어지고 비를 받쳤던 귀부(龜跌)와 비머리 위에 얹었던 이수(이首)만이 남아 있는 이 석조물(石造物)은 1915년 주변에서 발견된 세 조각의 비석 파편으로 무장사(무藏寺) 아미타조상(阿彌陀造像) 사적비(事蹟碑)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 비편(碑片)의 발견으로 이곳에 무장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비는 신라(新羅) 소성왕(昭聖王)(799∼800)의 왕비(王妃)인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왕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해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어 무장사에 봉안(奉安)한 내력을 새긴 것으로 비편은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종 목 보물 126호

명 칭 ●무장사지삼층석탑 (무藏寺址三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암곡동 산1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주시



무장사터는 경주시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깊은 산골에 있으며,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병기와 투구를 매장한 곳이라는 뜻으로 ‘무장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즉 병기가 필요없는 평화스러운 시대를 열겠다는 문무왕의 결연한 의지가 이 절을 창건하는데 큰 힘이 되었고, 또한 절 안에 3층석탑을 세우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양식이다. 아래층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 2개를 새겼고, 윗층 기단은 동그란 안상(眼象)을 각 면에 2개씩 조각하였다.



탑의 중심부분인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1층 몸돌은 조금 높은 편이다.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층마다 기둥 모양이 조각되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각 층의 지붕돌은 크기의 줄어든 정도가 적당하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5단이며,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부드럽게 살짝 들려있다.



1층 몸돌이 조금 높지만 간략화가 심하지 않고, 기단부에 새겨둔 안상은 양식상 시대가 내려옴을 의미하므로 9세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무너진 채 깨어져 있었던 것을 1963년 일부를 보충하여 다시 세웠다.



문화재명 무장사지삼층석탑(무藏寺址三層石塔)

이 탑(塔)은 원래 넘어져 파손되어 있었던 것을 1963년에 없어진 탑재(塔材)의 일부를 보충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이중(二重)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三層石塔)으로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하나의 화강암(花崗岩)으로 만들었으며, 초층옥신(初層屋身)은 가장 높고 큰 편인데 비해 2층과 3층은 급격히 작아졌으나 기단에 조각한 안상(眼象)이나 무장사(무藏寺)의 건립연대를 볼 때,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인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4.95m이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