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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대관上 02 ---김영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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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1-18 03:52 조회1,5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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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대관上 02 ---김영후1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에 있는 안렴사공 묘역의 좌측 상단에는 안렴사공(김사렴)의 조부 정간공(김영후)과 부 영삼사사공(김천)의 설단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두 분의 묘소는 현재 실전되어 알 길이 없고 묘에 관한 기록조차도 없는 실정입니다. 아마도 개성 인근 어디에 있다가 실전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정간공(김영후)은 아들 두분(김천,김장)을 두셨고, 영삼사사공(김천)은 4남(김사겸,김사렴,김사안,김사형) 1녀(허강처)를 두었는데, 김사겸과 김사안은 무후이므로, 안렴사공(휘사렴)께서 장손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간공(김영후)과 영삼사사공(김천)의 설단이 안렴사공 묘역에 모셔져 있고, 안렴사공(김사렴)께서 장손의 위치에 있으므로 안렴사공파 소개자료에 정간공(휘영후)의 기록부터 정리하고자 합니다.







1. 김영후(金永煦)



1-1 김영후(金永煦) --- 안렴사공의 祖父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그(=김순)의 아들로는 ★김영돈(金永旽), ★김영휘(金永暉), ★김영후(金永煦)가 있다.

김영후(永煦)는 충숙왕 때에 여러 관직을 지나 삼사 우윤에까지 이르렀다.

충혜왕은 자기를 시종한 공로가 있다 하여 그에게 추성 보절 동덕 익찬(推誠保節同德翊贊) 공신의 칭호를 수여하고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임명하였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 가자 시종하였던 여러 측근자들과 관료들이 모두 달아나 숨어 버렸는데 홀로 ★김영후만은 왕을 호위하고 있으면서 1장 8척의 창을 맞았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로 임명되고 정방(政房)의 책임을 지게 되었으며 얼마 후에 우정승이 되었다.

공민왕 때에 서연(書筵-임금에게 글을 강론하여 주는 모임)에 참가하여 변정 도감(辨整都監)을 폐지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연을 개설한 것은 좋은 말을 들으려 한 것이었는데 그대의 말은 참으로 나의 마음과는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길로 몸이 편치 않다고 구실을 대고 내전(內殿)에 들어가 버렸다.

★김영후는 처음에는 복창(福昌) 부원군의 봉호를 받았다가 나중에 상락후(上洛侯)의 봉호를 받았다. 공민왕 10년에 나이 70세로 죽었는데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의 성품은 엄격하고 굳세고 침착하고 신중하였으며 일가 친척과 옛친지들 가운데 군색한 자가 있으면 모두 구제하여 주었다.

그 손자들인 ★김사안(士安), ★김사형(士衡)의 나이 20세를 넘었는데, 어떤 사람이 김영후더러 말하기를 “왜 그들을 위하여 관직을 얻어 주지 않는가?”라고 하니 “자제가 과연 현명하다면 국가에서 스스로 선발해서 쓸 것이며 만일 현명하지 못하다면 관직을 주어서 얻게 하더라고 그것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그의 아들 ★김천은 관직이 밀직부사에까지 이르렀다.







▣ 디지털한국학



김영후(金永煦)

1292(충렬왕 18)∼1361(공민왕 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균헌(筠軒).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순(恂)이다.



(34세) 1325년(충숙왕 12)7월 산원(散員) ★장세(張世)가 소윤(少尹) ★임준경(林俊卿)의 말을 빼앗은 사건이 일어나자 지평으로서 장령 ★김원식(金元軾)과 함께 총신(寵臣)의 비호를 물리치고 치죄(治罪)를 청하였다.



(48세) 1339년(충숙왕 복위 8)4월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원나라에 가서 부처의 화상을 바쳤으며, 충혜왕이 자신을 헐뜯던 ★신청(申靑)을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그의 죄상을 행성(行省)에서 기록하여 중서성에 올릴 때 이를 가지고 원나라에 갔다.



(50세) 1341년(충혜왕 복위 2) 6월 ★조적(曺#적42)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왕을 시종한 공으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서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전(田) 100결과 노비 10구를 받았다.



(51세) 이듬해에는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52세) 1343년 11월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끝까지 남아 있다가 창에 맞기도 하였다.



(53세) 1344년 10월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가 되고, 이듬해 정월 정방이 부활하였을 때 찬성사로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12월에는 좌정승으로 원나라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정승에 승진되었다.



(55세) 1346년 5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61세) 1352년(공민왕 1)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65세) 1356년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朴天植〉









1-2 관련기록 (편찬 연대순)



▣ 김순 묘지명 (1321, 민지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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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을미=1319년, 영후28세)년에 또 선친(=방경) 산소에 성묘차 가시는데 왕께서 季子(계자 =막내아들) 永煦를 시켜 모시고 배행케 하였으니 왕께서도 공(=순)의 행차를 극진히 배려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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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永暾(★영돈)은 현재도관직랑 지합주사로 있고

2남 永暉(★영휘)는 현재 흥위위 보승별장으로 있고

3남 斯順(★사순)은 삭발하고 중이 되어 慈惠宗 大德이 되었고

(=1321년, 영후 30세) 4남 永煦(★영후)는 사헌부 지평으로 있었다.

장녀는 입내시 중정대부 친어군대호군 鄭 (★정책)에게로 출가하고

2녀는 대광 상당군 白 正(★백이정)에게로 출가하고

3녀는 원나라 좌승상 ★아홀반의 아들인 사인 ★별리가불화에게로 출가하였다.







▣ 김순처 허씨 묘지명 (1332, 이제현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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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永暾(영돈)인데 봉상대부 전법총랑이요

차자는 永暉(영휘)인데 흥위위 낭장이요

다음은 출가 (속세를 버리고 불승이 됨)하니 이름이 思順이며 慈恩宗 大德이고

(=1332년, 영후 41세) 다음은 永煦(영후)니 봉선대부 자섬사사이다.

장녀는 대광 청하군 정책에게 시집갔는데 먼저 죽었고

다음은 대광 상당군 백이정에게 시집갔고,

막내 딸은 王人 별리가불화에게 출가하였으니 절강성 참지정사라



☞ 김순 묘지명에는 斯順 慈惠宗 大德으로, 김순처 허씨 묘지명에는 思順 慈恩宗 大德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찬서자의 착오인지? 이기상의 오류인지?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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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방경)의 특수한 공로와 특이한 업적은 해와 별처럼 밝게 국사(= ? )에 실려 있으니 옛 사람의 공로와 업적이 저와 같으나 그의 자손들에 와서 능히 계승하지 못하고 묻혀 버려서 세상에 듣기지 못한 것이 많더니

공의 손자 추성 보리동덕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복창부원군(=영후) 의 집에 공(=방경)의 행장이 비장되어 있었으나, 해가 도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써서 그 근본을 잊지 않게 했음이 대개 이와 같고 또한 자손들에서 가히 공(=방경)의 남기신 기풍과 공적이 나라와 더불어 모두 빛나서 백세를 두고 쇠하지 않을 줄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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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항용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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