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대관上 03 ---김영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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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1-18 22:10 조회1,671회 댓글0건본문
오은대관上 03 ---김영후2
고려사등 史書에는 전연 기록이 없지만 정간공(김영후)께서는 1327년(36세) 전후에 경북 상주의 목사를 지내시면서 그곳의 객관인 상산관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여러 자료에서 보이고, 당시 충북 보은 법주사의 자정국존(1240∼1327)이 입적시에 상주목사 김영후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보입니다. 이를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1-3 상주목사 재직시 상산관 중수 (1327년, 36세)
▣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상산관지(商山館址)
【관리번호】742-010-069-008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관아·성곽건물(기타)
【소 재 지】경상북도 상주시 남성동
【시 대】고려시대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상산관은 고려시대에 창건하여 상주 고을의 객관으로 활용하다가 고려 충렬왕(忠烈王)시에 목사(牧師) ★김영후(金永○)가 중수하였다.
1526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수한 바 있고 임진왜란시에 다시 전체가 소멸되어 조선 현종(顯宗) 7년(1676)에 목사 이송령(李松○)이 민폐를 끼치지 않고 관원으로 옛자리에 개축하였다.
상산관은 창건 때부터 옛 군청 동편에 위치하였으나,
1940년 상주여자중학교 교정으로 이축하여 음악실로 활용하였으며,
1988년에 다시 상주시 만산동의 국도 우회로변으로 이건하였다.
현재 남성동에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중, 340.
▣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상주 상산관(尙州商山館)
【관리번호】742-260-061-034
【지정사항】유형문화재 제157호
【유적종류】관아·성곽건물(관아건물)
【소 재 지】경상북도 상주시 만산동 산 73-1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상산관(商山?)은 객관(客?)이다. 창건에 대해서 알 수 없으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충렬왕 33년(1307)에 목사 ★김영후(金永煦)가 중수하였으니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
【참고문헌】상주문화원, 1997, <<상주문화유적>>, 262.
【비 고】1982. 2. 24. 지정.
▣ 상주지(상주시.군문화공보실, 1989)
pp 107 (5) ●金永煦(★김영후)
---충렬왕(?)때 상주목사가 되었다. 상주는 도로가 팔방으로 통하여 관리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인데 客館(객관)이 낡아 불편이 많았다. 먼저 仁愛(인애)로서 百姓(백성)을 사랑하고 엄중하게 部下(부하)를 경계하여 善政(선정)을 베풀었다. 1년이 지나자 비로소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이에 役事(역사)를 시작하여 백성을 괴롭히지 아니하고 객관을 준공했다. 뒤에 그는 國相(국상)이 되었다.
▣ 국역 점필재집 ≫ 점필재집 문집 ≫ 문집 제2권 ≫ 기(記) ≫
§ ●풍영루중영기(風詠樓重營記)
-----
내가 이 고을의 옛일을 상고해 보건대, 원(元)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14)에 관우(館宇)를 중수하여 적당한 위치를 잡은 사람은 목사(牧使) ★김영후 (金永煦)이고, 기(記)를 쓴 사람은 ★근재(謹齋=안축)였다.
그리고 황명(皇明) 홍무(洪武) 경술년(1370, 공민왕19)에 이르러 관우의 동편을 개척하고 그 곳에 새 정자를 지은 사람은 목사 ★김남득(金南得)이고, 풍영루(風詠樓)라 이름하고 또 기를 지은 이는 ★목은(牧隱)이며, 시(詩)를 지은 이는 ★도은(陶隱)이었다.
그 후 경신년 병화(兵火)에 정자도 불타버렸는데, 얼마 안 되어 그 옛터에다가 정자를 바꾸어 누각으로 지은 사람은 목사 ★송인(宋因)이고, 기를 지은 사람은 ★양촌(陽村)이었다.
▣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간. 1997. 326P,337P
●법주사자정국존비(法住寺慈淨國尊碑) 내용(2/3지점)
-----
선사가 입적하기 직전(정묘년, 충숙왕 14년-1327) 12월 1일 아침 서기를 방장실로 불러 主上에게 올릴 편지를 써서 직인과 함께 봉하고 상주목사인 김영후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하고, 해가 포시에 이를 무렵 조용히 앉아 입적하였다.
-----
☞ 李叔琪는 김승용 묘지명을 술한 분이고
全元發은 척약재 김구용과 각별한 사이였으며, 바로 안동김문의 장손인 김정공의 배위가 국파 전원발선생의 따님이었다.
김방경-(1/5)김선-(1/4)김자-김위-김득남-김정(+★전원발 녀)
김방경-(1/5)김선-(2/4)★김승용
김방경-(1/5)김선-(3/4)김승택-(1/2)김묘-(1/3)★김구용
김방경-(3/5)김순-(4/4)★김영후
▣ 문화재청 홈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79호
명 칭 ●법주사자정국존비 (法住寺慈淨國尊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80.12.29
소재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소유자 법주사
관리자 법주사
속리산 법주사 내에 있는 자정국존의 비이다.
자정국존(1240∼1327)은 국영사·장의사·법주사 등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냈으며, 도승통이 되기도 하였고, 호는 ‘보명’이다.
비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자연암반을 파내어 비몸을 세운 특이한 형태이다. 비몸 앞면에는 자정국사에 관한 비문을 새겼는데, 아랫부분이 일부 파손되어 있다.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세운 것으로, 왕의 명을 받은 이숙기가 비문을 짓고, 전원발이 글씨를 썼다.
▣ 김윤만 - 수고 많습니다. 상산관은 다음 경북 북부지역 여행시 꼭 보고싶은 곳입니다.
▣ 솔내영환 - 법주사에 가면서도 자정국사비문을 안 보고 왔습니다. 다음에 가면 꼭 봐야 겠습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자주 속리산 법주사에 가면서 이것도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식 - 저도 법주사 가서 눈뜬장님이 되었군요.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고려사등 史書에는 전연 기록이 없지만 정간공(김영후)께서는 1327년(36세) 전후에 경북 상주의 목사를 지내시면서 그곳의 객관인 상산관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여러 자료에서 보이고, 당시 충북 보은 법주사의 자정국존(1240∼1327)이 입적시에 상주목사 김영후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보입니다. 이를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1-3 상주목사 재직시 상산관 중수 (1327년, 36세)
▣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상산관지(商山館址)
【관리번호】742-010-069-008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관아·성곽건물(기타)
【소 재 지】경상북도 상주시 남성동
【시 대】고려시대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상산관은 고려시대에 창건하여 상주 고을의 객관으로 활용하다가 고려 충렬왕(忠烈王)시에 목사(牧師) ★김영후(金永○)가 중수하였다.
1526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수한 바 있고 임진왜란시에 다시 전체가 소멸되어 조선 현종(顯宗) 7년(1676)에 목사 이송령(李松○)이 민폐를 끼치지 않고 관원으로 옛자리에 개축하였다.
상산관은 창건 때부터 옛 군청 동편에 위치하였으나,
1940년 상주여자중학교 교정으로 이축하여 음악실로 활용하였으며,
1988년에 다시 상주시 만산동의 국도 우회로변으로 이건하였다.
현재 남성동에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중, 340.
▣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상주 상산관(尙州商山館)
【관리번호】742-260-061-034
【지정사항】유형문화재 제157호
【유적종류】관아·성곽건물(관아건물)
【소 재 지】경상북도 상주시 만산동 산 73-1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상산관(商山?)은 객관(客?)이다. 창건에 대해서 알 수 없으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충렬왕 33년(1307)에 목사 ★김영후(金永煦)가 중수하였으니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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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상주문화원, 1997, <<상주문화유적>>, 262.
【비 고】1982. 2. 24. 지정.
▣ 상주지(상주시.군문화공보실, 1989)
pp 107 (5) ●金永煦(★김영후)
---충렬왕(?)때 상주목사가 되었다. 상주는 도로가 팔방으로 통하여 관리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인데 客館(객관)이 낡아 불편이 많았다. 먼저 仁愛(인애)로서 百姓(백성)을 사랑하고 엄중하게 部下(부하)를 경계하여 善政(선정)을 베풀었다. 1년이 지나자 비로소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이에 役事(역사)를 시작하여 백성을 괴롭히지 아니하고 객관을 준공했다. 뒤에 그는 國相(국상)이 되었다.
▣ 국역 점필재집 ≫ 점필재집 문집 ≫ 문집 제2권 ≫ 기(記) ≫
§ ●풍영루중영기(風詠樓重營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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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고을의 옛일을 상고해 보건대, 원(元)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14)에 관우(館宇)를 중수하여 적당한 위치를 잡은 사람은 목사(牧使) ★김영후 (金永煦)이고, 기(記)를 쓴 사람은 ★근재(謹齋=안축)였다.
그리고 황명(皇明) 홍무(洪武) 경술년(1370, 공민왕19)에 이르러 관우의 동편을 개척하고 그 곳에 새 정자를 지은 사람은 목사 ★김남득(金南得)이고, 풍영루(風詠樓)라 이름하고 또 기를 지은 이는 ★목은(牧隱)이며, 시(詩)를 지은 이는 ★도은(陶隱)이었다.
그 후 경신년 병화(兵火)에 정자도 불타버렸는데, 얼마 안 되어 그 옛터에다가 정자를 바꾸어 누각으로 지은 사람은 목사 ★송인(宋因)이고, 기를 지은 사람은 ★양촌(陽村)이었다.
▣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간. 1997. 326P,337P
●법주사자정국존비(法住寺慈淨國尊碑) 내용(2/3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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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가 입적하기 직전(정묘년, 충숙왕 14년-1327) 12월 1일 아침 서기를 방장실로 불러 主上에게 올릴 편지를 써서 직인과 함께 봉하고 상주목사인 김영후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하고, 해가 포시에 이를 무렵 조용히 앉아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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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叔琪는 김승용 묘지명을 술한 분이고
全元發은 척약재 김구용과 각별한 사이였으며, 바로 안동김문의 장손인 김정공의 배위가 국파 전원발선생의 따님이었다.
김방경-(1/5)김선-(1/4)김자-김위-김득남-김정(+★전원발 녀)
김방경-(1/5)김선-(2/4)★김승용
김방경-(1/5)김선-(3/4)김승택-(1/2)김묘-(1/3)★김구용
김방경-(3/5)김순-(4/4)★김영후
▣ 문화재청 홈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79호
명 칭 ●법주사자정국존비 (法住寺慈淨國尊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80.12.29
소재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소유자 법주사
관리자 법주사
속리산 법주사 내에 있는 자정국존의 비이다.
자정국존(1240∼1327)은 국영사·장의사·법주사 등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냈으며, 도승통이 되기도 하였고, 호는 ‘보명’이다.
비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자연암반을 파내어 비몸을 세운 특이한 형태이다. 비몸 앞면에는 자정국사에 관한 비문을 새겼는데, 아랫부분이 일부 파손되어 있다.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세운 것으로, 왕의 명을 받은 이숙기가 비문을 짓고, 전원발이 글씨를 썼다.
▣ 김윤만 - 수고 많습니다. 상산관은 다음 경북 북부지역 여행시 꼭 보고싶은 곳입니다.
▣ 솔내영환 - 법주사에 가면서도 자정국사비문을 안 보고 왔습니다. 다음에 가면 꼭 봐야 겠습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자주 속리산 법주사에 가면서 이것도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식 - 저도 법주사 가서 눈뜬장님이 되었군요.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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