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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오은대관下 02 ---고려사절요(김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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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1-21 06:02 조회1,7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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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국역총서(민) 고려사절요 김종서 등 1968 을축 12년, 원 태정 2년

8 국역총서(민) 고려사절요 김종서 등 1968 기묘 8년(1339), 원 지원 5년

9 국역총서(민) 고려사절요 김종서 등 1968 임오 3년(1342), 원 지정 2년

10 국역총서(민) 고려사절요 김종서 등 1968 계미 4년(1343), 원 지정 3년

11 국역총서(민) 고려사절요 김종서 등 1968 갑신 5년(1344), 원 지정 4년

12 국역총서(민) 고려사절요 김종서 등 1968 을유 원년(1345), 원 지정 5년

13 국역총서(민) 고려사절요 김종서 등 1968 병술 2년, 원 지정 6년

14 국역총서(민) 고려사절요 김종서 등 1968 임진 원년(1352), 원 지정 12년

15 국역총서(민) 고려사절요 김종서 등 1968 병신 5년(1356), 원 지정 16년

16 국역총서(민) 고려사절요 김종서 등 1968 신축 10년(1361), 원 지정 21년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 고전국역총서 >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제24권 > 충숙왕 忠肅王

을축 12년, 원 태정 2년

○ 가을 7월에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왕후(王煦), 밀직부사 이능간(李凌幹) 등이 상왕의 재궁을 모시고 원 나라에서 도착하였다. 백관이 현관소복(玄冠素服)으로 교외에서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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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원(散員) 장세(張世)가 소윤(少尹) 임준경(林俊卿)의 말을 강탈하였으므로, 사헌부(司憲府)가 추궁하여 문죄하니 장세가 도망쳐 숨었다. 그의 친족을 잡아다가 핍박하니, 장세가 지평 김개물(金開物)의 집에 이르러 칼을 빼서 자신을 찌르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헌사(憲司)에서 장세를 옥에 가두고, 드디어 대궐에 나아가 장세를 치죄하기를 청하니, 장세의 매부 왕삼석(王三錫)이 대궐 안에서 저지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자, 지팡이로 김개물을 치고 제 마음대로 장세를 석방하였다. 김개물이 장령 김원식(金元軾), 지평 ★김영후(金永煦) 등과 더불어 다시 대궐에 나아가 장세를 치죄하기를 청하니, 왕이 성내어 사건을 아뢴 자를 구타하였다. 헌사(憲司)가 문을 닫고 여러 날 일을 보지 아니하니, 왕이 근신을 보내어 김원식 등에게 타이르기를, "상왕의 장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왕삼석 등의 죄를 다스릴 터이니 경 등은 일을 보라." 하였다. 왕삼석은 본래 만인(蠻人)으로, 상선(商船)을 따라 연경(燕京)에 이르렀는데 마침 왕도 원 나라에 조회하러 갔었다. 총애받는 신하를 통하여 뵙기를 청하니 왕이 보고 좋아하여 총애가 비길 데가 없었으며 사부(師傅)라고 일컬었다.

사신(史臣) 유사렴(兪思廉)이 말하기를, "왕삼석은 학술이 없는 일개 만인인데, 왕이 그에게 미혹하여 측근에 두니, 벼슬을 팔고 옥송(獄訟)을 팔 뿐 아니라 조정에서 풍헌관(風憲官)을 욕보이는 데까지 이르렀건만 왕이 깨닫지 못하였으니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기 이렇게 어렵도다." 하였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 고전국역총서 >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제25권 > 충숙왕 忠肅王

기묘 8년(1339), 원 지원 5년



○ 여름 4월에 전왕이 삼사우윤(三司右尹) ★김영후(金永煦)를 원 나라에 보내어 부처의 화상[?佛]을 바쳤다. ○ 전왕이 신청(申靑)을 감옥에 가두었다. 청(靑)의 옛 이름은 송(松)인데 일찍이 원 나라에 들어가 심왕(瀋王) 고(暠)의 종자가 되어 총애를 받았다. 대행왕이 복위를 구할 때에 심왕의 저택에 머물렀는데, 청이 이로 인하여 승진할 기회를 얻어 전 산원(散員)으로 호군에 임명되었고, 거듭 승진하여 상호군이 되었다. 왕이 정치에 태만하여지자, 청이 왕의 위엄을 빌려 권력을 부리어 조금도 거리낌없이 권세를 부렸으며, 박청(朴靑)ㆍ이청(李靑)과 이름이 같으니 당시에 삼청(三靑)이라 불렀다. 대행왕이 늘 전왕의 잘못을 말하니, 그 종신인 전 대호군 조익청(曹益淸)과 전 대언(代言) 윤환(尹桓)이 전왕이 가까이 하던 불량배를 제거할 것을 모의하는데, 전 상호군 오자순(吳子淳), 전 대호군 홍서(洪瑞)가 청(靑)과 사이좋게 지냈기 때문에 두 사람을 보내어 이 일을 도모하였다. 이때 청이 순군천호(巡軍千戶)로 있었는데, 왕의 지시를 받았다 하고 그 불량배 중에서 가장 나쁜 송팔랑(宋八郞)ㆍ홍장(洪莊) 등을 옥에 가두고 모질게 고문하므로 전왕이 그들을 석방시키려고 여러 번 청을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전왕이 이에 감정을 품고 이때에 이르러 권성(權省)과 홍빈(洪彬)을 시켜 청에게 칼을 씌워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원로인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권부(權溥) 등에게 명하여 청이 저지른 짓을 낱낱이 기록하여 행성에 고하니, 행성에서는 그 서장을 기록하여 ★김영후에게 주어 중서성에 올리게 하였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 고전국역총서 >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제25권 > 충혜왕

임오 3년(1342), 원 지정 2년



○ 6월에 교서를 내리기를, "적신(賊臣) 조적(曺?)이 난을 꾸민 후 과인이 원 나라의 명을 받고 원 나라의 서울에 갔을 때에, 간신의 잔당들이 근거없는 말을 꾸며 내어 국가의 변란을 음모하였으나, 시종하였던 신하들은 종시 한결같은 충절로 과인의 몸을 보좌하여 그 공이 막대하였으니, 영원히 그 공은 잊을 수 없다.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석(尹碩), 정승 채하중(蔡河中),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김석견(金石堅), 정승 이능간(李凌幹), 이문(理問) 홍빈(洪彬),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暾)ㆍ서하군(西河君) 임자송(任子松), 찬성사(贊成事) 김인연(金仁沇), 언양군(彦陽君) 김륜(金倫),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 첨의평리(僉議評理) 한종유(韓宗愈),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영후(金永煦), 좌사(左使) 이몽가(李蒙哥), 판밀직사(判密直事) 이운(李雲), 개성윤(開城尹) 윤신계(尹莘係),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엄(李儼), 동지밀직(同知密直) 윤환(尹桓)ㆍ박청(朴靑), 밀직부사(密直副使) 강윤충(康允忠)ㆍ안천길(安千吉)ㆍ노영서(盧英瑞) 등을 1등 공신으로 삼고,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등 18명을 2등 공신으로 삼고, 각각 차등에 따라 공신의 부모와 아내와 그 아들에게 작위를 주고 전답과 노비를 주라." 하였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 고전국역총서 >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제25권 > 충혜왕

계미 4년(1343), 원 지정 3년



○ 봄 2월에 왕이 본궐(本闕)에 행하여 씨름놀이를 구경하였다. 왕이 ★김영후(金永煦)와 함께 북궁(北宮)에서 술을 마셨는데, 영후가 취하여 드러누우니, 왕이 측근자를 시켜서 부축하여 말을 태워주고, 따라온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너의 주인이 이미 나에게 타던 말을 주었다." 하니, 영후가 마침내 그 말을 왕에게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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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에 강릉도(江陵道)에서 산세(山稅)로 잣 3천 석(石)을 바쳤다. ○ 왕이 고용보와 함께 시가의 누(樓)에 거둥하여 격구와 씨름을 구경하였는데, 이는 용보(龍普)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용사들에게 상으로 베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주었다. ○ 임오일에 원 나라에서 내주(乃住) 등 8명을 보내어 왔는데, 이들은 거짓말로 말안장을 요구하였다. 갑신일에 대경(大卿) 타적(朶赤), 낭중 별실가(別失哥) 등 6명이 와서 교외에서 사면조서를 반포하였는데, 왕이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 마중하지 않으려 하니, 용보가 말하기를, "황제께서 일찍이 나에게 왕이 불경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만일 마중하러 나가지 아니하면 황제의 의심이 더욱 심하여질 것입니다." 하여,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조복을 입고 교외에 마중나가 조서를 정동성(征東省)에서 듣고 있는데, 타적ㆍ내주 등이 왕을 걷어차면서 포박하였다. 왕이 급히 고원사(高院使)를 부르니 용보가 그를 꾸짖었다. 사신으로 온 자들이 모두 칼을 빼어들고서 왕의 시종들을 붙잡으니, 여러 불량배와 백관들은 모두 달아나 숨었다. 좌우사 낭중(左右司郞中) ★김영후(金永煦), 만호 강호례(姜好禮), 밀직부사(密直副使) 최안우(崔安祐), 응양군(鷹揚軍) 김선장(金善莊) 등은 창에 맞고, 지평 노준경(盧俊卿) 및 용사 2명이 피살되고, 칼이나 창에 맞은 자가 매우 많았다. 신예(辛裔)가 복병을 두고 밖을 방어하여 그들을 도왔다.

사신 원송수(元松壽)가 말하기를, "왕이 비록 흉학하다 할지라도, 그들의 왕이다. 용보(龍普)는 소인이니 논평할 것도 없지만, 신예는 유자(儒者)로서 어찌 이렇게까지 하였는가." 하였다.

타적 등이 왕을 끼고 한 필의 말에 태워 달려갔다. 왕이 조금 머물러 주기를 청하였으나 타적 등은 칼을 빼어들고 위협하였다. 왕이 매우 괴로워하면서 술을 찾으니, 한 노파가 술을 바쳤다. 타적 등은 용보에게 명하여 국사를 정리하여 다스리게 하고, 덕성부원군(德成府院君) 기철(奇轍), 이문(理問) 홍빈(洪彬)에게 정동성의 사무를 임시로 맡게 하였다. 용보가 사람을 보내어 왕의 시종이던 불량배 박양연(朴良衍)ㆍ임신(林信)ㆍ최안의(崔安義)ㆍ김선장(金善莊)ㆍ승신(承信) 등 10여 명을 잡아 두었는데, 송명리(宋明理)ㆍ조성주(趙成柱)ㆍ윤원우(尹元祐)ㆍ한휘(韓暉)ㆍ강찬(康贊) 등은 평소에 용보와 서로 친하게 지내어서 모면되었다. 용보가 기철ㆍ홍빈ㆍ채하중 등과 함께 내탕고를 봉하니, 은천옹주가 울면서 말하기를, "왕은 예복을 입었을 뿐이다. 지금 날씨가 몹시 추우니, 왕에게 갖옷[?]을 바치게 해달라." 하여, 용보가 이를 허락하였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 고전국역총서 >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제25권 > 충혜왕

갑신 5년(1344), 원 지정 4년



○ 겨울 10월에 왕후(王煦)를 우정승에, 김륜(金倫)을 좌정승에, ★김영후(金永煦)ㆍ강윤성(康允成)을 찬성사에, 전사의(全思義)ㆍ강우(姜祐)를 참리(?理)에, 이천(李?)을 정당문학에, 권적(權適)을 판밀직사사에, 허백(許伯)을 밀직사사에, 봉천우(奉天祐)ㆍ안축(安軸)을 지밀직사사에, 민사평(閔思平)을 감찰대부에 임명하였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 고전국역총서 >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제25권 > 충목왕 忠穆王

을유 원년(1345), 원 지정 5년



○ 여름 4월에 ★김영후(金永煦)를 좌정승에, 박충좌(朴忠佐)를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전사의(全思義)ㆍ손수경(孫守卿)ㆍ안축(安軸)을 찬성사에, 이천(李?)ㆍ이몽가(李蒙哥)ㆍ장항(張沆)을 참리(?理)에, 정을보(鄭乙輔)를 정당문학에, 인당(印?)을 밀직사(密直使)에 임명하였다.



○ 12월에 좌정승 ★김영후를 원 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게 하였다. ○ 왕후(王煦)를 파면하고, ★김영후를 우정승에, 인승단(印承旦)을 좌정승에, 이곡(李穀)을 밀직사(密直使)에 임명하였다. 왕후는 정방을 폐지하고 과전(科田)을 폐지한 까닭에 욕심 많고 나쁜 무리의 미움을 받아서 파면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 고전국역총서 >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제25권 > 충목왕 忠穆王

병술 2년, 원 지정 6년



○ 5월에 대행왕 신주를 태묘에 모시었다. ○ 연안군(延安君) 이엄(李儼)이 졸하였다. ○ 우정승 ★김영후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그 편에 황제가 왕에게 의복과 술을 주었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 고전국역총서 >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제26권 > 공민왕 1 恭愍王一

임진 원년(1352), 원 지정 12년



○ 8월에 왕이 공주와 함께 복령사(福靈寺)에 거둥하였는데, 이후로 자주 사원(寺院)에 거둥하였다.



○ 인승단(印承旦)이 서연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폐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이에 불응하고 다만 이르기를, "좀도둑이 밤에 다니면서 달 밝음을 미워하는 격이구나." 하였다. 이때 권호(權豪)들이 기현(畿縣)의 공전(公田)을 빼앗았는데 인승단의 점유가 특히 많았다. 변정도감에서 그 전답을 몰수하고 더구나 여러 해 묵은 조세(租稅)까지 추징한 까닭에 인승단이 미워하였던 것이다. 다른 날에 ★김영후(金永煦)가 또 변정도감의 폐지를 청하였더니, 왕이 이르기를, "나는 아름다운 말을 듣고자 서연을 설치했는데, 경들이 하는 말은 참으로 나의 마음과 어긋나도다." 하고는 몸이 아프다 칭탁하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 고전국역총서 >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제26권 > 공민왕 1 恭愍王一

병신 5년(1356), 원 지정 16년



○ 봄 2월에 원 나라에서 왕에게 공신호를 주어, 친인보의 선력 봉국 창혜 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 하였다. 평장사 기철(奇轍)이 왕에게 시(詩)를 올려 치하하였는데, 신(臣)이라 일컫지 않았다.

○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 ★김영후(金永煦)를 원 나라에 보내어 공신호를 내려 준 것을 사례하였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 고전국역총서 >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제27권 > 공민왕 2

신축 10년(1361), 원 지정 21년



○ 5월에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 한방신(韓方信)을 동북면 도병마사로, 전 도첨의 평리(都僉議評理) 안중상(安仲祥)을 경상도 도순문진변사(慶尙道都巡問鎭邊使)로 삼았다.

○ 상락후(上洛侯) ★김영후(金永煦)가 졸하였다. ★김영후는 성품이 엄하고 굳세며 침착하여, 친척이나 친구 중에 궁색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 주었다. 그의 손자 김사안(金士安)ㆍ사형(士衡)은 모두 나이 20세가 넘었는데, 사람들이 혹 ★김영후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느냐." 하면, 그는 대답하기를, "자제들이 참으로 어질다면 국가에서 자연히 쓸 것이요, 어질지 않으면 벼슬을 구해서 얻는다 해도 그것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니, 듣는 자들이 탄복하였다.













▣ 김윤식 -

▣ 김윤만 -

▣ 솔내 - 수고하셨습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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