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오은대관下 01 ---고려사(김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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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1-21 05:58 조회2,319회 댓글0건본문
《고려사》 제36권 - 세가 제36 > 충혜왕 >
충혜왕 임신 2년(1332)
여름 4월 무오일에 왕이 삼사 우윤 ★김영후(金永煦)를 원나라에 보내 그림 부처를 바쳤다.
계유일에 두린이 황제의 명령으로 낙안군(樂安君) 김지겸과 전 첨의평리 김자(金資)에게 나라일을 임시로 서리하게 하였다.
12월에 무자일에 경화 공주의 명령으로 김지겸을 정동성 서리로, 김자를 제조(提調) 도첨의사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고려사》 제36권 - 세가 제36 > 충혜왕 >
충혜왕 임오 후 3년(1342)
“역적 조유가 난을 꾸민 후 내가 원나라로 가게 되었을 때 우리 나라에서는 근심과 의문에 싸였었고 간신의 잔당들은 거짓말을 조작하여 반란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나를 시종한 신하들이 시종일관 절개를 지키어 나의 몸을 보호하였으니 그 공이 막대하여 산천이 변하여도 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해평 부원군 윤석, 정승 채하중, 화평 부원군 김석견(金石堅), 정승 이능간, 이문(李問) 홍빈(洪彬), 상락(上洛) 부원군 ★김영돈(金永旽), 서하군 임자송(任子松), 찬성사 김인윤(金仁沇), 언양군 김륜(金倫), 김해군 이제현 ,성산군 이조년, 첨의평리 한종유, 삼사우사 ★김영후, 좌사 이몽가(李蒙哥), 판밀직사사 이운(李雲), 개성윤 윤신계(尹莘係), 전 지밀직사사 이엄(李儼), 전 동지밀직사사 윤환(尹桓), 박청(朴靑), 전 밀직부사 강윤충(康允忠), 안천길(安千吉), 노영서(盧英瑞), 원외랑(員外郞) 한의신(韓義臣), 군부판서(軍簿判書) 배전(裴佺), 최유(崔濡), 지신사 황석기(黃石奇), 판 종부시사(宗簿寺事), 손수경(孫守卿) 판 사복시사(司僕寺事) 윤원우(尹元佑), 대호군 김첨수(金添壽)와 김선장(金善莊), 호군 남궁 신과 임성(林成) 등을 1등 공신으로 정하여 벽상에 그들의 화상을 그리게 하고 그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7품 직을 제수할 것이다.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생질에게 대신 줄 것이며 사위는 8품 직을 주고 토지 1백 결(結)과 노비 10명을 줄 것이다.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학성군(鶴城君) 박인수(朴仁壽), 전 군부판서 안자유(安子由), 상호군 김경(金鏡)과 전윤장(全允藏), 전 판 서운관사(書雲觀事) 손원(孫遠), 대호군 이광원(李光遠)과 김장(金莊), 호군 진교화(陣敎化), 승신(承信), 이헌(李軒), 손습(孫襲), 장랑장 왕석(王碩), 이충(李沖), 이원용(李元龍), 이광계(李光桂), 낭장 전경(全卿)과 홍매노(洪買奴) 등은 2등 공신으로 정하며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8품 직을 제수할 것이며 아들이 없으면 그 대신 사위에게 9품 직을 제수하고 토지 70결과 노비 5명을 줄 것이다.”
《고려사》 제36권 - 세가 제36 > 충혜왕 >
충혜왕 계미 후 4년(1343)
계미 후 4년(1343) 봄 2월 갑진일에 왕이 용사(勇士)들을 거느리고 씨름을 구경하다가 밤에 좌우사 낭중 ★김영후와 같이 북궁(北宮)에서 술을 마시었는데 ★김영후가 취하여 누우니
왕이 곁에 있던 사람들을 시켜 그를 부축하여 말 위에 올려 앉히고 마부를 불러 이르기를
“네 주인 낭중이 자기 타던 말을 나에게 선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이튿날 ★김영후가 이내 그 말을 왕에게 바쳤다.
갑신일에 원나라에서 하늘에 제사(告郊)할 것과 대사령(大赦)을 반포할 것을 구실로 대경(大卿) 타적(朶赤)과 낭중 별실가(別失哥) 등 6명을 보내었는데 왕이 병을 구실로 마중 나가려 하지 않으니 고용보가 말하기를 “우리 황제가 왕이 불경하다고 항상 말씀하였는데 만일 마중 나가지 않는다면 황제의 의심이 더욱 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이 백관들을 인솔하고 조복을 입고 교(郊)에 나가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고 정동성에 가서 황제의 조서를 듣기로 하였는데 타적과 내주 등이 발로 왕을 차면서 포박하였다.
왕이 급히 고 원사(고용보)를 불렀으나 고용보는 도리어 왕을 꾸짖었으며 사자들이 모두 칼을 빼어 들고 왕을 시종하던 무리들을 체포하였다.
이때 백관들은 모두 도망하여 숨고 좌우사(左右司) 낭장 ★김영후, 만호 강호례(姜好禮), 밀직부사 최안우(崔安祐), 응양군 김선장 등은 창에 맞고 지평(持平) 노준경(盧俊卿)과 용사 두 명은 피살되었으며 이 외에도 칼이나 창에 맞은 사람들이 심히 많았다.
신예(辛裔)가 병사들을 매복시켜 밖을 방어하며 그들을 방조하였다. 타적 등이 곧 왕을 부액하여 말에 태워 달려가니 왕이 조금 지체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타적 등은 칼을 빼어 가지고 위협하였다.
왕은 번민이 극심하여 술을 요구하였더니 어떤 노파가 왕에게 술을 드렸다. 만호 권겸(權謙)과 나영걸(羅英傑)이 압령관(押領官)이 되고 고용보와 박첩목아불화 및 제군 만호(諸軍萬戶) 이중민(李中敏), 김주경(金珠慶), 김상기(金上琦) 등이 활과 칼을 잡고 세도가들을 수색하였다.
타적 등이 고용보에게 명령하여 나라일을 정리하게 하고 덕성 부원군 기철(奇轍)과 이문(理問) 홍빈(洪彬)으로 정동성을 서리하게 하였다.
고용보가 사람을 보내 왕을 시종하던 악소년의 무리 박양연(朴良衍), 임신(林信), 최안의(崔安義), 김선장(金善莊), 승신(承信) 등 10여 명을 잡아 가두었다.
그런데 송명리(宋明理), 조성주(趙成柱), 윤원우(尹元祐), 한휘(韓暉), 강찬(姜贊) 등은 본래 고용보와 친하였기 때문에 이 화를 면하였다. 고용보가 기철, 홍빈, 채하중 등으로 더불어 내탕고를 봉인하였다.
《고려사》 제37권 - 세가 제37 > 충목왕 >
충목왕 을유 원년(1345)
정미일에 다시 정방(政房)을 설치하고 찬성사 박충좌와 ★김영후, 참리 신예, 지신사 이공수 등을 제조관(提調官)으로 임명하였다.
정묘일에 ★김영후를 좌정승으로, 박충좌를 판삼사사로, 전사의, 손수경, 안축 등을 찬성사로, 이천, 이몽가, 장항 등을 참리로, 정을보를 정당문학으로, 인당을 밀직사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12월 계축일에 좌정승 ★김영후를 원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을축일에 왕후를 파면시키고 ★김영후를 우정승으로, 인승단(印承旦)을 좌정승으로, 이곡(李穀)을 밀직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고려사》 제38권 - 세가 제38 > 공민왕 1 >
공민왕 임진 원년(1352)
기미일에 서연(書筵)을 열고 영천 부원군 이능간(李凌幹), 김해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복창 부원군 ★김영후(金永煦), 한양 부원군 한종유(韓宗愈), 연안 부원군 인승단(印承旦), 전 첨의 정승 이군해, 정승으로 치사(致仕)한 손기(孫琦), 전 찬성사 허백(許伯)과 김자(金資), 안산군 안진(安震), 정천군 정을보(鄭乙輔), 영창군 김승택(金承澤), 영산군 장항(張沆), 낙 낭군 이천선(李遷善), 밀직부사 안목(安牧), 전리 판서 백문보(白文寶) 등이 날을 바꾸어 시독(侍讀)하게 하고,
또 교서를 내리기를
“원로와 대신과 사대부들이 교대로 들어와서 경서와 사기 그리고 예법에 관한 말(法言)들을 강의하며 권세 있는 집안에서 토지와 가옥 및 노비를 강탈하여 여러 해 동안 송사하고 있는 사건들과 무고한 죄로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는 사건들을 판결하여 처리하라!
첨의사와 감찰사는 나의 귀와 눈이다. 현행 정치의 옳고 그릇됨과 민간의 이해 관계에 대하여 기탄없이 바로 말하라!”고 하였다.
《고려사》 제39권 - 세가 제39 > 공민왕 2 >
공민왕 병신 5년(1356)
2월 을묘일에 왕이 영안왕 대부인 집에 갔다.
갑술일에 복창 부원군 ★김영후(金永煦)를 원나라에 보내 공신호를 준 데 대하여 사의를 표하였다.
그 표문에 이르기를
“천 년에 한 번이나 있는 드문 당신이 준 이 칭호를 받으니 천하 만국이 모두 귀를 기울여 세상에 드문 이 영예의 소식을 듣고 있다. 이것을 뼈에 아로새긴들 잊을 수 있겠는가? 몸이 가루가 되어도 보답하기 어렵다. 당신은 아랫사람에게 간락하게 대하며 마음을 전일하게 하고 중정의 길을 취하며 선조의 길을 따르고 있으므로 노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으며 말하지 않아도 믿음이 있다. 당신은 하늘의 법을 따르고 있으므로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감화되며 간직한 마음 신통하여 마치 초목의 자라나는 것이 하늘과 땅이 길러 주는 그것과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당신의 밑에 있으면서 궁궐을 보위하였으나 사소한 공로도 없었으며 왕위를 이어 이 땅을 지키면서도 조그만 공적도 없다. 그런데 뜻 밖에도 12글자의 아름다운 칭호가 백 가지에서 한 가지의 재능도 없는 이런 자에게 잘못 오게 되었다. 당신은 여러 해 동안 당신에 대한 나의 수고를 잊지 않고 또 당신을 사모한 나의 성의를 고맙게 여겨 특히 조서를 내리어 공훈 높은 신하들의 대렬에 넣어 주었다. 나는 마땅히 인(仁)을 추구하여 당신의 혜택이 만물에까지 미치도록 노력하며 의(義)를 몸소 실행하여 당신에게 성의를 다할 것을 염원하여야 겠다. 먼 곳의 어리석은 백성들의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게 그들을 안정시킬 것이며 당신의 교훈을 엄수하여 감히 노력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고려사》 제39권 - 세가 제39 > 공민왕 2 >
공민왕 신축 10년(1361)
5월 갑인일에 추밀원 직학사 한방신(韓方信)을 동북면 도병마사로, 전 첨의평리 강중상(姜仲祥)을 경상도 도 순문 진변사로 임명하였다.
임술일에 상락후(相洛侯) ★김영후(金永煦)가 죽었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그의 아들로는 ★김영돈(金永旽), 김영휘(金永暉), ★김영후(金永煦)가 있다.
★김영후(永煦)는 충숙왕 때에 여러 관직을 지나 삼사 우윤에까지 이르렀다. 충혜왕은 자기를 시종한 공로가 있다 하여 그에게 추성 보절 동덕 익찬(推誠保節同德翊贊) 공신의 칭호를 수여하고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임명하였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 가자 시종하였던 여러 측근자들과 관료들이 모두 달아나 숨어 버렸는데 홀로 ★김영후만은 왕을 호위하고 있으면서 1장 8척의 창을 맞았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로 임명되고 정방(政房)의 책임을 지게 되었으며 얼마 후에 우정승이 되었다.
공민왕 때에 서연(書筵-임금에게 글을 강론하여 주는 모임)에 참가하여 변정 도감(辨整都監)을 폐지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연을 개설한 것은 좋은 말을 들으려 한 것이었는데 그대의 말은 참으로 나의 마음과는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길로 몸이 편치 않다고 구실을 대고 내전(內殿)에 들어가 버렸다.
★김영후는 처음에는 복창(福昌) 부원군의 봉호를 받았다가 나중에 상락후(上洛侯)의 봉호를 받았다. 공민왕 10년에 나이 70세로 죽었는데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의 성품은 엄격하고 굳세고 침착하고 신중하였으며 일가 친척과 옛친지들 가운데 군색한 자가 있으면 모두 구제하여 주었다.
그 손자들인 김사안(士安), 김사형(士衡)의 나이 20세를 넘었는데 어떤 사람이 ★김영후더러 말하기를 “왜 그들을 위하여 관직을 얻어 주지 않는가?”라고 하니 “자제가 과연 현명하다면 국가에서 스스로 선발해서 쓸 것이며 만일 현명하지 못하다면 관직을 주어서 얻게 하더라고 그것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그의 아들 김천은 관직이 밀직부사에까지 이르렀다.
《고려사》 제106권 - 열전 제19 >
김훤
〔김개물(金開物)의 기사 첨부〕
김훤의 자(字)는 용회(用晦)이며 의성현(義城縣) 사람인데 원종 원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튿날 김개물이 장령 김원식(金元軾), 지평 ★김영후(金永煦) 등과 함께 다시 대궐에 가서 장세에게 죄를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왕이 왕삼석의 말을 먼저 들었는지라 성을 내어 왕에게 말 전달하는 자를 때렸다. 그러므로 사헌부에서는 문을 닫고 일을 보지 않았다.
왕이 근신(近臣)을 보내 김개물 등에게 타이르기를 “덕릉(德陵-충선왕의 능)의 일이 끝나는 것을 기다려 왕삼석의 죄를 다스릴 것이니 그대들은 나와서 일을 보아야 한다. 장세의 죄 같은 것은 본부(本府-사헌부)에서 죄에 따라 처단할 것을 허한다”라고 하였다. 김개물은 병이 있다고 핑계하고 출근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벼슬에서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14년에 그가 죽었는데 나이는 55세였다. 그는 성질이 굳세고 정직하였으며 시 짓는 것이나 글자 쓰는 솜씨가 모두 가법(家法-그 집의 전통적 방법)을 유지, 보존하였으며 남과 교제할 때에는 꼭 신의로써 일관하게 대하였다. 그의 아들은 김섬인데 과거에 급제하였다.
《고려사》 제110권 - 열전 제23 >
왕후
〔왕중귀(王重貴)의 기사 첨부〕
왕후의 처음 성명은 권재(權載)이며 몽고 이름은 탈환(脫歡)인데 정승 권부(權溥)의 아들이다. 그의 형 권준(權準)이 충선왕의 지우(知遇)를 받았다.
충목왕 원년에 어머니가 사망하여서 상중에 있었는데 기복하여 첨의 우정승(僉議右政丞)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권부가 아직 생존하여 재삼 권고하였으므로 부득이 부임하였다. 그는 처음에 선법(選法)으로 되었다가 나중에 전리 군부(典理軍簿)로 되었다. 예전 제도는 관리의 급료가 박하여 경기(京畿)의 토지를 관리 매 사람에게 약간 묘씩 주었던바 이것을 녹과(祿科)라 하였었다. 그런데 후세에 권세 있는 고관들이 거의 다 점유하였다. 그 중에서도 군부(領府)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하였기 때문에 왕후는 명령을 발포하여 이것을 회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간악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의 증오를 받아 파면되고 ★김영후(金永煦)가 그 뒤를 이으니 당시 사람들이 실망하였었다.
이듬해에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한 달이 지나자 원나라 임금이 왕후에게 상복을 벗고 입조(入朝)하라고 하였다.
그 다음해에 왕후는 좌정승 ★김영돈(金永旽)과 함께 황제의 명령으로 귀국하여 왕에게 말하기를
“황제가 선왕(先王)의 품행이 나쁜 데 대하여 묻기 때문에 저희들이 대답하기를 ‘선왕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다만 소인놈들이 잘못 인도한 까닭입니다. 지금도 그 소인배들이 아직 제거되지 않고 있어서 왕을 또 잘못 인도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더니 황제가 수긍하고 저희들더러 나가서 그들을 처단하라는 지시를 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태비(太妃)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술을 주어 위로하고 ★김영돈에게 황제의 비밀 지령을 전달하기를 청하였다. 그 지령에 이르기를 “왕후를 복직시켜 정승을 삼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때 우정승 노정이 곁에 있다가 부끄러워 낯을 붉히고 물러 나갔으며 그 후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에 정치 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고 왕후와 ★김영돈, 찬성사(贊成事) 안축(安軸), 판밀직(判密直), 김광철(金光轍)을 판사(判事)로 삼고 정연, 김실 등을 속관(屬官)으로 삼았으며 속관들을 각 도에 갈라 보내 토지를 측량케 하되 모두 안렴사(按廉使)를 겸임시켰다. 김실이 양광도(楊廣道)를 담당하였는데 이천현(利川縣) 관속이 이전에 공전(公田)을 정승 채하중(蔡河中), 이문 윤계종(尹繼宗)에게 뇌물로 준 사실이 발각되었다. 김실이 관속의 귀를 베어 도내에 조리 돌리고 공문으로 도감에 보고하였더니 녹사 안길상(安吉祥)이 윤계종의 지난날의 은혜를 생각하고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
왕후와 ★김영돈이 노하여 그의 뺨을 갈기고 죄를 성토한 후 철직시켰다. 원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왕후와 ★김영돈에게 의복과 술 및 화폐를 주어 정 치사업(整治事業)을 적극 추진하라고 고무하였다.
기황후(奇皇后)의 족제(族弟) 기삼만(奇三萬)이 권세를 믿고 남의 토지를 빼앗으며 함부로 불법행위를 하기 때문에 왕후 등이 그를 매를 쳐서 순군(巡軍)에 가두었는데 그는 옥에서 죽었다. 그리하여 행성 이문소(行星理問所)에서는 도감관 좌랑 서호(徐浩)와 교건 전녹생(田祿生)을 구금하고 심문하였다.
이에 왕후는 ★김영돈과 함께 첨의부(僉議府)에 그를 보내기를
“우리들이 직접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본국의 정치(整治) 사업을 진행하는바 이제 행성 이문소에서 기삼만의 죽음을 여러 도감(都監)의 책임으로 전가시키고 서호와 전녹생을 가두었다. 이문 하유원(河有源)이 사감을 품고 반드시 비법적 수단으로써 강제로 허위 자백을 짜내려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정치 사업(整治事業)을 추진시킬 수 없으니 이 사정을 중서성에 전달하여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왕후는 ★김영돈과 함께 직접 황제에게 제기하기 위하여 원나라로 떠나 갔다. 그러자 이문소(理問所)에서는 뒤따라 사람을 보내 도감관(都監官)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때마침 황제가 중서성 우사도 올리불화(兀理不花) 등을 보내 왕과 왕후 및 ★김영돈에게 의복과 술을 보내 정치(整治)에 대한 사업을 포상하였다. 왕후와 ★김영돈이 동선역(洞仙驛)에서 그들을 만나 되돌아 왔다.
올리불화는 황제의 명령으로 정치사업(整治事業)이 얼마나 진척되었는가를 물었다. 이문소에서는 이 소문을 듣고 서호 등을 석방하였으며 또 서호를 억지로 자복케 한 도감관(都監官) 오경(吳璟), 진영서(陳永緖), 안극기(安克己), 이원구(李元具), 전성안(全成安) 등을 옥에 가두었다가 석방하였다. 또다시 그들이 강제로 죄를 들씌우려고 하였으나 불복하므로 오경 등을 모두 옥에 가두었다. 원나라에서 기삼만이 죽은 소문을 듣고 공부낭중 아로(阿魯), 형부낭중 왕호류(王胡劉) 등을 보내 심문하고 다시 직 성사인 승가노(僧家奴)를 보내 정치관(整治官) 백문보(白文寶) 등 10여 명에게 매를 쳤다. 왕후와 안축(安軸)만은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무죄로 되고 김광철(光轍), 이원구(元具)는 병으로 인하여 매를 면하였다. 이어 황제가 조서를 보내 정치 도감(整治都監)을 두고 왕후에게 판사(判事)를 시켰다.
이때 ★김영돈이 자기 의견을 고집하였는데 왕후는 그와 서로 다투기를 수치로 여겼다. 황제가 문책하고 일체의 책임을 왕후에게 일임하였다. 왕후는 이어 도첨의사사(都僉議司事)를 책임졌다.
《고려사》 제124권 - 열전 제37 > 폐행 2 >
배전
배전은 흥해군(興海郡) 사람이며 그의 어머니는 궁비(宮婢)였다.
충정왕(忠定王) 때에 배전은 행성(行省) 이문(理問)으로 있었는데 원나라가 배전과 중랑 ★김영후(金永煦), 원외랑(員外郞) 이원필(李元弼) 등이 재물을 받고 왜적을 석방하였다는 이유로 그들을 옥에 가두고 문초하였는데 때마침 대사령이 내려서 석방되었다.
《고려사》 제124권 - 열전 제37 > 폐행 2 >
신청
〔박청(朴靑)의 기사 첨부〕
신청(申靑)은 일명 신송(申松)인데 다인(多人) 현 벌리(伐里) 역의 역리(驛吏)였다. 일찍이 원나라로 가서 심왕(瀋王) 고(暠)의 시종이 되어 총애를 받았다.
행성이 이 글을 베껴 ★김영후(金永煦)에게 주어서 중서성에 제출하게 하였다. ★김영후는 그 매부 별가불화(別哥不花)가 당시 원나라 평장사(平章事)였으며 왕에게는 양이형제(兩姨兄第)의 관계가 있는 까닭에 왕이 ★김영후에게 초 1백 정(錠)과 능직 비단 15필, 모시 30필을 주어 보냈다.
《고려사》 제132권 - 열전 제45 > 반역 6 >
신돈
신돈은 영산(靈山) 사람이요, 그의 모친은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 여종이다.
신돈은 어려서 중이 되었다. 이름은 신변조(遍照)요, 자는 요공(耀空)이다. 신돈은 그 어미가 천하여서 중들 사이에서도 한축에 들지 못하고 항상 산방(山房)에 거처하고 있었다.
밀직 허강(許綱)의 처 김씨(金氏)는 상락군(上洛君) ★김영후(金永煦)의 손녀인데 허강이 죽으니 신돈이 문벌을 탐내어 그 과부에게 장가 들고자 했다. 김씨가 이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평생에 남의 여자라고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정히 나를 욕보이려고 한다면 나는 자결하고 말겠다”라고 하고 드디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신돈이 이 말을 듣고 단념하였다.
▣ 김윤식 -
▣ 김윤만 - 이 많은 자료의 워드화 그리고 열정 그저 놀랍습니다.
▣ 솔내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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