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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태보공 김알지에서 경순왕까지 15 (21세 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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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1-22 05:23 조회1,8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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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시도기념물 20호

명 칭 ●법광사지 (法廣寺址)

분 류 사지

수 량 23,641㎡

지정일 1975.12.30



소재지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상읍리 967외 20필

소유자 국유,사유

관리자 영일군



법광사는 신라 진평왕(재위 579∼631) 때 건립된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으며, 현재의 건물들은 1952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법광사터에는 석가불사리탑, 연화석불좌대, 쌍두귀부, 당간지주 등의 유물이 남아 있으며, 조선 영조 때에 세운 사리탑 중수비가 있어 법광사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문화재명 법광사지(法廣寺址)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왕명에 의하여 건립된 사찰인 법광사터이다. 법광사는 건물 규모가 525칸이나 되는 큰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현재 법광사터에는 1952년에 건립한 법광사가 있고, 석가불사리탑, 연화석불좌대, 쌍두귀부, 당간지주와 조선 영조시대에 세운 사리탑중수비가 남아 있다.



연화석불좌대는 소실된 대웅전 석가불의 좌대로 추측되는데, 높이 1.1m, 직경 2.2m, 원경 0.5m이다. 이중기단 위에 4층으로 된 석가불사리탑은 인도석가모니 진신사리 22립(粒)을 보관하고, 왕족의 혈통을 계승하여 삼국통일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 탑을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탑의 높이는 4.2m이다. 쌍두귀부는 너비 1.4m, 높이 1.8m이다.



법광사 북쪽방향 150m 지점에는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위패를 모신 숭안전이 있다.









종 목 보물 741호

명 칭 ●민애대왕석탑사리호 (敏哀大王石塔舍利壺)

분 류 도토공예류기타

수 량 1점

지정일 1982.12.07



소재지 서울 중구 필동3가 26 동국대학교도서관

시 대 통일신라 경문왕

소유자 동국대학교

관리자 동국대학교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호) 내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사리 항아리이다.



사리를 탑에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이 항아리는 높이 8.3㎝, 아가리 지름 8.0㎝, 밑지름 8.5㎝이다. 현재는 크고 작은 4개의 조각으로 깨졌고, 뚜껑도 없어졌으며 몸통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와 같은 손상은 도굴 당시에 입은 피해로 보인다.



아가리가 넓고 어깨가 부풀어 있으며, 아랫부분이 좁은 항아리 모양으로 작고 아담하다. 이러한 형식은 법광사 삼층석탑, 취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다.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점이 특이하다. 어깨부분에는 꽃 구름무늬와 촘촘한 빗금 꽃무늬를 두 칸에 나누어 새겨 둘렀다.



몸통에는 가로, 세로로 칸을 내어 7자 38행의 글자를 음각하였다. 글 중에는 이 항아리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을 위하여 건립된 석탑과 연관이 있으며,민애왕의 행적들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또한 탑을 만든 시기가 경문왕 3년(863)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있다.



문화재명 민애대왕석탑사리호(敏哀大王石塔舍利壺)

납작한 납석제 항아리인데 현재는 크고 작은 4개의 조각으로 깨졌을 뿐 아니라 뚜껑도 없어졌고 몸체도 완전하지 않다. 이와 같은 손상은 도굴 당시에 입은 피해로 보인다. 어깨에는 밀집점선 반원문이 아래위가 어긋나게 조각되었고 밑에는 앙련(仰蓮)이 조각되었다. 그 사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38행에 각 행 7자의 명문(銘文)이 음각되었다. 특히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점이 특이하다. 명문은 『민애대왕추숭복업조석탑기(敏哀大王追崇福業造石塔記)』로 시작되고 끝이『함통사년세재계미(咸通四年歲在癸未)』로 되어 있어, 이 사리호(舍利壺)는 신라 민애대왕(敏哀大王)을 위하여 건립된 석탑과 연관이 있으며 탑을 세운 시기는 함통(咸通) 4년(863)일 것으로 짐작된다. 1967년 동화사비로암삼층석탑(桐華寺毘盧庵三層石塔)을 해체 수리할 때는 이미 사리구(舍利具)가) 도굴 절취당한 이후였으며, 남아 있는 밑바닥 동판과 여기 조각된 연화문 및 금동판을 고정시켰던 송지(松脂)의 잔여상태가 이 사리호와 함께 출토되었다는 사방불(四方佛) 금동함의 크기와 일치함으로써 이 사리호는 이 석탑에 장치되었던 것이 확실해졌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윤식 -

▣ 솔내 -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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