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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공파 史記(1)-김영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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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01-23 07:30 조회1,7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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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공파 선조님들에 관한 역사 자료(고려사. 고려사 절요. 신증동국여지승람, 연려실 기술. 대동야승 등)를 찾아 연재해 보려 합니다.  우선 문숙공 김영돈 선조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문숙공(휘 永暾. 문영공 휘 恂의 子)의 자료를 조사했습니다. 



1.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 (이행 저. 1969)
   경기도 풍덕군(豊德郡) 편 
산천 백마산(白馬山)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 고려에서 이 산을 우소(右蘇)로 삼았다. 고종 37년에 대장군 이세재(李世材)와 신집평(愼執平) 등을 보내 비로소 대궐을 이 산 남쪽 임해원(臨海院) 옛터에 지었다.



고려 ★김영돈(金永暾)의 호종(扈從)시에, "비취빛 일산 푸른 바다 위에 거둥하니, 옥 퉁소 부는 소리 흰 구름 사이에 흘러가네. 여기는 티끌 한 점 날아오기 어렵구나. 수 많은 푸른 산, 비 온 뒤에 분명하네." 하였다. 말흘산(末訖山) : 군의 북쪽으로 1백 보(步) 되는 데 있다. 덕적산(德積山)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삼성당산(三聖堂山) : 덕수현(德水縣) 남쪽 5리에 있다. 여리산(如利山) : 덕수현 서쪽 5리에 있다. 마군산(馬群山) : 덕수현 서남쪽 10리에 있는데, 옛 이름은 마제산(馬蹄山)이다. 바다 :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승천포(昇天浦)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하원도(河源渡) : 군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일찍이 공주와 함께 여기서 조수를 구경하였다. 인녕도(引寧渡) : 덕수현에 있는데, 세속에서는 인월곶(引月串)이라고 부른다. 군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졌으니, 양화도(楊花渡) 하류이다. 조강도(祖江渡) : 덕수현에 있다



 *<원시 소개>(안동김씨 홈페이지 <세덕사 소개>에서)
扈從白馬山應御製 (임금을 모시고 백마산에 올라 임금의 시에 응하여 지은 시)



翠保行尋蒼海上   취보를 받들고 임금을 모시어 창해 위를 찾아오니
玉簫吹送白雲間   흰구름 사이로 옥피리 소리 불어 보내네
紅塵一片飛難到   한 티끌의 홍진도 날아 오기 어려운데
萬点螺分雨靑山   만점의 푸른 소라요, 비 갠 뒤엔 청산만 벌여 있네 



  지은 年代 : 1347(高麗 忠穆 3) 좌정승(左政丞) 때.



 



김영돈(金永暾) 1285년(충열왕11)---1348년(충목왕4)



 자(字)는 휘곡(輝谷). 호(號)는 균헌(筠軒) 또는 구봉(龜峰)이다. 장경공(章敬公) 정해(鄭土皆)로 부터 사사(師事)하였다. 1305년(충열21) 문과에 제 3등으로 급제하여 강릉부 녹사(江陵府 錄事)가 되었다. 1340년(충혜왕 복위1)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공수(李公遂) 등을 시취하였다. 



1342년(충혜왕 3) 공은 조적(曺由頁)의 난을 평정할 때 아우인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와 함께 이에 대비하는 상소를 올렸고, 성병의상찬일등공신(誠秉義翊贊一等功臣)에 추천되기도 하였다. 그 교서의 글에 이르기를 "적신 조적이 난을 꾸미고 난 후에 과인이 수도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간신 여당이 거짓말로 날조하여 사람을 모아서 국가의 난을 모의하였지만 시종하는 신하들은 시종 절의를 지켜 과인을 보좌하고 협조하였는 바 그 공은 너무도 막대하고 커서 잊을 수가 없도다. 그것으로써 그대 등을 일등공신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충혜왕이 원나라의 재상인 국노(國老)에게 붙잡히매 공은 왕의 죄를 사면해 달라는 상서를 올리려 하자 많은 사람들의 논의는 같지 않았다. 공은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함을 청함은 마땅하고 급한 일이다."고 하였다. 이는 고려사와 여지승람에 보인다.



 충혜왕때 삼중대광첨의사사(三重大匡僉議司事)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1346년(충목왕2)에 찬성사(贊成事)로 원나라에 가서 의복과 옷, 음식 등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이듬해 왕후(王煦)와 함께 귀국하여 원나라에서 왕의 실덕을 묻자 소인들의 장난이라 변명하니 이를 정리하라는 원나라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충목왕 때(1347년)에 좌정승 판정치도감사(左政丞 判整治都監事-정치도감의 長 . 整治都監-1347년 충목왕 3년에 지방 토호족들이 과도하게 소유한 田土를 개량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했던 관청으로 이듬해 없어짐)를 지냈다. 이때 지방 토호들의 과도한 토지 소유를 없애고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여러 반발 세력들과 기황후(奇皇后-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의 4촌 아우(奇三萬-기황후의 배경을 믿고 횡포가 심하자 고려에서 옥에 가두어 죽임)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으로 인해 원나라로부터는 치하를 받았으나,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의 심한 반발에 부닥쳐 구금되기도 하였다.그러나 원나라의 지지로 곧 석방되었다. 결국 공은 의도한 목표가 좌절되자 홧병을 앓다가 충목왕 4년 7월 13일 64세로 몰하였다.



묘는 풍덕(豊德) 앙동산(仰洞山)이나 실전하여 충남 천안시 병천면 백전(栢田)에 설단(設壇)했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 김윤만 - 선조님들의 행장과 역사 소중하게 생각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자세한 할아버지 행적기가 계속 이어지니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 김주회 - 정간공(김영후) 선조님의 백형이신 문숙공(김영돈) 기록을 보게 되어 너무나 반갑고 고맙습니다. 문숙공의 스승 정해 라는 분은 큰 매형이 되는 정책의 아버지입니다. 덕수현 이라는 곳은 문영공(김순)의 묘지명이 발견된 곳인가요?
▣ 솔내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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