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보공 김알지에서 경순왕까지 17 (23세 문성왕 경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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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1-24 02:34 조회1,528회 댓글0건본문
태보공 김알지에서 경순왕까지 17 (23세 문성왕 경응)
우리 범신라김씨의 鼻祖---시조 이전의 先系祖上중 가장 높은 사람---이신 태보공 김알지로부터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까지의 선조님들을 순례하고 있습니다.
1. 시조대왕 金閼智(알지) ---65(탈해이사금 9)∼?
2. 勢漢(세한)
3. 阿道(아도)
4. 首留(수유)
5. 郁甫(욱보)
6. 仇道(구도) ---172년, 188년, 189년, 190년
7. 末仇(말구) 291년(유례이사금 8) 정월에 이벌찬(伊伐飡)이 됨
-----------형제 미추 : ?∼284(유례이사금 1). 신라 제13대왕. 재위 262∼284.
8. 奈勿王(내물왕) ---?∼402. 신라 제17대왕. 재위 356∼402
9. 卜好(복호) ---412년 고구려에 인질로, 418년 신라로 귀환
-----------형제 눌지 :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458, 신라 제19대왕, 재위 417∼458
10. 習寶(습보)
11. 智證王(지증왕) --- 437(눌지왕 21)∼514(법흥왕 1). 신라 제22대 왕. 재위 500∼514
12. 眞宗(진종)
13. 欽運(흠운) ---?∼655(태종무열왕 2). 내물마립간의 8대손으로, 아버지는 잡찬(#잡19飡) ★달복(達福)
14. 摩次(마차)
15. 法宣(법선)
16. 義寬(의관) ---670년, 680년
17. 魏文(위문) ---712년 중시(=시중)
18. 孝讓(효양)
19. 元聖王(원성왕) ---?∼798(원성왕 14). 신라 제38대 왕. 재위 785∼798.
20. 禮英(예영)
21. 均貞(균정)
22. 神武王(신무왕) ---?∼839(신무왕 1). 신라 제45대왕. 재위 839년 4월∼7월.
●23. 文聖王(문성왕) ---?∼857(헌안왕 1). 신라 제46대왕. 재위 839∼85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경응(慶應)
24. 安(안)
25. 敏恭(민공)
26. 實虹(실홍)
27. 孝宗(효종)
28. 敬順王(경순왕) 신라56대 끝임금
23. 문성왕(文聖王)
?∼857(헌안왕 1). 신라 제46대왕. 재위 839∼85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경응(慶應)이다. 신무왕의 태자.
어머니는 정계부인(貞繼夫人, 또는 定宗太后, 貞從太后), 할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이며 뒤에 성덕대왕으로 봉하여진 균정(均貞), 할머니는 뒤에 헌목태후(憲穆太后)로 봉하여진 진교부인(眞矯夫人) 박씨(朴氏), 비(妃)는 소명왕후(炤明王后)이다. 본래 부인으로 박씨가 있었고, 또 뒤에 위흔(魏昕)의 딸로 비를 삼은 일이 있는데, 소명왕후는 이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신무왕은 흥덕왕이 죽은 뒤 계속되어온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지만 6개월도 못 되어 죽어, 왕위쟁탈과정에서 쌓여온 많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숙제는 그 아들 문성왕대로 고스란히 넘어오게 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왕위를 둘러싼 균정계와 원성왕의 장자 인겸(仁謙)의 아들인 충공계(忠恭系)와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이 싸움에서 일단 패한 균정계의 우징(祐徵)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와 김주원(金周元)의 후손 김양(金陽)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그 결과 장보고와 김양 등 신무왕을 도운 귀족세력은 그에 상응한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문성왕은 즉위하자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봉하고, ★예징(禮徵)을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였고 ★김양에게 소판(蘇判)의 관등을 주면서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하였다. 반면, 이와같은 귀족세력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841년(문성왕 3) ★홍필(弘弼)의 모반은 그러한 모순의 첫번째 노출에 불과하다.
846년 ★장보고의 반란이 있었다. 장보고는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세우려 하였는데, 조신들이 해도(海島)사람의 딸을 왕비로 맞을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자, 청해진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염장(閻長)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한 인물이 ★김양이라 하는데, 842년 김양이 그의 딸을 왕비로 세우는 기사가 이러한 추측을 낳게 한다. 장보고의 난이 진압되자 851년 청해진을 혁파하였으며, 그곳 민호(民戶)를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시켰다. 궁복(弓福:張保皐의 별명)의 난 이후에도 정치적인 불안은 계속되었다.
847년 이찬(伊飡) ★양순(良順)과 파진찬(波珍飡) ★흥종(興宗)의 반란이 있었고, 849년 이찬 ★김식(金式)·★대흔(大昕)의 반란이 있었다. 양순이나 대흔은 모두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전래로부터 계속된 왕위 다툼은 그대로 계속되다가, 857년 문성왕은 숙부 ★의정(誼靖)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유조(遺詔)를 내리고 죽었다.
이것은 그 한달 전에 문성왕을 도와오던 ★김양이 죽자, 상대등인 ★의정과 시중인 ★계명(啓明)이 결합하고 왕을 핍박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0, 1980). 〈金杜珍〉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지난 주에 방영된 장보고의 내용을 다시 보았습니다. 문성왕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우리 범신라김씨의 鼻祖---시조 이전의 先系祖上중 가장 높은 사람---이신 태보공 김알지로부터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까지의 선조님들을 순례하고 있습니다.
1. 시조대왕 金閼智(알지) ---65(탈해이사금 9)∼?
2. 勢漢(세한)
3. 阿道(아도)
4. 首留(수유)
5. 郁甫(욱보)
6. 仇道(구도) ---172년, 188년, 189년, 190년
7. 末仇(말구) 291년(유례이사금 8) 정월에 이벌찬(伊伐飡)이 됨
-----------형제 미추 : ?∼284(유례이사금 1). 신라 제13대왕. 재위 262∼284.
8. 奈勿王(내물왕) ---?∼402. 신라 제17대왕. 재위 356∼402
9. 卜好(복호) ---412년 고구려에 인질로, 418년 신라로 귀환
-----------형제 눌지 :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458, 신라 제19대왕, 재위 417∼458
10. 習寶(습보)
11. 智證王(지증왕) --- 437(눌지왕 21)∼514(법흥왕 1). 신라 제22대 왕. 재위 500∼514
12. 眞宗(진종)
13. 欽運(흠운) ---?∼655(태종무열왕 2). 내물마립간의 8대손으로, 아버지는 잡찬(#잡19飡) ★달복(達福)
14. 摩次(마차)
15. 法宣(법선)
16. 義寬(의관) ---670년, 680년
17. 魏文(위문) ---712년 중시(=시중)
18. 孝讓(효양)
19. 元聖王(원성왕) ---?∼798(원성왕 14). 신라 제38대 왕. 재위 785∼798.
20. 禮英(예영)
21. 均貞(균정)
22. 神武王(신무왕) ---?∼839(신무왕 1). 신라 제45대왕. 재위 839년 4월∼7월.
●23. 文聖王(문성왕) ---?∼857(헌안왕 1). 신라 제46대왕. 재위 839∼85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경응(慶應)
24. 安(안)
25. 敏恭(민공)
26. 實虹(실홍)
27. 孝宗(효종)
28. 敬順王(경순왕) 신라56대 끝임금
23. 문성왕(文聖王)
?∼857(헌안왕 1). 신라 제46대왕. 재위 839∼85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경응(慶應)이다. 신무왕의 태자.
어머니는 정계부인(貞繼夫人, 또는 定宗太后, 貞從太后), 할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이며 뒤에 성덕대왕으로 봉하여진 균정(均貞), 할머니는 뒤에 헌목태후(憲穆太后)로 봉하여진 진교부인(眞矯夫人) 박씨(朴氏), 비(妃)는 소명왕후(炤明王后)이다. 본래 부인으로 박씨가 있었고, 또 뒤에 위흔(魏昕)의 딸로 비를 삼은 일이 있는데, 소명왕후는 이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신무왕은 흥덕왕이 죽은 뒤 계속되어온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지만 6개월도 못 되어 죽어, 왕위쟁탈과정에서 쌓여온 많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숙제는 그 아들 문성왕대로 고스란히 넘어오게 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왕위를 둘러싼 균정계와 원성왕의 장자 인겸(仁謙)의 아들인 충공계(忠恭系)와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이 싸움에서 일단 패한 균정계의 우징(祐徵)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와 김주원(金周元)의 후손 김양(金陽)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그 결과 장보고와 김양 등 신무왕을 도운 귀족세력은 그에 상응한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문성왕은 즉위하자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봉하고, ★예징(禮徵)을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였고 ★김양에게 소판(蘇判)의 관등을 주면서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하였다. 반면, 이와같은 귀족세력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841년(문성왕 3) ★홍필(弘弼)의 모반은 그러한 모순의 첫번째 노출에 불과하다.
846년 ★장보고의 반란이 있었다. 장보고는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세우려 하였는데, 조신들이 해도(海島)사람의 딸을 왕비로 맞을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자, 청해진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염장(閻長)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한 인물이 ★김양이라 하는데, 842년 김양이 그의 딸을 왕비로 세우는 기사가 이러한 추측을 낳게 한다. 장보고의 난이 진압되자 851년 청해진을 혁파하였으며, 그곳 민호(民戶)를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시켰다. 궁복(弓福:張保皐의 별명)의 난 이후에도 정치적인 불안은 계속되었다.
847년 이찬(伊飡) ★양순(良順)과 파진찬(波珍飡) ★흥종(興宗)의 반란이 있었고, 849년 이찬 ★김식(金式)·★대흔(大昕)의 반란이 있었다. 양순이나 대흔은 모두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전래로부터 계속된 왕위 다툼은 그대로 계속되다가, 857년 문성왕은 숙부 ★의정(誼靖)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유조(遺詔)를 내리고 죽었다.
이것은 그 한달 전에 문성왕을 도와오던 ★김양이 죽자, 상대등인 ★의정과 시중인 ★계명(啓明)이 결합하고 왕을 핍박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0, 1980). 〈金杜珍〉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지난 주에 방영된 장보고의 내용을 다시 보았습니다. 문성왕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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